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의 시대 구분

중국사

보내기 폰트 크기 설정

역사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시대 구분이다. 왜냐 하면 오랜 역사를 무 자르듯 자를 수 없지만,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나누어 보면 전체를 이해하는 데 훨씬 쉽기 때문이다.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주장도 다양하다.

중국에서는 역성 혁명(易姓革命)에 의하여 왕조의 흥망성쇠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일찍이 왕조에 의하여 역사를 서술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국의 정사(正史)인 24사이다. 사마천(司馬遷)에 의하여 쓰인 『사기(史記)』의 경우는 고대부터 사마천의 생존 시기인 한 무제(武帝) 때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통사적인 서술이 되었으나, 이후 『한서(漢書)』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처럼 어느 특정 왕조 또는 시대만을 기술한 단대사적인 서술을 하였다.

따라서, 중국사의 경우 제일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왕조에 의한 시대 구분이다. 그러나 역대 중국의 많은 왕조를 그대로 모두 나열할 수 없기 때문에 전후 특징적 관계를 기준으로 이를 몇 왕조씩 묶어 놓았다. 예를 들면 선진사(先秦史), 진한사(秦漢史), 위·진·남북조사(魏晉南北朝史), 수·당 오대사(隋唐五代史), 송사(宋史), 요·금·원사(遼金元史), 명·청사(明淸史), 중국 근·현대사(中國近現代史) 등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분류를 '왕조사에 의한 시대 구분'이라고 한다.

중국사의 시기 구분과 역대 왕조의 변천
3분법

중국 고대사

4분법

중국 고대사

왕조사

선진사

단대사

삼황 오제

하(夏)

상(商)-은(殷)

주(周)

서주(西周)

동주(東周)

춘추(春秋)

전국(戰國)

멸망 연대

 

 

B.C. 1046

B.C. 771

 

B.C. 221

3분법

중국 고대사

4분법

중국 고대사

중국 중세사

왕조사

진한

위·진·남북조사

단대사

진(秦)

한(韓)

삼국(三國)

진(晉)

서한(西漢)

동한(東漢)

위(魏)

서진(西晉)

동진(東晉)

촉한(蜀漢)

오(吳)

멸망 연대

B.C. 206

8

220

265/263/280

316

420

3분법

중국 고대사

4분법

중국 중세사

왕조사

위·진·남북조사

단대사

남북조

북조

남조

북위(北魏)

동위(東魏)

북제(北齊)

송(宋)

제(齊)

양(梁)

진(陣)

 

서위(西魏)

북주(北周)

 

 

 

 

멸망 연대

535

550/557

577/581

479

502

557

589

3분법

중국 고대사

중국 중세사

4분법

중국 중세사

왕조사

수·당 오대사

단대사

수(隋)

당(唐)

오대(五代)

후양(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

 

 

 

 

 

멸망 연대

618

907

923

936

946

951

960

3분법

중국 중세사

4분법

중국 근세사

왕조사

송·요·금·원사

명·청사

단대사

송(宋)

 

원(元)

명(明)

청(淸)

요(遼)

금(金)

북송(北宋)

남송(南宋)

멸망 연대

1125/1127

1233/1279

1369

1644

1840

3분법

중국 근대사

4분법

중국 최근세

왕조사

현대

단대사

청(淸)

중화민국(中華民國)

중화 인민 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대만

멸망 연대

1912

1949

 

그런데 서양에서는 분기법, 즉 고대, 중세, 근대와 같이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일본 학자들이 중국사를 시대 구분한 것이 이른바 '3분기법'과 '4분기법'이다. 3분기법의 경우 세 가지 주장이 있는데, 하나는 고대(전국 말까지)·중세(진한~명 말)·근대(청대 이후)로, 그 기준은 중국 황제 제도의 성립과 그 발전을 중심으로 보아 그 준비기를 고대, 발전 유지된 중세, 청대 이후는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근대로 구분하였다. 이 구분법은 1950년대 동경의 신진 젊은 학자들의 의견을 대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의 문제점은 중세가 지나치게 길게 잡혀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후한 때까지를 고대, 오대 시대까지를 중세(또는 중고 시대), 송대 이후를 근세로 보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서양의 고대가 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본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사에 있어서 진한 시대가 바로 중국의 고대 통일 제국이기 때문이었으며, 삼국 시대부터 오대까지의 특징을 귀족 사회로 보고, 송대 이후는 귀족 문화의 몰락과 서민 사회를 배경으로 황제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에 특징을 두고 있다.

또다른 하나는 당 말까지의 고대, 명 말까지의 중세, 그 이후를 근대로 보고 있다. 이 의견은 역사학 연구회가 채택하고 있는 구분법으로, 사회·경제사를 바탕으로 보는 유물사관적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이 의견에 따르면 당 말까지 노예 제도가 행해지고, 송대부터 대토지 소유제가 행해졌다고 보고 있다. 특히, 유물사관에 의한 시기 구분은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일본의 젊은 연구자들을 고무시켜 유행된 방법이며, 동경 대학을 중심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동대파(東大派)'라고 부른다.

