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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사과’, 문해력의 문제가 아니다(1)

2022.08.31. 오전 8:30
by 토론의 즐거움

“문해력의 문제보다는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으려는 의지가 바탕이 된 일차적인 반응” - 강남규

“‘뭣이 중한지에 대한 감각’이 산산이 찢어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 박권일

“과거 세대가 쓰던 단어를 요즘 세대가 안 쓴다고 해서 무식하다고 말할 수 있나” -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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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심심(甚深)한 사과’ 논란, 이게 이렇게까지 얘기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얘기들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일단 남규님이 ‘심심’ 사태, 도대체 무슨 일인지 간략하게 정리를 좀 해주시죠.”

강남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서브컬처 업체에 드리는 말씀인데요. 홍대에 있는 한 서브컬처 업체에서 운영 실수를 일으켜서 사과문을 발표했대요. 여기서 쓴 표현이 ‘심심한 사과 말씀을 드린다’. 저희가 듣기에는 뭐 새로운 표현은 아니죠. 근데 젊은 고객들이 운영 문제에 있어서 분노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로 트위터를 사용하는 유저들이었어요. 이 사과문을 보고서 갑자기 이 사람들이 2차 분노를 일으킨 거죠. ‘나는 바쁘다’, ‘업체는 지금 이게 심심하냐’. ‘심심하다’라는 말을 지루하다라는 말로 오해했던 거죠. 이를 지켜보던 다른 트위터 유저들이 어떻게 심심하냐는 말을 모르냐고 문제제기하고, 언론에서도 이런 일들에 대해서 특히 문해력의 문제로 보도하면서 한 주간 되게 많은 사람들이, 저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 언급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재훈 “네, ‘심심한 사과’라고 하는 한 마디 가지고만 얘기가 됐다면 그냥 한 업체에서 있었던 1~2명 유저들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사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요. 여러 번 비슷한 일들이 좀 있었죠. 어떤 비슷한 일들이 있었는지도 한 번 정리를 좀 해주시면 좋겠어요”

강남규 “최근 몇 년간 이러한 사태들이 좀 연속적으로 있었죠. 이동진 평론가가 가장 유명한 분인데 <기생충>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평론하면서 “명징하게 직조됐다”라는 말을 썼다가 왜 이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말을 쓰냐, 라고 욕을 먹었던 일이 있었고. 작년인가요? 임시공휴일이 지정돼서 연휴가 사흘이 됐다고 언론이 보도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도 4일이 아니고 3일인데 왜 사흘이냐? 왜 사흘이라고 해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냐? 라면서 언론이 욕을 먹었던 일이 있었고요. 이거는 인터넷 이슈인데요. 교수가 과제를 금일 자정까지 내라고 공지를 했어요. 근데 어떤 학생이 이걸 보고서 금요일까지 낸 거죠. 그래서 교수가 이거는 “마감 기한을 지났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하니까 “아니 금일까지 내라 그래서 금요일에 냈는데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역정을 낸 사태도 있었고요. 또 최근에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가 안철수 의원한테 “무운을 빈다”고 덕담을 건넸더니 이준석의 비판자들이 “안철수한테 운이 없기를 빈다”는 거냐 하면서 “왜 이렇게 또 비꼬냐”라고 화를 내는 일이 있었죠.

이재훈 “그거는 근데 비꼰 의미도 있지 않았나요”

강남규 “맞는 것 같습니다. (웃음)”

이재훈 “이준석이 원체 안철수를 싫어하기 때문에 비꼰 의미가 맞는 것 같기는 합니다마는, 저는 그래도 앞에 있었던 여러 일들을 봤을 때 우리가 이런 게 단순히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 이게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그런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면 어떨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 오늘 토즐에서 다뤄보려고 합니다. 우선 제일 간편하게 나오는 문제 제기가 문해율에 대한 이야기에요. 한국 사람들이 문해력이 대단히 낮다. 문해율이 세계 평균보다 떨어진다. 뭐 이런 식의 문제 제기가 많았어요.”

강남규 “우선 한국의 문맹률, 형식적인 문맹률(글을 읽거나 쓸 수 없는 상태)은 굉장히 낮지만 실질적인 문맹률이 너무 높다, 이런 비판들이 주로 언론에서 제기되고 있죠. 자주 인용되는 게 OECD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실질적 문맹률이 75%다, 이런 통계가 여기저기서 많이 보도가 됐는데, 이제 이거는 한 20년 전 데이터이고, 실질적 문맹률에 대한 거라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문항에 대한 답변이 75%였던 걸 인용한 거다, 이런 팩트체크도 있는 걸 확인했어요.

