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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추워2023.07.30.

  아이레네는 점심을 먹은 게 얹히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다.

“아직 속이 조금 불편하네요.”

한데도 제시한테 이렇게 말한 건, 칼로스와 함께 저녁을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정말로 얹힐 것 같았으니까.

“저런. 어제 의원이 지어준 소화제를 가져다드릴까요?”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고, 조금 쉬다 보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럼 산책하러 가실래요? 소화가 안 될 때는 가만히 있는 것보단 걷는 게 좋다고 하던데.”

“아니요.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 그냥 방에서 쉴래요.”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걷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지만, 그것보다 칼로스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더 컸다. 읽고 싶은 책이 있기도 했고.

“그럼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제시가 나가고 혼자 남은 아이레네는 소파에 앉아 마법 책을 펼쳤다. 초반 내용은 도서관에서 읽었지만, 말 그대로 글자를 읽기만 한 거라 처음부터 다시 정독했다. 저녁도 간단하게 해결하는 등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는 데 썼지만, 진도는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끙, 역시 어렵네.”

책의 내용이 어려운 것도 있지만,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그나마 초반부는 단어를 몰라도 얼추 유추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유추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내일 도서관에 가서 사전 찾아봐야겠다.”

마법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까지 해서 공부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왕 읽기 시작한 거 끝까지 읽고 싶었다. 아이레네는 바로 사전을 찾아볼 수 있게 모르는 단어들을 노트에 정리해두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투툭, 툭-. 이만 잠자리에 들고자 노트을 덮고 일어선 아이레네는 무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비 오네.”

어찌나 세차게 쏟아지는지, 온 세상이 축축하게 젖을 것만 같았다. 아이레네는 비가 오는 날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비가 오면 사냥을 못 하니 부친이 하루종일 집에 있었으니까. 대신 그녀와 모친을 짐승처럼 대하며 폭력과 폭언을 행사했으니, 비가 오는 걸 좋아할 리가 없었다.

“나쁘지 않네.”

그랬는데 지금은 비가 오는 게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름대로 운치가 있기도 했고. 비가 오는 날이 이렇게 아름다운 거였구나.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 생경했다. 아이레네는 좀 더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 창문을 활짝 열고 손을 뻗었다. 세찬 빗줄기가 곱게 뻗은 섬섬옥수 위로 떨어졌다.

“차가워.”

그러나 기분 좋은 차가움이었다. 아이레네는 옷소매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줄도 모르고 한참 동안 창밖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떨어진다.”

“……!”

등 뒤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긴 팔이 뻗어 나오자, 아이레네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가, 각하.”

그가 왜 내 침실에 있는 거지. 아이레네는 칼로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은 마음에 몸을 최대한 뒤로 뺐지만, 바로 뒤가 창문인지라 얼마 도망가지 못했다. 칼로스가 창문을 닫자, 방안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던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창틀에 반쯤 걸터앉아 있던 아이레네는 서늘한 손이 제 뺨에 닿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뺨이 차군.”

평소보다 얼굴이 창백하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칼로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그녀의 뺨에 대고 있던 손을 뗐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지?”

“…….”

정확한 시간을 모르기도 하고, 그가 무서워 아이레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옷도 젖었군.”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을 꽉 마주 쥐었는데, 그 탓에 옷소매가 젖은 것까지 들키고 말았다. 얼굴이 차가운 것도 그렇고, 옷소매가 잔뜩 젖은 걸 봐서 상당히 오랫동안 창문을 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순찰을 나서기 전부터 그녀는 창문 앞에 서 있었으니까. 칼로스가 아이레네를 발견한 건, 순찰하기 위해 성을 나섰을 때였다. 오늘처럼 날이 흐리고 비가 잔뜩 오는 날에는 인간계와 지하 세계의 경계가 흐트러지면서 ‘아뷔소스’라고 불리는 연결 통로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보통 아뷔소스는 손바닥보다 작아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가끔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커지는 경우가 있는 터라 칼로스는 그런 게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순찰을 나온 것이다. 아뷔소스를 없앨 수 있는 자는 지하의 군주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성을 나선 칼로스는 아뷔소스를 찾고자 주변을 둘러보다가 창문 앞에 서 있는 아이레네를 발견했다. 그때는 창문이 닫혀 있어서 그냥 한 번 보고 넘어갔는데, 성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보니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이레네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자세로 열린 창문 앞에 서 있었고. 혹 저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칼로스는 단걸음에 그녀를 찾아온 거였다. 그런데 다른 문제도 있을 줄이야. 칼로스는 한숨을 내쉬며 아이레네를 내려다봤다. 이러다 감기라도 걸려서 크게 앓으면 어쩌려고, 그랬던 거지? 새 모이만큼 먹은 것도 소화를 못 시킬 정도로 몸도 약하면서. 칼로스는 아이레네에게 따끔하게 말해주려다 두려움이 짙게 서린 황금색 눈동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점심때, 제르딘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레네의 마음을 열고 싶으면 그나 부하들에게 하는 것보다 더 다정하게 대해주라던 그 말. 여기서 뭘 얼마나 더 다정하게 대해주라는 건지. 칼로스는 짧은 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 모습이 모친을 때리기 전의 부친과 비슷해서 아이레네는 질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아이레네가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모르는 칼로스는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돌아섰다.

