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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작명

2022.02.25. 오전 9:00
by 장유승

왕실의 작명 절차

조선 왕실의 작명은 정해진 규정에 따라 진행되었다. 왕자가 태어난다고 바로 이름을 짓는 것은 아니다. 아명을 사용하다가 세자 또는 세손 책봉이 정해지면 비로소 이름을 지었다. 차기 국왕으로 확정되어야 비로소 국왕에 걸맞는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다만 후계 구도를 서둘러 확정할 필요가 있으면 왕자의 나이가 어려도 이름을 지었다. 가장 이른 나이에 이름을 정한 인물은 영조의 손자 의소세손으로 생후 6개월 만이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실의 손이 귀해지면서 일찍 이름을 짓는 추세가 보인다.

자(字)를 일찍 짓는 것도 왕실의 특색이다. 사대부 집안에서는 15세에서 20세 사이,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자를 지었지만, 왕실의 관례는 상당히 이른 편이었다. 조선 국왕들은 대부분 10세 전후에 자를 지었다.

왕실 작명 절차는 『은대조례』, 『이원조례』 따위의 규정집에 자세하다. 세자 또는 세손 책봉이 결정되면 우선 작명을 의논할 길일을 잡는다. 정승과 2품 이상 관원이 모여 의논한다. 이때 이름을 한 글자로 지을 것인지 두 글자로 지을 것인지, 그리고 이름자의 변자(邊字, 예컨대 물 수변, 불 화변)는 무엇으로 할지 국왕에게 문의한다. 두 글자로 지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지만, 형식적으로나마 문의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원조례, 책례. 조선 국왕의 이름은 세자 또는 세손 책봉을 앞두고 지었다.

국왕이 변자를 정하면 신하들이 그에 해당하는 적당한 이름자를 물색하여 문서로 올린다. 세 글자를 후보로 올리면 국왕이 그중 하나에 낙점하는 방식이다. 국왕이 낙점하면 정승이 신하들과 의논하여 다시 국왕에게 아뢰고 이름을 확정한다.

물론 예외는 항상 있는 법, 작명이 규정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의소세손과 정조의 이름은 신하들의 논의 과정을 건너뛰고 영조가 직접 지었고, 순조의 이름 역시 정조가 독단으로 결정했다. 순조도 아들 효명세자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

철종과 고종은 세자 및 세손을 거치지 않고 갑작스레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즉위한 뒤에 비로소 절차를 거쳐 개명했다. 철종의 원래 이름은 이원범(李元範), 고종의 원래 이름은 이명복(李命福)이었으나 국왕의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았기에 각각 이변(李昪)과 이형(李㷗)으로 개명했다.

철종 정명단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철종의 이름은 즉위 후 급하게 지은 것이다.

고종 정명단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고종의 이름 역시 즉위 직후에 지었다.

조선 국왕 가운데 두 글자 이름을 가진 사람은 태종과 단종 뿐이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형 정종 이방과(李芳果)가 즉위 후 각기 단(旦)과 경(曔)으로 개명했으니 태종 이방원(李芳遠)도 개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을 듯한데, 끝내 개명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다.

단종의 이름은 이홍위(李弘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재위 시절의 이름은 외자로 위(暐)였을 가능성이 높다. 왕위에서 쫓겨난 뒤 홍(弘)을 덧붙인 듯하다. 단종과 항렬이 같은 예종의 이름이 날일 변에 속하는 황(晄)이라는 점도 이 추정을 뒷받침한다. 세자 아닌 왕자들의 이름자도 대부분 한 글자이며, 국왕 이름의 변자와 같은 변자를 사용한다. 따라서 왕실 이름자의 변자는 사실상 항렬이나 다름없다.

왕실 작명의 고려사항

왕실 작명의 우선 고려사항은 피휘(避諱)다. 국왕의 이름은 입에 올릴 수 없으므로 상용자는 사용할 수 없다. 영조는 의소세손의 이름을 정(定)으로 짓고 싶었지만 상용자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琔)으로 고쳤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글자를 골라야 하지만, 지나치게 궁벽하거나 복잡한 글자도 기피했다. 이 때문에 글자를 새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선조의 이름 연(昖)과 순조의 이름 공(玜)은 새로 만든 글자다. 국왕은 글자의 음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정조의 이름자 ‘祘’의 원래 음은 ‘산’이었는데, 1796년 ‘성’으로 음을 바꾸었다. 선조조의 명신 서성(徐渻, 1558~1631)의 자손이 번성하였기에 그의 이름과 같은 음으로 바꾸어 자손을 많이 보려는 의도였다.

중국 황제의 이름자와 같거나 비슷한 글자는 기피했다. 정조는 문효세자의 이름을 홍(日+弘)으로 정하려고 했지만 건륭제의 이름 홍력(弘曆)과 음이 같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바꾸었다. 철종의 이름은 본디 엽(曅)으로 정했지만, 강희제의 이름 현엽(玄燁)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바꾸었다.

