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서 20조원 몰려왔다, 日 반도체의 재부상

입력
수정2023.12.05. 오후 3:48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한국·대만의 지정학적 약점과 글로벌 공급망 위기 틈타 도약… 삼성·TSMC·마이크론 모두 유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이 재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일본에 생산 라인과 연구소를 신·증설하고, 일본 정부는 막대한 보조금 지원으로 화답하고 있다. 과거 미·일 반도체 갈등이 한국과 대만 반도체 산업 부흥으로 이어진 것처럼, 미·중 갈등으로 심화된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다시 일본이 전 세계 반도체 허브로 도약하는 기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19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막한 주요 7국(G7) 정상회의가 일본 정부의 외교적 존재감뿐 아니라 경제적 성과까지 과시하는 장이 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래픽=김현국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19일 “2021년 일본 정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에 주력한 이후 관련 기업들이 발표한 일본 투자액이 총 2조엔(약 19조2700억원)을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대만 TSMC가 구마모토현과 이바라키현에 반도체 생산과 개발 거점을 짓고 있고, 미국 마이크론은 향후 수년간 최대 5000억엔을 투자해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하겠다고 했다. 삼성전자와 미국 인텔,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 등도 일본 내 시설 투자와 인력 채용 계획을 앞다퉈 발표했다.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주자들이 모두 일본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닛케이는 “2030년이면 일본 내 반도체 관련 매출이 현재의 3배인 15조엔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해외 기업 유치에 그치지 않고 2027년까지 첨단 반도체 제조에도 직접 나서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잃어버린 30년을 되찾는 일본의 야심에는 지정학적 이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만은 끊임없는 중국의 위협을 받고 있고, 한국은 중국과 거리가 가까운 데다 반도체 기업들의 핵심 생산 시설 상당수가 중국에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이 중국의 기술 및 군사력 확대 위협에 맞서 동맹국 간 긴밀한 연대를 촉구하고, 대만 TSMC가 생산하는 칩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공급망과 국가 안보라는 두 가지 토끼를 잡으려는 미국의 경제 질서 재편에 일본이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 육성 성과는 철저히 계산된 정책의 산물이다. 일본은 2019년 미국 정부의 중국 화웨이 제재로 시작된 미·중 무역 갈등을 자국 산업 부흥의 기회로 삼았다. 지정학적 이점과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앞세워 외교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반도체 산업 생태계 부활도 시도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2021년 6월 일본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반도체·디지털 산업 전략’이다. 당시 일본은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터, 자율주행차, 로봇 등 차세대 신기술의 등장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반도체 산업의 미래 패권을 거머쥐기 위해 3단계 전략을 수립했다. 먼저 일본 내 반도체 생산 기반을 강화하고 차세대 반도체 설계 기술을 확보한 뒤 반도체를 활용한 양자컴퓨터 같은 미래 산업을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채 2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이 계획은 기대 이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반도체 파운드리(TSMC), D램(마이크론), 후공정·패키징(TSMC·삼성전자·인텔) 등 반도체 각 분야 최고의 기업을 모두 유치했다. 일본 기업이 이미 생산하고 있는 낸드플래시(키옥시아)와 자동차용 반도체(르네사스)까지 포함하면 모든 종류의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보했다.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는 “동아시아에서 일본만큼 다양하고 폭넓은 반도체 생산이 가능한 나라는 없다”면서 “대만 TSMC가 지정학적 위기에 빠지거나, 한국 기업들의 중국 반도체 공장이 제 역할을 못 하게 되면 일본이 가장 유력한 대체지라는 이미지를 확보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반도체 산업 고객의 수요를 곧바로 시험할 수 있는 일본은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 최고의 테스트베드다. 소니, 닌텐도, 도시바, 교세라 같은 IT 기기 업체들과 NTT도코모, 소프트뱅크 같은 통신 업체들이 건재한 데다 최근 반도체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자동차 대기업도 즐비하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반도체 산업은 수요처의 요구에 맞춰 기능이 특화된 제품이 늘어나는 추세”라며 “대형 고객사가 몰려 있는 일본에 거점을 두는 것이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반도체 장비 시장 점유율이 35%로 미국(40%)에 이은 세계 2위이고, 반도체 소재는 55%로 1위이다. 중국 반도체 굴기가 실패한 이유도 일본과 네덜란드가 미국의 대중 제재에 동참하면서 최신 장비 반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이 한국과 대만을 대체할 반도체 강국이 되기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 전자정보기술산업협회는 15일 경제산업성에 “미국·한국·대만에 비해 일본 전력 비용이 지나치게 높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대형 반도체 라인 하나를 기준으로 일본이 연간 200억엔(약 1920억원)의 전기료가 더 든다는 것이다. 오랜 반도체 산업 침체로 인력이 부족한 점도 문제로 꼽힌다. 반도체 라인 한 곳 운영에만 1500~3000명의 전문 인력이 필요한데, 이 인력은 단시일 내에 육성이 힘들다.

일본 반도체 육성 정책의 핵심 기업 라피더스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지난해 8월 도요타·소니·키옥시아 등 일본 대표 기업 8곳이 출자해 만든 라피더스는 2027년 세계 최고 수준인 2nm(1nm=10억분의 1m) 공정으로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이 목표이다. IBM 같은 미국 기업들도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밝히고 있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인력이나 제조 노하우가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라피더스와 같은 ‘프로젝트 기업’은 뚜렷한 리더십이 없어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다.

기자 프로필

조선일보 테크취재팀장. "항상 사람을 취재하고자 합니다" 책 <소통하는 문화권력 TW세대> <와!일본, 응집하는 일본인의 의식구조 해부>, 번역서 <손에 잡히는 유비쿼터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IT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