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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도망치고 싶어요.2023.07.09.

  황태자가 전부 다 알고 있을 줄이야. 가장 바라지 않았던 끔찍한 일이 현실이 되자 트로페는 깊게 절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트로페는 제르딘이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혹시 비밀로 해줄 수 있는지 등등 묻고 싶은 게 굉장히 많았지만, 칼로스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물러가라.”

“하오나 대공 각하…….”

트로페가 대꾸하려고 하자, 칼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듀스가 나타나 트로페의 목에 날카로운 검을 드리웠다. 피부에 닿는 서늘한 쇠붙이의 감촉이 소름 돋았다. 트로페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날카로운 검의 단면 위로 떨어졌다.

“저,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신전의 명성을 지키는 것보다 제 목숨이 소중했기에 트로페는 도망치듯이 집무실을 나갔다. 제르딘은 휘파람을 불며 검을 갈무리하는 듀스를 바라봤다.

“자네는 여전히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군. 자네 같은 대단한 호위 기사가 황궁에 있으면 참 든든할 것 같은데. 어때. 황궁 기사단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여기서 받는 연봉의 두 배를 주지.”

그 외 귀족 작위 등등 여러 가지 보상을 내밀며 달콤한 유혹을 했지만, 듀스는 제르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칼로스에게 공손히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제르딘은 몹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듀스의 자취를 쫓았다.

“저 남자는 여전히 스승님에게 충성을 다하는군요.”

칼로스 소파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으며 대답했다.

“그러는 너는 여전히 버릇이 없군.”

“이게 다 스승님이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죠.”

제르딘은 농담으로 받아치며 칼로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왜 혼자 계십니까? 듀이한테 듣자 하니 그분도 함께 있다고 하던데.”

제르딘이 말하는 그분은 바로 아이레네였다.

“방으로 돌아갔다.”

“정말요? 아, 어떤 분인지 보고 싶었는데, 다시 부르면 안 돼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냉담한 반응에도 제르딘은 구김살 하나 없이 싱글벙글 웃었다.

“제가 나가면 부탁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하아.”

칼로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난 분명 예의 바른 아이로 가르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버릇없이 자란 거지?”

“스승님도 황궁에서 몇 년만 지내보면 저처럼 될 겁니다. 황궁은 단순히 예의만 바르다고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니까요.”

억양과 표정에서 그간의 고통이 느껴졌다. 칼로스도 황궁이 얼마나 험악한 곳인지 잘 알고 있기에, 뭐라고 말하는 대신 하녀에게 차와 달콤한 케이크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오, 제가 좋아하는 초콜릿케이크네요.”

제르딘은 언제 심각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초콜릿을 먹었다. 그 모습만 보면 21살이 아닌 12살 같았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듯이 칼로스는 제르딘이 케이크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지? 분명 일주일 안에 도착하라고 했을 텐데.”

“어휴,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수도에서 에스페르 영지가 너무 멀더라고요.”

제르딘이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말을 이었다.

“게다가 스승님이 시키신 일을 처리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칼로스가 코웃음을 쳤다.

“고작 그 정도 처리하는 데 이리 오래 걸렸다고?”

“제가 생각보다 능력이 없어서, 생각보다 오래 걸리더라고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라든가, 너무 한다는 등 원망의 말을 할 법도 한데, 제르딘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도 스승님께서 신호만 주시면 언제든지 기사를 낼 수 있게 준비를 끝내뒀습니다.”

칼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한테도 내가 부탁한 걸 말했나?”

“그럼요. 그걸 기사로 내려면 당연히 부황 폐하께서도 이 사실을 아셔야죠.”

“황제는 어떤 반응을 보였지?”

“에헴.”

제르딘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제 부친을 흉내를 냈다.

“어허, 이런 부탁까지 한다니. 그분께서 이번에는 진심인 듯하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도록.”

피를 나눈 부자지간이라 그런가. 제르딘의 연기는 황제와 똑같았다. 황제가 어떤 표정으로 말했는지 눈에 훤히 그려진다.

“황제가 허락했다니 다행이군. 그럼 마녀재판 확인 증서를 줄 테니, 내일 조간신문에 그 일과 함께 마녀재판에서 있었던 일을 기사로 내도록 해. 그 여자가 마녀 누명을 벗은 것도 확실히 적고.”

“그 여자요?”

“무슨 문제가 있나?”

“아니요.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제르딘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듣자 하니 스승님과 그분이 제법 친해졌다고 하던데, 그 여자라고 너무 성의 없이 부르길래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칼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지?”

“뭐, 가장 기본적인 건 이름이겠죠?”

“이름도 불러.”

가끔이지만.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을 거면, 얼른 나가서 신문사에 연락이나 해. 마법 전령새는 가져왔겠지?”

태엽을 감는 새 모양의 마법 전령새는 한 쌍으로 제작하는데, 그걸 하나씩 나눠 들고 있으면 서로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가지고 오긴 했는데……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될까요?”

“뭐지?”