근데 좀 몇 가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은 한국교육개발원에서 2004년에 낸 자료인데요. 여기서 이제 성인의 실질적 문해율이 OECD 조사 대상국 중 최하위였다. 이때 대상국은 22개 정도였고, 이 조사가 업그레이드 된 게 2013년에 ‘국제성인역량조사’라는 게 있었는데요. 여기서는 OECD 평균 수준이다, 라고 했어요. 근데 이게 또 살펴보면, 앞에 2004년 조사는 22개 나라였고, 2013년 조사는 33개 나라였기 때문에 평균 수준이라고 해도 한 20개, 20위 정도. 그러니까 절대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수치라고 보셔도 될 것 같아요. 또 EBS에서 최근에 조사한 결과에서는 중3 학생들 중에 27%가 교과서에 쓰인 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라고도 하고요. 실제로 이런 통계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장의 교사들이나 직장의 어떤 관리 직급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어린 학생들 혹은 젊은 직원들의 문해력이 과거와 다르게 떨어지고 있다라는 거는 그분들이 실제로 답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재훈 “아니 근데 남규 님은 좀 어떻게 보세요. 남규님은 저희보다 젊은 세대이니까, 주변에 있는 또래 세대들의 어휘력이나 이런 부분들이 상대적으로 윗세대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세요?”

강남규 “제가 일단 친구가 많지 않아서”

(일동 웃음)

강남규 “주변에 다 운동권 친구들밖에 없어가지고 쓰는 어휘들이 남다르기는 합니다.”

이재훈 “비교 기준이 잘 안 되겠군요.”

강남규 “이런 소통 문제로 뭔가 당황함을 느낀 적은 사실 개인적으로는 별로 없긴 해요. 인터넷에서 말싸움 같은 걸 하거나 특히 학교에서 키배를 뜨다가 이런 상황을 몇 번 느꼈던 적은 있던 것 같아요.”

이재훈 “저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제가 같이 일하고 있는 기자들이 말과 글을 다루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도 보편적인 사람들과 비교를 하기가 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주변의 대학 후배들이나 아니면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가족들, 그 중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들을 보면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그들만의 언어를 쓰는 경우는 가끔씩 있죠. 어른 세대가 알 수 없는, 자기들끼리만 통용되는 언어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요. 사실 그런 경우는 어른들이 실질적 문맹이 되는 거잖아요. 제 경험에서는 사실 젊은 세대가 언어 자체를 완전히 이해를 못하거나 하는 경우는 잘 경험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인터넷에서 나오는 이 문해력 담론이 정말 실제 생활과 연결이 되는 건가, 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박권일 “아무래도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과대 대표되고 있는 측면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명징 직조 사태라든가 아까 남규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여러 가지 사례나 이번에 심심한 사과 같은 경우에도 사실은 오프라인에서 일어났더라면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그 현장에서 뭔가 이야기가 되어서 끝냈을 만한 일들인데, 이것이 사태가 확장되고 갈등이 악화되는 과정에서 불거진 일들이거든요. 결국 인터넷 상의 어떤 논란, 인터넷 상의 논쟁 이런 것들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이런 커뮤니케이션 오류 같은 것들이 벌어지게 되고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젊은 세대의 무식함에 대한 논란으로 확산이 되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저도 주변에서 이런 경우를 오프라인에서 직접 겪은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제 주변도 대부분 고학력자이기는 하지만, 고학력자가 아니더라도 오프라인 내에서 면 대 면 소통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보량이 굉장히 많아요. 어휘 자체의 의미값 외에도 사실은 몸짓이라든가 제스처라든가 분위기 이런 것들 때문에 사실은 오해를 하기가 더 어렵죠.

