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창칼럼] 대법원장이 정치적 흥정거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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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12.11. 오후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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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후보자 인준동의안 부결
사법부마저 정쟁 수단 비판 자초
재판·인사 지연되면 국민 피해 커
후임 인선 서둘러 사태 수습해야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결국 부결됐다. 전체 298석 중 168석을 가진 더불어민주당이 본회의 직전 의총에서 부결을 당론으로 정해 표결에 나선 결과다. 우리 헌정사에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건 1988년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 때 단 한 번뿐이었다. 그간 사법 공백 사태를 막기 위해 대법원장 임명동의안만큼은 여야가 대승적으로 협력하는 게 관례였지만 그 전통이 깨졌다. 정치권이 사법시스템을 마비시키고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까지 침해한 건 정치적 악업을 쌓은 것이다.

이번 사태가 몰고 올 충격은 크다. 지난달 24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사법부 수장 자리는 비어 있다. 문제는 공백 사태 장기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새 후보자를 찾아 지명 절차부터 다시 거쳐야 하는 데다 국정감사 등 국회 일정 때문에 두 달 이상 공백이 예상된다. 대법원장 권한대행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권한대행 업무 범위가 모호하고 한계가 뚜렷해 혼선을 겪고 있다. 퇴임을 앞둔 대법관들의 후임 임명 제청부터 전원합의체 및 상고심 재판 지연, 법관 인사 등 난제가 수두룩하다. 안 그래도 심각한 재판 지연이 가중될 게 뻔하다. 그 피해는 국민이 입는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민주당의 부결 이유는 군색하다. 이 후보자의 비상장 주식 재산 신고 누락, 증여세 탈루, 농지법 위반 의혹 등을 문제 삼았다. 물론 가벼운 결함이 아니다. 하지만 역대 대법원장들을 돌아봐도 무결점 인물은 없다. 김명수·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도덕성 논란에도 국회 인준을 통과한 점을 고려하면 치명적 결격 사유로 보기 어렵다. 형평에도 어긋난다. 이런 부담을 무릅쓰고 민주당이 이 후보자 낙마를 밀어붙인 건 윤석열정부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자 ‘사법부 길들이기’ 의도가 다분하다. 의원들의 자율 투표에 맡겨야 할 사안을 당론으로 채택해 표 이탈을 원천봉쇄한 걸 봐도 그렇다.

게다가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런 인물을 계속 보내면 두 번 세 번도 부결시킬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윤석열 대통령이 다른 대법원장 후보를 지명해도 같은 사태가 반복될 수 있다는 얘기다. ‘역대 최악의 사법부’를 만든 김 전 대법원장처럼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판사라야 인준해 주겠다는 오만과 독선 아닌가. 분노와 자괴감이 든다는 법관들이 많다. 삼권분립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대법원장 자리를 정치적 흥정 대상으로 삼는 건 후진국에서나 벌어지는 행태다.

이번 사태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재판리스크 방탄용’이라는 의혹도 만만치 않다. 이 대표는 대장동·위례 특혜 사건, 쌍방울 불법 대북 송금 사건 등 총 7가지 사건의 10가지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중 한 사건에서만 대법원에서 징역형이 확정돼도 다음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이 대표로서는 2027년 대선 전까지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하는 처지다. 이 대표에게 유리한 사법 환경을 만들기 위해 새 대법원장 인준을 최대한 늦출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흠결 있는 후보를 낸 대통령실과 여당의 책임도 작지 않다. 대통령실은 부결 후 “국민 권리를 인질로 삼고 정치 투쟁을 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여당도 연신 야당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원인을 제공한 데 대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헌정 시스템이 정상 작동을 멈출 위기 상황에서 이를 막으려는 집권여당의 절박함과 노력이 부족했다. 언제까지 의석 열세를 핑계로 댈지 답답하다. 여소야대라는 정치 현실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 아닌가.

대법원장 공백 사태는 여야 정치권 모두의 책임이다. 네탓 공방이나 벌이며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국민·기업들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건 정상적인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윤 대통령은 국민 눈높이에 맞고 야당이 거부할 수 없을 만한 후보자 인선을 서둘러야 한다. 거대 야당을 설득하는 정치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흘려듣지 말라. 민주당이 힘 과시를 멈추지 않고 계속 몽니를 부린다면 민심의 역풍을 맞을 것이다. 국민은 사법부 정상화를 방해하는 쪽에 회초리를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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