이승만이 비호했던 노덕술, 유권자가 단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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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5.08.15. 오후 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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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출신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운명

[오마이뉴스 박석철 기자]

 친일고문경찰로 유명했던 울산 출신 노덕술
ⓒ 친일인명사전
광복 70주년을 맞아 친일 잔재를 청산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최근 독립운동가들의 자손이 빈곤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 반해 친일파 자손들은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언론의 전수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친일청산 여론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울산 출신의 인물 중 친일로 유명한 노덕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이관술의 엇갈린 운명을 보면 친일청산의 필요성이 새삼 대두된다.

특히 친일고문경찰로 악명을 떨친 노덕술이 지난 1960년 고향인 울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것을 두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민들이 많다. 울산이 1962년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된 후 산업수도로 성장하는 과정을 두고서다. 만일 당시 노덕술이 국회의원이 됐다면 '반공'에 이어 '산업'을 빌미로 제2의 전성기를 누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해방후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면서 환호를 질렀다. 하지만 그도 잠시, 오히려 그가 이승만에 의해 반공투사로 칭송받으며 승승장구하자 후환을 두려워하며 그 모습을 내심 지켜봐야만 했다. 1960년, 유권자들은 표로써 그를 심판했다. 선거에서 낙마한 노덕술은 두문불출하다 8년 뒤 쓸쓸하게 최후를 맞았다.

반면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노덕술에 의해 숱한 고문을 당해야 했던 울산 출신 이관술은 해방후 공산주의 활동이 빌미가 돼 6.25전쟁 직후 학살당했고, 그의 맞사위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처형되고 나머지 가족들도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이관술의 유가족들이 지난 2012년 '국가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지난 3월 27일 대법원은 '그동안 입은 피해를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비록 이번 승소가 이관술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관술의 명예회복 단서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제 5대 국회의원에 당당히 출마한 노덕술, 유권자들이 심판

 지난 1960년 7월 29일 치른 제 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노덕술
ⓒ 중앙선관위

지난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참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당당히 출마한 한 후보자의 명단이 눈에 띈다. 바로 일제시대 악명높은 고문순사로 이름을 날린 노덕술이다. 노덕술은 경상남도 제24선거구(울산)에 다른 후보 7명과 함께 출마했다.

당시 울산 출마자들은 노덕술을 포함해 김성탁(무소속), 양기태(무소속), 정해영(무소속), 탁장제(무소속), 김택천(민주당), 이수갑(사회대중당), 김병용(한국사회당) 등이다. 노덕술은 후보자 등록에서 나이를 1900년 7월 29일생(60세), 직업은 무직, 학력은 의전교졸, 경력을 의무 총감부관국장으로 기재했다.

당시 선거에서는 투표자 4만 1109명 중 1만 5879(38.62%)를 얻은 정해영씨가 당선됐다. 지역 정가에 따르면 3대 민의원을 지낸 정해영씨는 울산의 덕망 있는 정치가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노덕술은 1744표(4.24%)만 얻어 전체 8명의 후보중 6번 째에 그치며 낙마했다. 기록에 따르면 노덕술은 선거에 낙마한 후 행방이 묘연하다 1968년 4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했다.

노덕술은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됐지만 이승만의 비호로 풀려나 1950년 육군 본부 범죄수사단장, 1955년 서울 15범죄수사대 대장 및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을 지냈다. 이후 뇌물수뢰 혐의로 파면된 후 국회의원으로 재기를 노리던 노덕술을 유권자들이 심판한 것이다.

울산의 인물에도 선정될뻔한 노덕술, 시민들이 막아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된 후 법정으로 들어서는 노덕술
ⓒ 친일인명사전
한편 울산시가 지난 2014년 울산 정명(울산이라는 이름이 정해진 때) 600년 기념사업으로 추진한 <울산의 인물·사진> 발간사업에서 노덕술은 사후 명예회복을 노렸으나 시민들이 여론으로 이를 무마시켰다.
울산시는 이 책자 발간을 위해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센터에 의뢰, 이센터의 위탁을 받은 10명의 인물선정위원가 친일고문경찰 노덕술을 587명의 예비후보에 포함했다. 하지만 이후 시민들의 거센 비난여론이 몰아쳤고 결국 노덕술은 울산의 인물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이들은 항일운동에 앞장서다 친일고문경찰 노덕술에 의해 숱한 고문을 받았던 울산 출신 이관술도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노덕술과 함께 제외시켰다.

이병주가 쓴 <남로당>에는 "일제시대 고문왕으로 알려진 노덕술이란 경찰관이 있었는데 그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어떤 애국지사도 배겨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관술은 노덕술의 손에 세 번 걸려 세 번 죽었다가 네 번 되살아나는데도 전향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왜경에 잡혀 그들의 고문을 못 이겨 전향한 사람들에게 이관술은 눈부신 존재였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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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울산>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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