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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포연제(2)2023.08.13.

  생각지도 못하게 칼로스에게 설명을 들은 덕분에 아이레네는 포연식과 포연제가 어떤 건지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가령 포연식은 1년에 단 한 번, 11월 중 가장 달이 밝은 밤에 한다던가. 포연식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은 대륙을 통틀어 칼로스 밖에 없다는 것 등등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칼로스는 마수를 길들이는 방법이나 인간을 주인으로 각인시키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지만, 해지하는 방법은 선뜻 알려주었다.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돼.”

  그 방법은 다소 끔찍했지만.

“그나마 마수 쪽이 죽으면 상관없지만, 인간 쪽이 먼저 죽으면 골치가 아파져. 각인에서 풀려난 마수는 백에 아흔아홉은 폭주하거든.”

  그런 마수들을 처리하는 것도 에스페르 가문의 일이라고 했다. 이래서 에스페르 가문이 마물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소문이 난 걸까? 아이레네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칼로스를 흘끗, 곁눈질했다. 커다란 마차 안에는 아이레네와 칼로스, 두 사람밖에 없었다. 본래 제르딘도 함께 탈 예정이었으나, 그는 다른 볼일이 있다면서 나중에 보자고 먼저 떠났다. 칼로스는 무심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왜 자꾸 보는 거지?”

그래서 안심하고 계속 훔쳐본 건데, 어떻게 내가 보는 걸 안 거지. 아이레네는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칼로스가 아이레네를 돌아봤다.

“난 할 말이 있는데.”

쭈뼛거리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이레네는 두 손을 꼭 마주 쥐며 공손히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우선 어떤 경우라도 내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라.”

당연한 요구였다. 아이레네가 그러겠다고 대답하기 전에 칼로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나가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전부 무시해라. 개소리니까.”

누가 나한테 어떤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거지?

“그러……겠습니다.”

온통 의문투성이인 명령에 의아했지만, 아이레네는 일단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와 떨어지게 되더라도 절대 그곳에서 움직이지 마.”

칼로스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반드시 데리러 갈 테니까.”

아이레네를 담은 보라색 눈동자에 확고한 의지가 보였다.

“너는 얌전히 날 기다리면 돼.”

  * 부지런히 달리던 마차가 멈춰서자 칼로스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내리지.”

그리고 아이레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단순히 에스코트해주기 위해서라는 건 알지만. 칼로스의 손을 잡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이레네는 선뜻 그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이레네가 머뭇거리자, 칼로스가 약간 인상을 썼다.

“뭐 하는 거지?”

“네? 아, 죄, 죄송합니다.”

벼락처럼 떨어진 질문에 아이레네는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심장 부위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더니,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종종 칼로스의 손을 잡을 때마다 느꼈던 기묘한 감각이었다. 소스라치게 싫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드는 데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레네는 손을 놓고 싶었으나, 칼로스가 제 손을 꽉 붙잡고 있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어서 오세요, 스승님.”

그렇게 아이레네까지 마차에서 내리자 먼저 도착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제르딘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같이 출발했는데, 늦으셨네요. 하긴 사람들 때문에 길이 조금 막혔죠?”

“넌 빨리 왔군.”

“저야 말을 타고 왔으니까요.”

칼로스와 제르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이레네의 신경은 온통 마주 잡은 손에 쏠려 있었다. 마차에서 내렸으니 이제 손을 잡을 이유는 없는데, 어째서인지 칼로스는 계속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올해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마령이 얼마 없더라고요. 아직 의식을 안 치러서 그런가?”

“마령도 어쨌거나 마물이니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어 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금지시켰다.

“아, 정말요?”

하지만 두 사람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끼어들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손만 바라보던 아이레네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제르딘의 뒤에 서 있는 다갈색 머리의 남자가 뚫어지도록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집요하게 탐색하는 시선에 아이레네는 움찔하며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었다.

“감히 누구를 의심하는 거지?”

그러자 칼로스가 남자에게 매서운 어조로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공 각하.”

“내가 아니라 그녀한테 사과해야지.”

고개 숙인 머리가 아이레네에게 향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그저 소문의 레이디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했을 뿐인데, 의도치 않게 레이디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아, 괜찮아요.”

진심이 느껴지기도 했고, 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아이레네는 선뜻 남자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칼로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 소개를 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황실 제 1기사단 소속, 레이먼 올드론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황태자 전하의 호위를 맡고 있습니다.”

“저는…….”

“됐어.”

아이레네 역시 자기소개를 하려고 했는데, 칼로스가 막았다.

“그는 이미 네가 누군지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소개할 필요 없다.”

