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난쟁이”…‘난쏘공’ 작가 조세희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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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2.12.25. 오후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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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코로나로 의식 잃어…향년 80
약자 아픔 향한 눈으로 불평등을 쏘다
조세희 작가(오른쪽 둘째)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발간 30돌을 맞아 2008년 11월11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책에 얽힌 추억을 회고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작가가 25일 저녁 7시께 강동경희대학교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0.

유가족인 조중협 도서출판 ‘이성과힘’ 대표는 <한겨레>에 “가족이 모두 임종을 하긴 했지만 지난 4월 코로나로 의식을 잃어 마지막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며 비통해했다.

조세희는 ‘난장이’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글을 쓰고 행동을 펼친 작가였다. 그의 대표작인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8년 출간 뒤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읽히면서 바람직한 사회를 향한 꿈과 실천에 영감과 동력을 제공해 왔다.

조세희는 1942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창과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돛대 없는 장선(葬船)’이 당선해 등단했으나 그 뒤 10년 동안 소설을 쓰지 않고 잡지 기자 등의 일로 소일했다. 1975년 난장이 연작의 첫 작품인 ‘칼날’을 발표하며 소설로 돌아온 그는 ‘뫼비우스의 띠’ ‘은강노동가족의 생계비’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등 연작 12편을 묶어 1978년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출간했다.

‘난쏘공’이라는 약칭으로 불린 이 책은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 무허가 주택에 사는 난쟁이 가족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도시 빈민의 삶과 계급 갈등을 다루었다. 화가 백영수의 동화풍 그림을 표지에 실은 이 책은 말랑말랑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한국 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뒤흔들고 폭파시킬 엄청난 파괴력을 내장하고 있었다. 엄혹하고 암울했던 유신 체제의 끝자락에 세상에 나온 이 책은 당시 여러 체제 비판적인 책들이 피하지 못한 금서의 운명을 용케도 피해 가며 숱한 독자들의 눈물과 분노를 끌어냈다. 대학가에서는 분단 문제를 다룬 최인훈 소설 <광장>과 함께 신입생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으며, 2000년대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출제되는 등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널리 읽혔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 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인간이 갖는 고통에 대해 그들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조세희 작가(왼쪽)가 지난 2006년 11월15일 서울 광화문시민열린마당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연극으로 각색하고 연출한 채윤일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난쏘공>은 1979년 채씨의 연출로 극단 세실극장 무대에 처음 올랐다가 이듬해 신군부 등장으로 곧 막을 내렸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난쏘공>의 유명한 대목들은 비인간적이며 모순에 가득 찬 현실을 아름답다고까지 할 법한 문장에 담아 전달함으로써 역설적 긴장과 미학을 빚어냈다. 스타카토 같은 단문의 연쇄로 숨 가쁘게 이어지는 문체적 특징은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의 필사 욕구를 자극했다. 소설 주인공인 난쟁이 아버지가 생전에 강조했던 ‘사랑의 강요’라는 세계관은 문학의 범위를 넘어 사회 변혁 방법론을 둘러싼 토론을 촉발하기도 했다.

1978년 6월 문학과지성사에서 초판이 나온 <난쏘공>은 1996년에 100쇄를 넘겼으며 2000년 이성과힘으로 출판사를 옮겨 속간되어 2005년12월에 200쇄를 돌파했다. 2007년 9월에는 발행 부수 100만을 넘어섰으며, 2017년에는 문학작품으로는 처음으로 300쇄를 찍었다. 대중의 기호에 영합한 상업 출판물이 100만부니 300쇄니를 넘어서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난쏘공>처럼 진지하고 심각한 문학작품이 100만부 넘게 팔리고 300쇄를 훌쩍 넘겨 계속 판을 찍는 것은 거의 선례가 없는 일이다.

<난쏘공>에 이어 조세희는 소설집 <시간여행>(1983)과 사진 산문집 <침묵의 뿌리>(1985)를 펴냈다. 1990년 무렵 장편소설 ‘하얀 저고리’를 잡지에 연재했으나 연재를 마친 뒤에도 끝내 책으로 내지는 않았다. 동학농민전쟁에서 1980년 5·18광주항쟁까지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를 통사적으로 다룬 이 소설은 <난쏘공>과는 다른 소재와 형식을 통해 <난쏘공>에 이어지는 문제의식을 담은 또 하나의 역작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조세희는 생전의 어느 인터뷰에서 “원고지로 삼천장 이상은 쓰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고 말한 바 있다. <난쏘공>이 원고지로 1200장 정도 분량이니, 그보다 분량이 좀 더 긴 ‘하얀 저고리’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하얀 저고리’를 출간하지 않은 일과 관련해 생전의 그는 “내 소설의 일차적 독자들인 동시대 사람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고 고통스럽게 토로한 바 있다. 동시대 사람들과 시대 상황에 대한 불만과 항의의 표시로 문학적 ‘침묵’을 택한 것이라고 이해할 만한 발언이다.

소설을 내지 않는 대신 그는 1997년 사회 비평지 <당대비평> 편집인을 맡아 매체를 통한 사회적 발언을 시도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카메라를 들고 노동자와 농민 등의 집회 현장을 찾아다니며 방대한 분량의 사진을 찍기도 했으나, 말년에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2000년 신판 <난쏘공>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난쏘공>의 주인공 일가만이 아니라 소설 바깥의 한국인들 모두가 자라지 못한 난쟁이라는 인식이다. 

“내가 ‘난장이’를 쓸 당시엔 30년 뒤에도 읽힐 거라곤 상상 못 했지.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래 읽힐지, 나로선 알 수 없어. 다만 확실한 건 세상이 지금 상태로 가면 깜깜하다는 거, 그래서 미래 아이들이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며 눈물지을지도 모른다는 거, 내 걱정은 그거야.” <난쏘공> 발간 30주년이었던 2008년에 <한겨레>와 만난 조세희는 이렇게 말했다. <난쏘공>의 성공이 작가이자 시민인 그 자신에게는 불행이요 슬픔일 수 있다는 아픈 고백이었다.

장례식장은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 12호실로 정해졌고, 장지는 경기 가평 선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가족으로는 최영애 여사, 아들 중협, 중헌. 발인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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