“기사에 그분에 대한 내용도 넣는 건 어떠세요?”

칼로스가 무슨 의미냐는 듯 쳐다보자,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자고로 기사의 생명은 신빙성이에요. 기사 내용이 자세할수록 신빙성이 올라가죠. 그러니 그분의 외모나 성격, 배경 같은 걸 자세히 서술하면 다들 기사 내용이 사실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황실 소속 신문사에서 나온 기사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빙성이 있을 텐데?”

“오히려 그래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특히 신전에선 저랑 스승님이 친한 걸 알고 있으니, 뭔가 있다고 생각하며 꼬투리를 잡으려고 할 게 분명해요.”

그건 그렇지. 칼로스 역시 그 부분을 생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꼬투리를 잡으며 싸움을 걸어온다면, 맞서 싸워주면 되는 거니까. 누구처럼 매번 어둠 속에 숨어 뒷공작을 하는 것보단 백 배, 천 배는 나았다.

“스승님과 함께 있는 인물화를 싣는 게 가장 확실할 것 같지만, 그건 너무 눈에 띌 것 같으니……자세히 서술하는 것만 하는 건 어때요?”

칼로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되도록 아이레네를 데리고 있는 걸 숨기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면 차라리 대놓고 공개하자. 그러는 편이 그놈도 쉬이 움직이지 못하고 몸을 사릴 것이다. * 칼로스와 제르딘이 이야기를 나누는 같은 시각. 아이레네는 사제를 만나고 있었다. 트로페와 함께 왔던 사제 중 한 명이었다. 집무실에서 나와 침실로 돌아가는 길에 느닷없이 나타난 사제는 할 말이 있으니 잠깐만 이야기하자며 아이레네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레네는 어떻게 뿌리치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상대의 힘이 너무 세서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면 도와달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사제가 그녀의 약점을 쥐어 잡고 협박했다.

“실라스 영지에 있는 모친의 무덤이 무사하기를 바란다면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실라스 영지의 주민들에게 아이레네는 이방인이었지만, 모친은 이웃사촌이자 가족이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모친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건 물론, 무덤도 만들어주었다. 물론 아이레네는 감옥에 갇혀 있느라 직접 가본 적이 없고, 간수들이 지나가는 말로 떠드는 걸 들은 거였다. 부친은 악마였지만, 모친은 엄마이자 친구였다. 그래서 아이레네는 모친의 무덤이 생긴 걸 진심으로 다행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있지 않으면 그 무덤을 건드리겠다고 협박하니, 아이레네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는 건 물론 복도 구석에서 사제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우선 오명을 씻은 걸 축하드립니다.”

“……오명이 아니라 누명이에요.”

아이레네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제가 바로 잘못을 인정했다.

“제가 단어 선택을 잘못했군요. 죄송합니다.”

“저한테 할 말이 뭔가요?”

마녀재판을 통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상대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이곳에서, 에스페르 대공에게서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아이레네가 움찔하자, 사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이상한 헛소리를 뱉는다.

“에스페르 대공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도망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더라면, 적어도 마녀재판을 운운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더라면 혹했을 텐데, 이미 경험한 게 있으니 믿을 수 없었다. 아이레네는 바짝 긴장하며 사제를 주시했다.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제가 모시는 주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사제가 신의 이름을 건다는 건, 제 목숨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만약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게 진심이라면,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왜……저를 도와주려는 거죠?”

사제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며 경건하게 말했다.

“그저 만인을 사랑하는 신의 충실한 종으로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려는 것뿐입니다.”

“아까는 절 죽이려고 했잖아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저는 반대했었습니다.”

……반대했다고? 정말인가? 아이레네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걸로 되묻자 사제가 한층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마녀재판은 무고한 생명도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재판인데다가, 당신이 마녀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으니 마녀재판 같은 건 하지 말자고 몇 번이나 형제님들에게 말했지만, 아무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사특한 마귀에게 홀린 것 같았습니다.”

마귀. 그 말에 아이레네는 절규하던 폴로를 떠올렸다. ……마귀처럼 보이지는 않던데.

“그것 때문에 계속 마음이 불편하고 신경 쓰인 터라……더욱 당신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의심이 싹 사라질 정도로 타당한 이유였다.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까지 했으니, 더욱 그가 진심은 믿을 수 있었지만.

“그러니 에스페르 대공에게서 도망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래도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 정확하게는 사제에게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거절했다. 설마 아이레네가 거절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사제는 굉장히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거 아니었습니까?”

에스페르 대공에서 그 남자로 표현이 바뀐 건가.

“도망치고 싶어요.”

“그런데 어째서…….”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아요.”

아이레네가 단호하게 제 뜻을 말하자, 사제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이해할 수가 없어.”

한순간, 평범했던 사제의 갈색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변했다,

“그새 그놈한테 마음을 준 거야? 잠깐 사이에 그 자식에게……!”

사제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아이레네의 양어깨를 휘어잡으려는 그때. 휙-. 새카만 무언가가 날아와 사제의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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