그래도 처음 만났는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이레네는 의아했지만, 칼로스가 그렇다고 하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제르딘의 호위 기사라면 계속 그의 곁을 지켰을 텐데,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본 거지? 문득 의문이 든 아이레네는 레이먼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칼로스가 물었다.

“저 남자가 마음에 안 들면 가라고 할까?”

아이레네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런 의미로 본 게 아니라 황태자 전하의 호위 기사를 오늘 처음 본 게 의아해서…….”

“그럴 수밖에.”

제르딘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레이먼 경은 지금까지 계속 에스페르 성 밖에 있었으니까.”

“네? 어째서요?”

황태자의 호위 기사니까, 제르딘의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겠어?”

제르딘이 칼로스를 향해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스승님이 레이먼 경이 성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지. 호위 기사니까 허락해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절대 안 된다고 하더라.”

칼로스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올렸다.

“너도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말 걸 그랬군.”

언뜻 보면 기분 좋게 웃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가서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칼로스가 기분이 나쁠 때 나오는 표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제르딘은 재빨리 사과한 뒤,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모처럼 왔는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얼른 구경하러 가요. 아까 보니까 저쪽에서 음유시인이 길거리 공연을 하더라고요.”

“…….”

칼로스가 반응이 없자, 제르딘은 공략 대상을 아이레네로 바꿨다.

“아이레네, 음유시인이 노래 부르는 거 들어본 적 없지?”

“네? 아, 네.”

아이레네가 엉겁결에 대답하자, 제르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보러 가자.”

그 말에 아이레네는 여전히 제 손을 잡고 있는 칼로스의 손을 내려다봤다. 자연스럽게 제르딘의 시선이 따라왔다. 레이먼과 제시, 그리고 듀스와 듀이도 마주 잡은 손을 쳐다봤다. 시선이 집중되자 부끄러워진 아이레네가 슬쩍 손을 빼려고 했지만, 칼로스가 다시 붙잡았다. 아까보다 강하고, 촘촘하게 옭아매니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왜 이러는 거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칼로스의 행동에 아이레네는 의아해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

이상한 건 칼로스 역시 놀란 표정이라는 거였다.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자기가 잡아놓고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아이레네는 더욱 칼로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이레네는 칼로스가 알아서 제 손을 놓아주길 바랐지만, 한참이 지나도 칼로스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손 좀……놓아주시겠어요?”

결국 기다리다 지친 아이레네가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

그러자 칼로스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꼭 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손을 놓아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아이레네가 당황스러워한다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는 것도, 이런 제 모습이 바보 같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놓지 못하는 건, 놓고 싶지 않은 건,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공허하게 비어 있던 몸과 마음이 꽉 채워져서. 그게 너무 기분이 좋아서.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아서. 가능하다면 손뿐만 아니라 그녀를 통째로 집어 삼키고 싶어서. 그래서, 그래서…….

“대공……각하?”

“…….”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작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칼로스는 크게 숨을 토해내며 다른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조급해 할 필요는 없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긴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성급하게 굴었다가 그녀가 겁을 먹고 도망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가야 했다. 그러니 지금은 손을 놓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손을 놓는 순간 공허함이 밀려올 걸 알기에 놓고 싶지 않았다.

‘굳이 지금 바로 놓을 필요가 있나?’

오래 기다렸던 만큼, 그리고 앞으로 오래 기다릴 만큼 조금은 욕심을 내도 될 것 같은데.

“손은 계속 잡고 다니지.”

불쑥 치밀어 오른 욕심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입을 제멋대로 움직였다.

“네?”

이에 아이레네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칼로스는 재빨리 변명을 덧붙였다.

“대외적으로……우리는 연인 사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돌아다닐 때는 손을 잡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군.”

엉겁결에 한 말이었지만, 적당한 핑계거리인 것 같아 칼로스는 만족했다.

“게다가 여긴 사람이 많아서 한 번 떨어지면 찾기 힘들 수도 있으니까.”

혹여 아이레네가 의심을 할새라 괜찮은 핑계거리를 하나 더 붙였고.

“…….”

아이레네는 고개를 돌려 넓은 광장을 쭉 둘러봤다. 칼로스의 말대로 광장은 축제 구경을 하러 나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확실히 이런 곳에서 미아가 되는 건 위험하겠네. 사제들 앞에서 첫눈에 반해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이라고 떡하니 공개했는데, 모르는 사이인 양 떨어져 다니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테고.

“…….”

그렇다고 칼로스와 계속 손을 잡고 다니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아이레네는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칼로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레네는 꼭 잡은 손을 신경쓰느라 그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그럼 갈까.”

설마 칼로스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채. 아이레네는 칼로스와 손을 꼭 잡고 발 디딜 틈 없이 밀집된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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