4분법의 경우는 처음 3분법이 제기되었을 때 전국 시대까지를 상고, 당 말까지를 중고, 명대까지를 근고, 청대 이후를 근세로 보았다. 그러나 3분법의 두 번째 시기 구분을 정리하여 고대 제국의 성립인 한대까지를 고대, 당 말까지를 귀족 사회로 보고 중세, 오대·송대 이후 청대의 아편 전쟁 이전을 독재 군주 체제로 보아 근세로 보았으며, 여기에 아편 전쟁 이후 서양의 침략과 중국의 근대화 과정을 최근세사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구분 방법은 주로 경도 대학을 중심으로 채택되어 4분법을 '경대파(京大派)'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도 분기법에 의한 시대 구분이 도입되었는데, 제일 처음 제기한 사람은 1901년의 양계초(梁啓超)였다. 그는 원고(전국 시대까지), 근고세(건륭 말년), 근대세(건륭 말년 이후)의 3분법으로 설명하였다. 이후 고대(전국 말), 중세(당대까지), 근대 초기(명대까지), 근대(청대)로 하거나 상세, 중세, 근세, 현세로 구분하는 학자도 있다.

1910년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전파되고,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 운동이 전개되면서 1930년대에 유물사관에 의한 시대 구분 논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유물사관에 의한 시대 구분은 노예 사회, 봉건 사회, 자본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로 나누는데, 중국에서 어느 시대까지가 노예 사회이고, 언제부터 봉건 사회이며, 자본주의 사회가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는지가 쟁점이었다. 특히,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된 다음에도 시대 구분 문제는 역사 연구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였다.

참고로, 중국 고등 학교 교과서에서 채택하고 있는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의 경계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로 되어 있으며, 아편 전쟁 이후, 즉 근대는 반봉건·반식민지 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봉건 사회의 시기가 너무 길기 때문에 이를 네 시기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는 진한 시기로, 그 특징을 중원 지역에서 봉건 사회의 성장 시기로 보고 있다.

두 번째는 삼국 양진 남북조와 수·당 시기로, 그 특징을 봉건 사회의 발전 시기로 보고 있다. 즉, 오랜 기간 민족 간의 투쟁과 대규모 민족의 유동과 이주로 원래의 봉건화를 더욱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오대 이후 원 말까지로, 특징을 중국 봉건 사회의 진일보한 발전 시기라고 한다. 즉, 5대 10국에 이어 요·서하·금과 송의 북송·남송 그리고 원의 중국 통일로 동북에서 서북, 다시 서남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이 기본적으로 중국 봉건 사회에 편입되었으며, 한족과 각 민족 사이에 또 한 차례 새로운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남 경제가 북방 경제를 능가하게 되었으며, 장강 중·하류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네 번째는 명대에서 아편 전쟁 전까지이다. 이는 중국 봉건 사회가 쇠퇴하는 시기로 지주와 소작인의 의부 관계가 전 시대보다 비교적 약했기 때문이다. 즉, 전호도 지주를 선택할 수 있었고 지주의 불법적인 사역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특히, 인구세가 토지세에 편입되어 토지가 없으면 인구세를 부담하지 않아도 되었다.

1950년대에 중국은 사회주의로 사상을 개조한 다음, 마르크스와 모택동의 사상을 근간으로 역사를 연구하도록 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대 구분에 관한 문제였다. 따라서, 중국 고대사의 시기 구분과 중국 근대사의 시기 구분에 관한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중세'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고대사의 경우 아편 전쟁 이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를 고대로 보고 있다.

한편, 1840년 아편 전쟁 이후를 근대사로 보고 있으며, 이 시기의 특징은 서양 세력의 진출과 그 세력의 확장으로 인하여 중국 사회가 서양 세력에 의하여 반식민지화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물론 중국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른바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구중국의 몰락 과정으로 보고 있다. 그 때문에 반봉건·반식민지 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아편 전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는 여러 차례 큰 변화가 나타났다. 크게는 청조의 멸망을 초래한 신해혁명과 오늘날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가져온 중국 공산당의 공산주의 운동이 있다. 때문에 어느 시기까지가 근대사이고 현대사인지의 문제를 둘러싸고 두 가지 의견이 있게 되었다.

하나는 청조가 타도되는 1911년의 신해혁명을 중심으로 중화민국 수립 이전까지를, 다른 하나는 1919년의 5·4운동을 계기로 나타난 정치·사회 운동을 배경으로 성립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혁명을 중시하여 5·4운동 이전까지를 근대로 보고 있다. 특히, 후자의 입장에서는 신해혁명을 자산 계급 혁명 또는 구 민주주의 혁명이라 부르고, 자신들의 것을 프롤레타리아 혁명 또는 신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여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전자의 의견에 따르면 중화민국사가 현대사의 시작이고, 후자의 의견에 따르면 5·4운동 이후가 현대사의 시작이다.

이처럼 현대사의 시작에 두 가지 의견이 있는 반면에, 끝나는 시기에 대하여도 의견이 분분하다. 광범위하게 오늘날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립 이전까지를 현대사로 하고, 이후는 당대사로 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후자의 것을 택한다면 이를 각각 나누어 중화민국사와 중화 인민 공화국사로 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중화민국사의 시작이 1912년이기 때문에 1919년부터 보려는 견해와 상충되기도 한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에 중화 인민 공화국사라는 용어가 많이 등장하면서 근대사의 범위가 밑으로 내려와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 이전까지로 하고, 그 이후를 중화 인민 공화국사로 하자는 의견이 보편화되고 있다.

출처

출처 도움말
확장영역 접기

<세계 각국사 시리즈> 중국사 상권. 이 책은 중국 문명의 발생에서부터 북방 민족이 중국화되어 오늘날 중국 ...더보기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