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칼럼] 영장 앞에 머리 조아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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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11.29. 오전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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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구속’ 외쳤던 이재명 ‘제 운명 달렸다’ 기각 읍소
나라 미래 걸린 총선 리더십… 과거사 법률 판단으로 결정
대선 심판받은 사법 리스크… 국민에게 재고 요청하는 건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9월 27일 새벽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며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결정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모습. 이 대표는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사실을 명징하게 증명해 주신 사법부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연합뉴스

9월 26일 오전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법원에 출석할 때만 해도 영장 발부를 각오한 분위기였다. “옥중 출마, 옥중 결재도 해야 한다”는 유시민씨 발언에 이 대표는 “좋아요”를 눌렀다. 만일 이 대표가 영장 기각을 기대했다면 “왜 재수 없는 악담을 하느냐”고 언짢았을 것이다. “감옥에 가게 될 것 같은데, 그렇더라도 대표직을 내놓지 말고 버티라”는 유씨의 말을 고마운 격려로 받아들인 것이다.

친명 지도부도 비관과 체념에 빠져 있었다. 그날 영장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민주당은 새 원내 대표를 뽑았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후보들에게 “이재명을 지키겠다고 공개 선언하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약속하고 당선된 홍익표 신임 원내대표는 “이재명 체제 아래서 총선을 치르겠다”고 했다. 정, 홍 두 사람 발언은 이 대표 구속에 따라 새 원내대표가 당을 이끌게 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영장이 기각되면 내년 총선은 당연히 이재명 체제로 치르게 되고, 원내 대표가 이 대표를 지킬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일반 국민들도 영장에 대해 같은 전망을 하고 있었다. 이 대표 체포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다음 날 발표된 갤럽 조사에서 “구속영장 청구가 정당하다”는 응답이 46%, “부당하다”는 응답이 37%로 격차가 9%p였다. 2020년 총선 당시 유권자 수 4400만명 기준으로 영장 청구가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이 부당하다는 쪽보다 396만명가량 많다는 뜻이다. 전국 단위 선거에서 한쪽 정당이 압승을 할 정도로 여론이 쏠린 경우다.

27일 새벽 2시 23분, 판사가 내놓은 결론은 ‘영장 기각’이었다. 영장 심사 결과에 대한 설명은 보통 길어야 200자 내외라고 한다. 이 대표 영장은 800자에 가까웠다. “일부 혐의가 소명되지만 방어권을 배척할 정도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이쪽 저쪽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 놓았다. 전직 대선 후보이자 야당 대표에 대한 구속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심리적 압박이 엄청났을 것이다. 이 대표는 마지막 진술 기회가 주어지자 “수사받고 있는 모든 사건에 대해 형이 선고되면 50년은 받을 것”이라며 “판사님의 결정에 제 운명이 달렸다”고 했다. 목이 멘 목소리의 읍소였다고 한다. 이 대표에게 이렇듯 공손하고 처량한 면모가 있었는지 생소하기만 하다. 6년 전 “박근혜를 감옥에 보내야 국격이 올라간다” “부인하니까 더 구속시켜야 한다”는 강성 발언으로 단박에 대선 주자로 부상했던 이재명 성남시장의 활약상이 떠오른다.

이 대표가 구속을 피하면서 민주당은 내년 총선을 이재명 체제로 치르게 됐다. 이 대표가 2선으로 후퇴하면서 비상대책위가 지휘봉을 맡게 되는 게 아닌지, 그럴 경우 비대위 대표는 친명과 비명이 타협해서 추대하는 중립적 인사인지, 아니면 이 대표의 수렴청정을 받는 꼭두각시인지 같은 불확실성이 단박에 사라졌다. 2027년 대선도 이재명의 리턴매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6개월 앞으로 다가온 총선 정국의 최대 변수였던 야당 리더십이 서울지방법원 영장 판사에 의해 선택됐다. 동전 던지기 앞·뒷면처럼 영장 발부냐 기각이냐로 정해진 것이다. 고도의 정치적 선택을, 정치가 개입되면 절대 안 되는 법률 판단에 맡긴 셈이다. 이치에 안 맞는 일이고 수치다. 집권당 대선 후보가 선거 과정에서 불거진 온갖 범법 의혹 때문에 낙선한 뒤, 감옥에 갈까 두려워 불체포 방탄조끼를 입으려고 국회의원 재보선에 출마하고 당대표까지 되다 보니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재판을 통해 유무죄가 가려지는 것을 기다리면 되는데 구속 먼저 시키겠다고 안달을 낸 검찰의 집착도 이 꼴을 만드는 데 한몫을 했다.

민주당은 비명 원내대표마저 내쫓으면서 완벽한 친명 독식 체제가 됐다. 체포동의안 표결에서 반란에 가담했던 비명 의원들에겐 피의 숙청이 기다리고 있다. 이 대표와 친명은 사법 리스크의 긴박성을 해소하는 동시에 방탄에 대한 비난도 덜게 됐다. 단기적으로 행운이 깃든 것만은 분명하다. 침울, 울분이 감돌던 기류가 의기양양, 기세등등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야권 전체 차원에서 총선 승리와 더 나아가 정권 교체에 긍정적으로 작용할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탄핵으로 정권을 내주고도 탄핵 총리를 앞세웠던 자유한국당이 4년 전 총선에서 받았던 참담한 성적표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재명 사법 리스크로 정권을 잃고 똑같은 이재명 간판으로 나서는 민주당이 국민 눈에 어떻게 비치겠나.

김창균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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