그런데 인터넷에서의 소통 같은 경우 정보량 자체가 제한되고, 그러다 보니 단어 하나 텍스트 하나를 가지고 해석을 해야 되는 경우가 많아지죠. 그러다 보면 그 어휘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경우 제대로 해석하지 못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것이고요. 그래서 이런 논란들이 최근 들어서 늘어나는 이유도 사실 세대의 문제라든가 계급의 문제라든가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진 게 아닌가 싶어요. 리터러시, 문해력이라고 번역되는 리터러시의 문제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우리가 소통하는 중심 공간이 인터넷이기 때문에 이런 논란이 더 불거지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재훈 “네, 두 가지 정도 짧게 정리를 하자면, 하나는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소통을 할 때는 물론 아까 권일님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다양한 몸짓이나 여러가지 부수적 표현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때문에 단순히 그냥 문자로만 소통을 하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하고 다른 성격도 있죠. 게다가 오프라인에서 만났을 때는 서로 모르는 단어를 쓰더라도 그걸 당장 “어떤 의미예요”라고 직접적으로 잘 묻지 않잖아요. 서로 약간 민망하니까. 또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거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되레 익명의 온라인 공간에서 이런 일들이 더 솔직하게 일어나는 현상도 저는 일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게 약간 과대 대표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고요. 또 다른 측면에서는 우리가 쓰는 언어라는 게 세대가 바뀔수록 언어 역시 계속 바뀌잖아요. 우리가 몇십년 전에 씌어진 책이나 만들어진 영화, 드라마 같은 걸 보면 요즘에는 우리가 잘 안 쓰는 단어를 쓴다든지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자주 쓰는 단어와 자주 안 쓰는 단어라는 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당연히 세대별로 차이를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과거 세대가 쓰던 단어를 요즘 세대가 안 쓴다고 해서 젊은 세대를 두고 무식하다고 말하면서 옛날보다 책을 덜 읽어서 혹은 한자 공부를 덜 해서 그렇다고 설명하는 것 자체가 맞는 건가, 라는 의문이 기본적으로 들어요.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문해력과 문해율의 문제로 보는 것이 과연 정확한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남규 “저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데요. 결국 앞에서 인터넷 공간과 오프라인 공간 얘기도 했지만, 오프라인에서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어쨌든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고 또 최소한의 관계를 쌓아온 사람들인 경우들이 많잖아요. 그런 경우들에서는 사실 말에서 오해가 생기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나 다른 동료가 굉장히 근엄한 표정으로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고 하면은 이 사람이 표정으로 봤을 때 그 심심하다라는 말을 지루하다라는 말로 쓴다라고는 믿지 않을 거거든요. 사람의 표정에 진심이 같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근데 온라인처럼 그런 것들이 차단되어 있고 오로지 텍스트만 존재하는 상황에서 심심한 사과라고 했을 때는 다르죠. 물론 저는 업체들이 혹은 정치인들이 심심한 사과라는 말을 쓰는 걸 많이 봤기 때문에 이게 어떤 지루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게 아니라는 거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어떤 업체에 대해서 이미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어떤 선해 혹은 선의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나를 엿먹이려고 하는구나라는 편견이 먼저 작동을 한다는 거죠. 그렇게 봤을 때 이건 문해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으려는 의지 혹은 이 사람에 대한 무너진 신뢰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서 나오는 일차적인 반응들이지 않은가, 그런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재훈 “그래서 우리가 이 문해력 문제라고 하는 걸 좀 넘어서서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게 계속 반복해서 벌어지는 사건이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우리가 이 현상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저는 불필요하다고 보지는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제 이 자리를 통해서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고 하는 거고요. 먼저 남규님께서 <경향신문>에 칼럼

을 쓰셨는데, 이게 기본적으로 신뢰를 상실한 사회의 어떤 단면을 보여준다는 지적을 하셨어요. 그 얘기가 어떤 건지 말씀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강남규 “아까 앞서 문해력 논란의 전당에 올라와 있는 단어들과 함께 살펴보면요. 명징하게 직조됐다라는 표현을 썼을 때는 그 말을 쓴 사람이 인텔리 평론가였다는 점이 좀 중요할 것 같아요. 인텔리 평론가와 대중의 어떤 대립 구도 속에서 그런 반응들이 작동했다고 저는 보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어려운 말을 쓰는 평론가, 괜히 영화를 어렵게 꼬아보는 평론가가 명징하게 직조됐다라는 내가 모르는 말을 썼을 때 이 사람이 또 대중들을 뭔가 무시하고 자기들만 아는 언어로 소통하려고 하는구나, 라는 편견이 일차적으로 작용을 했다고 저는 판단이 되고요. 사흘 논란도 비슷하게 보는데요. 연휴가 4일인 줄 알고 너무 기뻐하고 있었는데 그게 알고 보니까 3일이었다라는 데서 오는 박탈감, 이게 1차적으로 작동을 했다고 보고 있고요. 금일도 그 과제를 결국 마감 시간까지 내지 못한 학생이 반응을 보였던 거잖아요. 자기가 과제를 내지 못한 데에 대한 어떤 억울함 혹은 교수에 대한 분노 이게 또 하나 작동을 했었던 거라고 볼 수 있죠. 마찬가지로 이준석에 대해서도 말씀을 아까 나눴지만, 그 사람이 평소에 갖고 있던 굉장히 어떤 밉상의 이미지, 항상 사람들을 비꼬려고 드는 이미지가 선입견으로 작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이 말을 긍정적이거나 혹은 중립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지는 않았겠구나, 라는 편견.