역대 제왕의 이름자 및 음이 같은 글자도 기피했다. 숙종의 이름은 처음에 광(爌)으로 정해졌으나 폭군으로 유명한 수 양제 양광(楊廣)의 이름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순(焞)으로 고쳤다. 당시 이름자 후보로 올린 후(煦) 역시 송나라 철종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후보에서 탈락했으니, 폭군의 이름만 기피한 건 아니다.

숙종 정명단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숙종의 처음 이름은 광(爌)이었으나 수양제 양광의 이름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순(焞)으로 고쳤다.

왕실이 선호한 이름

조선 왕실의 작명은 자의(字義), 자형(字形), 자음(字音)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우선 밝고 긍정적인 의미를 담은 글자를 선호했다. 밝다, 빛난다는 뜻의 글자를 가장 많이 썼다. 태조 단(旦) 정종 경(曔), 단종 위(暐), 예종 황(晄), 선조 연(昖), 숙종 순(焞), 경종 균(昀), 영조 금(昑), 헌종 환(烉), 철종 변(昪), 고종 희(㷩)가 여기에 속한다. 문종 향(珦), 세조 유(瑈), 광해군 혼(琿), 순조 강(玜)처럼 옥(玉)을 뜻하는 글자도 빛과 무관하지 않다. 현대 한국인의 이름자도 빛난다는 뜻을 선호한다..

높다, 기쁘다, 맑다, 곧다는 뜻도 선호했다. 연산군 융(㦕), 인종 호(峼), 명종 환(峘)은 높다는 뜻이고, 성종 혈(娎), 중종 역(懌)은 기쁘다는 뜻이다. 효종 호(淏)는 맑다, 경종 연(棩)은 곧다, 세종 도(祹)는 복을 뜻한다. 인조 종(倧)은 상고시대 신인(神人)의 이름이며, 순조 척(坧)은 ‘터’라는 뜻이다.

때로는 단순한 자의를 넘어선 깊은 의미를 담기도 했다. 영조는 『맹자』의 “천하가 하나로 정해진다.”라는 구절을 따서 의소세손의 이름을 정(定)으로 정했다. 정조는 문효세자가 법과 제도[典]로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王]이 되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전(琠)으로 정했다. 국왕이 절차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이름을 지을 때 오히려 깊은 의미를 담은 이름을 지을 수 있다.

글자의 형태로 말하자면 상용자가 아니면서 비교적 단순한 글자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숙종의 이름 후보 정(火+定)은 “자획이 서로 어울린다.”는 평을 받았으며, 문효세자의 이름 후보 대(旲)는 “자형이 바르다.”는 평을 받았다. 정조가 순조의 이름자 강(玜)을 만들면서 “편방이 부합한다.”라고 말한 것도 자형에 대한 지적이다. 상하좌우가 균형을 이룬 글자를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명 논의 과정에서 “음이 좋다.”는 언급이 종종 보이므로 글자의 음도 고려한 듯하다. 이처럼 글자의 뜻과 소리, 형태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지만 무엇이 좋은지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획일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작명가들이 철칙으로 여기는 오행(五行), 사주(四柱), 획수(劃數)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조선 국왕의 이름자 중에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순서에 맞는 이름은 효종 호(淏), 현종 연(棩), 숙종 순(焞) 3대 뿐이다. 각각 물 수(水), 나무 목(木), 불 화(火)가 들어간 이름자다. 다음 순서는 흙 토(土)이므로 경종의 이름을 지을 적에 신하들이 흙 토변으로 이름자를 정할 것인지 문의한 적이 있다. 그러나 숙종의 대답은 단호했다. 선대왕들의 이름이 오행상생의 순서에 맞는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고 했다. 결국 경종의 이름은 날 일(日)변의 균(昀)으로 정해졌다.

장헌세자의 이름을 정할 때도 이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영조 역시 오행상생은 왕실 작명의 전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마음 심(心)변의 훤(愃)으로 결정했다. 사주(四柱)를 고려한 증거도 찾을 수 없다. 영조가 관상감 관원에게 사주보는 법을 물었더니 모른다고 대답했다. 사주에 대한 기록이 실록에 종종 보이기는 하지만, 작명과 연관지은 사례는 찾을 수 없다. 사주는 민간에서 유행한 점술이다. 왕실에서 사주를 고려한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획수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참고문헌

안대회, 「正祖 御諱의 改定: ‘이산'과 ‘이성' -『奎章全韻』의 편찬과 관련하여」, 『한국문화』 52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0.

장유승, 「조선 왕실의 작명 연구」, 『동방한문학』 86집, 동방한문학회, 2021.

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한문 문헌을 번역하고 연구한다. 『정조어찰첩』, 『한국산문선』, 『조선잡사』를 썼다.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으로 한국출판문화상 편집상, 『동아시아의 문헌교류』로 한국출판학술상 우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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