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모든 중관학자들은 ≪중론≫을 통해서 중관사상을 이해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다수의 주석서들이 남아 있으며 현대의 중관학자들 또한 중관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론≫을 연구하고 있다. 각기 다른 전통을 낳았던 주석서들과 현대의 여러 역본들에 관통하고 있는 ≪중론≫ 원문에서 제일 중요한 주제는 ‘일체 무자성’이다.
사태들은 무자성이다. 왜냐하면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이 (사태들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자성인 사태(들)은 (자성을 띈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태들은 공하기 때문이다.
―제13품. 형성 작용[行]에 대한 고찰, [173. (13-3)]번 게송
바로 이 일체 무자성의 ‘0의 법칙’으로 인해 연기실상의 세계를 고정하려는 모든 형이상학적인 시도, 개념, 정의로 된 언설의 세계는 오직 가설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연기실상의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 희론의 세계는 곧 언설의 세계다. 용수는 ≪중론≫의 귀경게에서 연기를 설명하는 것은 8불로만 가능하고 그리고 이것이 곧 희론이고 자기 자신이 붓다를 경배하는 ‘희론이 적멸하여 적정한 상태에 머물 수 있는 가르침을 베풀어 준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곧 공성이고 그것을 설명한 것이 중도임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연기(緣起)인 그것
바로 그것을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것에 의지하여[緣] 시설(施設)된 것[=假名]
그 자체가 바로 중도(中道)이다.
―제24품.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고찰?, [362. (24-18)]번 게송
한역 경전권에서 ‘중도(中道)’로 통용되는 이것의 정확한 의미는 가운데 것[中], 즉 상견, 단견의 양견을 여읜 것이지만, 한번 굳어진 전통은 쉽게 바꾸지 않는 것이라 오늘날에도 중도와 중관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용수는 반야부의 공(또는 공성)의 주장을 논파를 통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중관학파의 사조답게 공성을 강조하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논박자를 맹비난한다.
그것[공성]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바로 그대는
공성(空性)의 목적과 공성(空性)과
바로 (그) 공성(空性)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그와 같이 (공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제24품.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고찰?, [351. (24-7)]번 게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