이런 일들에서 계속해서 어떤 트리거들이 작동을 했다고 보면, 이 모든 문해력과 관련한 어떤 상황들이 단순히 어떤 언어를 몰라서 작동을 했다고 보기보다는 그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한 불신 혹은 편견 혹은 선입견 이런 것들이 먼저 작동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라고 저는 판단을 했던 거죠.”

이재훈 “그러니까 상대가 가지고 있는 어떤 최소한의 선의, 이런 부분들보다는 상대의 말에는 어떤 형태로든 부정적인 의도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의도를 부정적으로 유추해서 반발하는 모습들이 드러면서 이게 사회의 신뢰 자본이 상당히 상실돼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이런 얘기를 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그리고 권일님은 이 문제를 두고 “무지에 대한 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글도 쓰시고 그러셨는데, 그 이야기는 어떤 내용인가요?”

박권일 “저는 심심 사태 이전에 이와 관련된 칼럼을 <한겨레>에 쓴 적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무운을 빈다,라는 말을 기자가 운이 없기를 빈다라고 해석한 걸 보고 충격을 받아 쓴 글이기도 한데요. 사흘, 명징하게 직조, 금일 같은 사례도 비슷하죠. 이같은 이야기들이 계속 반복되어서 나타나는 것들이 젊은 세대의 어휘력 부족이라는 단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어떤 공통 감각 같은 것들이 옅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봐요. 어떤 단어 혹은 어떤 개념이 중요하다는 공통 감각이 옅어지면서 ‘이런 단어를 우리가 굳이 알아야 돼?’라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게 됐다는 거죠. 명징, 직조라는 말을 몰라도 우리는 충분히 얘기를 할 수 있는데 왜 저렇게 잘난 척을 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난 것이고, 과거에는 모르는 어휘가 있으면 그것이 자기 교양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찾아보고 알려고 하는 욕망이 분명히 강했단 말이죠. 그것도 일종의 교양주의일텐데, 지금도 교양주의는 존재하지만 확실히 과거에 비해 그런 방식으로 덜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어휘라든가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서 줄어들었고 자기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것은 모르는 단어를 쓴 그 사람의 잘못인 거지 자기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금요일이라든가 사흘이라든가 무운 같은 말들에 대해서도 자기가 모를 서 있다고 의심하기 전에 상대방이 잘못 썼을 것이라 예단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선해라고 하잖아요. 상대방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분명히 좋은 의도를 갖고 썼을 것이라 미리 전제하는 걸 선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선해보다는 상대가 뭔가를 나에게서 빼앗거나 공격하거나 갈등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런 짓을 했다고 의도를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아요. 일종의 ‘악해’를 하는 것이죠. 그런 방식으로 갈등 중심적인 대화 그리고 논쟁 중심적인 대화가 특히 인터넷상에서 많이 오가면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좋은 의도를 갖고 있고 어떤 합의를 위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전제 자체를 호기하거나 거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징/직조 사태라든가 사흘 사태라든가 금일 사태. 그리고 이번 심심한 사과 사태를 보면서 눈여겨봤던 것은 자신의 어휘 이해가 틀렸음을 지적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였어요. 지적받았을 때 이 사람들이 ‘이거는 내가 알아야 되는 단어가 아니’라는 식으로 오히려 당당하게 자기의 무지를 당연시하는 태도를 보면서 이것이 우리 시대가 처하고 있는 어떤 인식론적인 곤경을 가리키는 사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남규님 말씀하신 것처럼 신뢰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있는데 신뢰 이전에, 신뢰보다 더 저층의 차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는 거죠. 리터러시의 문제라는 것들도 사실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어떤 단어의 뜻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그런 차원들도 있지만 더 나아가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실천 이런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닿게 되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칼럼에서도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젊은 세대들이 특정한 단어들을 모르는 문제와 완전히 일치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의 문제 의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사실은 공통 감각이 옅어지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기성세대가 계속 자기 얘기만 하면서 젊은 세대가 중요시하는 주제에 대해서 그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격하하는 그런 태도를 보입니다. 저는 어떤 토론회에 가서 선배 세대인에 속하는 기자가 젠더이슈라든지”