“늦었으니, 이만 자도록.”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아이레네가 겁을 먹을 것 같아 마무리 인사만 하고 침실을 나갔다. 탕, 문이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빗소리와 하모니처럼 어우러져 어둠이 내린 침실에 울려 퍼졌다. 칼로스가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아이레네는 문득 소름이 돋아 양팔을 끌어안았다.

 

“……추워.”

차가운 공기를 오래 쐬고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칼로스를 만났기 때문일까. 아이레네는 후자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따뜻한 곳을 찾아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

“콜록.”

아침 식사를 하던 와중, 아이레네가 기침을 하자 제시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괜찮아요.”

사실 괜찮지 않았다. 어제 옷소매가 젖을 정도로 차가운 비와 공기를 오래 맞고 있었던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목이 약간 따끔거렸다.

“조금 추워서 그런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된 건 전부 제 잘못이기도 하고, 아프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아이레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긴 새벽에 비가 오는 바람에 날이 많이 추워지긴 했죠.”

제시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말고, 방에서 쉬시겠어요? 혹시 나갔다가 감기라도 걸리시면 큰일이잖아요.”

아이레네는 잠시 고민하다가, 슬쩍 물었다.

“도서관에 가는 것도 안 될까요?”

“어휴, 안 되긴요. 당연히 되죠.”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도서관은 따뜻하지만 복도는 추우니, 두툼한 외투를 걸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시가 가지고 온 건 새하얀 여우 털이 달린 망토였다. 지금 입기엔 조금 이른 것 같았지만, 제시가 원하니 아이레네는 기꺼이 망토를 걸쳤다. 그리고 어제 미리 작성해두었던 노트와 책을 들고 침실을 나섰다. 비에 흠뻑 젖은 아침 공기를 머금은 복도는 서늘했지만, 망토 덕분에 조금도 춥지 않았다. 입기 잘했네. 조금 걸리적거리긴 하지만 감기에 걸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아이레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바꿨다.

“뭐야. 겨울 토끼가 걸어오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네.”

도서관에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제르딘이 몹시 신기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으니까. 칼로스와 달리 제르딘은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지만,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부담스럽기도 했고.

“좋은 아침이야, 아이레네.”

봐. 또 부담스럽게 행동하잖아. 전혀 친분이 없는 사람이 제 이름을 부르며 친한 척 할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아이레네는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럴 땐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는 거야.”

웃는 것까지는 힘들어도 인사를 받아주는 건 할 수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황태자 전하.”

아이레네는 예전에 봤던 예절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드레스 자락을 잡고 어설프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이 마치 막 날갯짓을 시작한 아기새 같아서 귀여웠다.

“귀엽네.”

제르딘은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지만, 애석하게도 아이레네는 그가 어설픈 제 모습을 놀린다고 생각하며 볼을 붉혔다. 역시 그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어디 가는 거야? 산책?”

아이레네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황태자의 질문을 무시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도서관에…… 가는 중이었습니다.”

“도서관?”

제르딘은 아이레네가 보물처럼 품에 안고 있는 책과 노트를 쳐다봤다. 다행히 노트로 가리고 있어서 책의 제목이 보이지 않았다.

“그거 기초 마법 책이지?”

들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제르딘이 바로 알아보자 아이레네는 흠칫, 놀라며 책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제르딘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 마법 책을 보는 걸 들키면 안 되는 거야?”

그러게. 나는 왜 이렇게 마법 책을 보는 걸 숨기려고 하는 거지. 어제부터 들었던 의문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여전히 이유를 찾지 못해 더욱 의아했다.

“거참. 마법사가 마법 책을 보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놀라는 건지.”

응? 지금 뭐라고…….

“제가 마법사인가요?”

“응? 몰랐어?”

아이레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르딘이 당혹스러워하며 그의 뒤에 서 있는 제시를 바라봤다. 제시는 제르딘이 마법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머리를 짚고 있었다. 누가 봐도 곤란해 보이는 표정에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제르딘의 얼굴이 약간 흙빛이 되었다. 그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제시에게 말했다.

“이것 참, 미리 말하지 그랬어. 나는 지금까지 온 여자들이 전부 마법사였다길래, 당연히 이 애도 마법사인 줄 알았지.”

“전하께서 말할 틈을 주셨어야죠.”

제시가 볼멘소리로 대답하자, 제르딘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 대화에서 완벽하게 소외된 아이레네는 어리둥절하며 제시와 제르딘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던 제르딘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반짝이며 아이레네를 바라봤다.

“혹시 마법을 배우고 싶은 거라면, 내가 가르쳐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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