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위대한 업적들[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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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국가보훈부는 1992년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32년 만에 464번째로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이 이 정도 수준의 나라였구나’ 하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독립운동이란 무엇이며, 이승만은 누구인가? 독립운동과 이승만은 분리될 수 없는 결합이다. 이승만은 조선이 부패와 무능으로 망해가던 때 근대화를 목표로 하는 구국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1897년 22세에 배재학당을 졸업할 때, 그는 대표로 ‘한국의 독립’이라는 제목의 영어 연설을 했다. 이승만은 또한 1904년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독립운동을 자각했다. 이승만은 “사람마다 대한제국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재물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중대한 직책이라 이 직책을 사람마다 자기 어깨에 메고 있나니 꿈깨고 정신차려 어서 바삐 합심하여 나서서 일들 하세, 동포들아…”라고 했다. 처음으로 근대적 독립을 자각하며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은 근대적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후 1910년 귀국했으나, 105인 사건으로 체포 위험이 닥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에도 그는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미국 정치인들을 만나 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했고, 한인이 많은 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만들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상징이 됐다. 1919년 3·1운동 이후 그는 러시아지역 한인임시정부의 국무경, 상해 한인임시의정원의 국무총리,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됐다. 또, 워싱턴에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 본부를 설치했다.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고, 1920년 12월 그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이승만은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 돼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을 발송하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소련의 위험성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한국의 즉각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1945년 해방 후에도 이승만은 독립의 상징이었다. 허헌 등 좌익들은 인민공화국의 주석 취임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거부했다. 그러나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총재는 맡았다. 또한, 공산주의 세력이 즉각적인 독립이 아닌 신탁통치를 찬성했기에 이승만은 좌익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목표로 삼았기에 이승만을 가택연금하기도 했다. 그러다 뒤늦게 소련의 의도를 알아챈 미국은 이승만의 입장처럼 유엔 감시 아래 한반도 자유선거를 실시키로 했다. 진정한 주권국가 탄생의 길이 열린 것이다. 김구 등은 남북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소련과 북한에 이용됐을 뿐이다.

국가보훈부의 사명은 국가의 주권을 되찾고자 노력한 사람들의 공헌을 기억하고 현재와 미래의 세대들이 독립정신을 잊지 않도록 하는 ‘기억의 정치’이다. 국가의 독립은 반드시 주권으로서의 자유가 동반돼야 한다. 코민테른을 통해 헤게모니 국가에 종속되는 국가는 자유가 없었고 따라서 주권도 없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운동은 독립운동이 아니었다. 그동안 국가보훈부가 선정한 450여 ‘이달의 독립운동가’의 이념적 성향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결과는 대한민국 국민을 놀라게 할 게 분명하다.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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