이재훈 “언론노조 토론회였죠”

박권일 “네, 맞습니다. 언론노조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시니어 언론인들이 젠더 문제, 기후 위기에 대해서 자꾸만 우선 순위가 아닌 문제, 별로 급하지 않은 문제, 주변적인 문제로 얘기하는 걸 봤어요. 그분들이 그 문제에 대해서 예컨대 단어를 모르는 수준으로 전혀 무지한 상태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기후라든가 젠더 이슈를 계속해서 주변화하고 뒤로 미루는 태도 자체가 사실은 명징 직조나 사흘, 무운 사태와 비슷하게 어떤 무지를 가리키는 신호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쉽게 얘기하면 ‘뭣이 중한지에 대한 감각’이 산산이 찢어지고 있는 거죠. 오늘날 우리는 각각의 취향 공동체 혹은 각각의 이념 공동체별로 끼리끼리 모이고 그 속에서만 자기들끼리 소통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집단 극화라고도 많이 얘기를 하죠. 이렇게 끼리끼리만 소통하는 문화가 강해지다 보니까 결국은 우리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어떤 공통 분모적인 문화들이 더 약해지고 있는게 아닐까 싶어요.”

이재훈 “남규님이 보시기에는 방금 권일님이 얘기한 그런 무지에 대한 태도,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고 당당하게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말한 화자에게 비판을 제기하는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난다고 보시나요?”

강남규 “그러니까 SNS에서 토론이나 키배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내가 무심코 한 실수나 잘못을 바로잡는다고 해도 상대방이 그거에 대해서 실수구나 오케이 양해하고 넘어갈게, 라고 봐주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아마 정말 드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토론의 즐거움을 시작했죠. 아무튼 그런 경험들이 많이 쌓이고 쌓여서 SNS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나 토론의 문법이라는 게 구축이 됐다는 걸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를 하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내 잘못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어차피 상대방이 나를 괄시하고 무시하고 조롱할 거라고 하면 일단은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네가 나의 어떤 의도를 왜곡한 거다, 라고 일단 우겨보는 게 전술적으로는 더 현명한 판단인 거죠. 그 전술적이라는 표현도 제가 무심코 쓴 표현 중에 하나지만, 대부분의 SNS에서 논쟁이라는 건 어떤 전술과 전략이 동반되는 일종의 전쟁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게 재밌는 혹은 되게 우려되는 측면인 것 같아요. 대부분의 대화가 그런 식으로 이뤄지는 거고”

이재훈 “권일님도 잠깐 말씀하셨지만 이런 태도가 나타나는 현상 자체가 기본적으로 능력주의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좀 생각해 봐야 될 얘기들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요.”

박권일 “능력주의 얘기하기 이전에 먼저 옛날 얘기를 좀 해야 될 것 같은데... 제가 최근에 옛날 얘기를 좀 안 한 것 같아 가지고”

(일동 웃음)

강남규 “오랜만입니다.”

이재훈 “반갑네요.”

박권일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이 사태가 저는 또 생각해 보면 갑자기 생겨난 일이 아니라 굉장히 오래된 쟁점에 닿아있기도 합니다. 이게 사실은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까지도 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일동 웃음)

박권일 “특히 리터러시와 관련해서 플라톤에 대한 이야기들이 실제로 종종 언급됩니다. 연구자들도 많이 얘기하구요. 왜냐하면 플라톤은 다이얼로그, 대화를 강조했던 철학자잖아요. 대화를 통해서 1대 1의 대면 상황에서 진리를 발견해내는 그런 사유방식을 보였죠.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현상 너머에 있는, 피안에 있는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게 플라톤의 주장이었는데요. 그 자체가 사실은 이 리터러시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요. 플라톤은 당시에 소위 말하는 소피스트들, 변론가들, 시인들을 시민을 현혹시킨다며 격렬하게 비난했던 사람이죠. 그리고 플라톤이 당시에 또 비난했던 것이 리터러시 그 자체였어요.

리터러시랑 대립되는 말이 오럴리티입니다. 리터러시는 문자 문화라는 뜻이고 문해력이나 문식성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는데 원래는 문자 문화를 가리키죠. 오럴리티는 구술문화입니다. 구술문화라는 건 뭐냐면 호메로스의 서사시 같이 구전으로 내려오는 그런 이야기들이에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그래서 오럴리티와 리터러시를 일종의 상반된 개념으로 구별하기도 하죠, 이건 좀 일면적인 해석입니다마는, 플라톤은 리터러시와 오럴리티를 대립적으로 보면서 리터러시 그니까 글자로 쓰여진 텍스트는 죽은 것이고 그것은 대화 현장에서 교정되거나 고쳐질 수 없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한계가 명확하다고 얘기합니다.

반면 다이얼로그, 즉 대화는 그때그때 저자에 의해 덧붙여지고 수정될 수 있는 거죠. 문자로 고정된 텍스트가 사람들한테 확산되었을 경우 그것이 궤변가적 해석자들에 의해 악용되기 쉽고 결국 공화국에 굉장히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플라톤은 얘기합니다. 그래서 플라톤이 가장 이상으로 삼았던 진리의 발견 방식은 대화인 거죠. 그러니까 저자 자신, 이를테면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그 사람이 질문을 하면 거기에 대해 답변을 해주고 그 사람이 그건 이 말씀이신가요라고 물어보면 아니 그게 아니고 이거라고 계속 교정을 하고 고쳐주고 쌓아나가는 방식, 그런 방식만이 진리를 발견하게 만든다라고 얘기합니다. 글로 쓰여질 경우에는 그렇게 교정될 수 없죠. 리터러시는 저자성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이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나중에 가서는 말만 앞세우는 그런 궤변가들에 의해서 공화국이 타락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거거든요.

이 이야기는 철학자인 왕, 철인왕까지 나가죠. 그래서 철인왕이 하는 얘기에 특권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결국은 그런 지적인 권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텍스트를 통해서 함부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은 전면적인 반민주주의이고 권위주의인 것이죠. 그래서 플라톤이 그렇게 얘기한 것이 소위 말하는 플라톤의 딜레마라고 불리는 상황을 야기 합니다. 플라톤은 진리의 맥락을 강조하면서 진리를 글로 적어 퍼뜨릴 경우에는 그것이 굉장히 단편적으로 또 맥락절단적으로 이해될 위험을 끊임없이 경고하거든요. 문자 텍스트가 되어버리면 완결적이고 최종적인 권위가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지적한 거죠. 일리가 있는 얘기인데 플라톤이 그렇게 경고를 하는 이유는 되게 또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 거예요. 저자가 가지고 있는 권위를 아무나인 대중, 민중이 침해해서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니까요. 그러니까 결국은 민주주의를 반대하기 위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거거든요. 플라톤이.

그게 바로 이제 플라톤의 딜레마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대화의 맥락과 충실한 의미를 강조하지만 사실은 그 의도가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에 있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리터러시를 얘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대화의 맥락을 강조하는데, 그 강조가 자칫하면 저자중심주의 전문가에 대한 지나친 권위주의, 그리고 민중에 대한 폄하 이런 것과도 금세 연결이 될 수 있다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거죠. 이중성이 있다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가 지금 리터러시 문제, 문해력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도 결국 어려운 단어를 써서 그런 거잖아요. 쉽게 안 쓰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을 왜 모르느냐 그걸 알아야 되는데 왜 모르느냐라고 자꾸만 얘기하는 순간 지적인 권위주의 전문가주의로 흘러갈 수 있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쪽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부분을 플라톤의 딜레마가 보여주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 조금 경계하기도 해야 될 것 같아요.

따라서 이 문제를 우리가 단순하 무식하고 무식하지 않고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결국은 대화의 맥락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이 플라톤의 문제의식이 사실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은 어떤 지식, 진리에 대한 맥락의 풍부화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한테 그것이 가닿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는 것이고요.

또 한편으로는 과거에 루터가 가톨릭에 반대하면서 프로테스탄티즘을 퍼뜨리는 것도 결국은 성경을 막 찍어서 텍스트로 퍼뜨렸기 때문이잖아요. 그것이 결국 지적인 민주화를 불러와서 사람들의 문해력을 폭넓게 만들어낸 측면들도 분명히 있거든요. 스웨덴 같은 경우 18세기에 이미 여성 문해력이 남성 수준으로 올라왔던 굉장히 드문 케이스예요. 스웨덴이 그렇게 여성 문해력이 높았을 수 있는 이유가 성경 때문이었거든요. 성경을 모두가 다 읽을 수 있어야 된다라는 것이 국가의 방침이었고 여성들이 남성들만큼 지적인 능력을 갖게 되었던 이유가 성경을 모두가 다 읽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그것이 20세기에 와서는 스웨덴 민주주의나 사민주의가 발전하게 된 토대가 됐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차원에서 리터러시 문제를 바라봐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2년 8월 27일 진행된 토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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