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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아직은 때가 아니다.2023.08.06.

정말로 마법 수업을 받는구나. 칼로스에게 직접 허락을 받았는데도 믿기지 않아 아이레네는 제 볼을 살짝 꼬집어봤다.

“아프네.”

즉, 꿈이 아니라는 의미니 아이레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마법 수업은 점심을 먹고 난 뒤, 도서관에서 받기로 한지라, 아이레네는 점심을 먹자마자 노트와 펜을 챙겨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직 안 오셨네.’

하긴 내가 너무 일찍 오긴 했지. 아이레네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제르딘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이레네는 고개를 들었다.

“아…….”

당연히 제르딘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칼로스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황한 아이레네는 일어서다 말고 그대로 굳었다. 칼로스가 팔짱을 끼고 문기둥에 기대섰다.

“내가 온 게 불만인가 보지?”

“네? 아, 아니요.”

비로소 정신을 차린 아이레네는 칼로스가 이상한 오해를 할까 봐 황급히 대답했다.

“당연히 황태자 전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공 각하께서 들어오셔서……송구합니다.”

“송구할 것까지는 없고.”

칼로스가 무심하게 대답하며 문기둥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황태자라면 곧 올 거다.”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 황태자? 대공이 높은 신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귀족이었다. 황족에게는 존칭을 써야 할 텐데, 마치 황태자가 그의 아랫사람인 양 부르니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칼로스는 황태자한테 반말도 하던데. 황태자가 그의 제자라서 편하게 대하는 걸까?

“황태자한테 마법 수업을 받기 전에 몇 가지 알아둬야 할 게 있다.”

경고하는 듯한 말투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아이레네를 다시 현실로 불러왔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앞에 서 있는 칼로스를 보고 놀랐지만,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그의 말을 귀담아들을 준비를 했다.

“말씀하세요.”

“우선 첫 번째. 수업에서 뭘 배웠는지 전부 다 나한테 보고하도록.”

그걸 왜 보고 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두 번째. 제르딘이 수업 외 말하는 것도 전부 보고해. 아주 사소한 거라도 말이지.”

“네?”

그러나 두 번째 명령에서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전부 보고하라는 건, 제르딘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예전에 그녀의 부친도 모친을 믿지 못해, 아이레네에게 모친이 말하는 건 아주 사소한 거라도 흘리지 말고 전부 말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칼로스가 부친과 같은 명령을 하니, 당혹스러웠다. 두 사람, 꽤 친한 사이인 줄 알았는데……아니었나? 칼로스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없습니다.”

아이레네는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봤자 칼로스가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들이 어떤 관계이든 간에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괜한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

칼로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아이레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명심해야 할 건…….”

똑똑-. 칼로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오래 기다…….”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던 제르딘은 칼로스를 발견하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멈춰.”

그러나 칼로스의 명령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칼로스는 엉거주춤 서 있는 제르딘을 일별한 뒤, 아이레네에게 말했다.

“에스페르 성에선 마법을 쓸 수 없으니, 마법을 배우더라도 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칼로스는 도서관을 나갔다. *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제르딘은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자, 아이레네에게 물었다.

“스승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어?”

아이레네는 굳게 닫힌 문을 흘겨본 뒤 대답했다.

“마법 수업에 관해서 이것저것 말씀해주셨어요.”

“나에 대한 언급은 없으셨어?”

어떡하지.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네.”

아이레네는 순간 고민했지만,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말해봤자 제게 득이 될 건 전혀 없었으니까. 오히려 이 사실이 칼로스에게 알려지면, 그의 눈밖에 벗어나 앞으로 이곳에서 생활하는 게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흐음, 그래?”

“…….”

제르딘이 숨겨둔 진실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쳐다보자 아이레네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제게 마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양심에 찔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떠날 사람보다 앞으로 계속 함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바로 수업을 시작하자. 하루에 두 시간 밖에 허락을 받지 못했는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지.”

다행히 제르딘은 별다른 언급 없이 넘어갔다. 아이레네는 가슴 깊이 안도하며 제르딘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르딘은 아이레네가 보던 기초 마법 책을 넘겨보며 물었다.

“어디까지 읽었어?”

아이레네가 조금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읽는 건 2장까지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거의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럴 만도 하지. 기초라고 적혀 있긴 하지만 마법을 공부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이해하기 힘든 내용뿐이니까.”

아이레네는 내심 자신이 이해력이 부족한 건가 싶어 걱정했는데, 제르딘이 저렇게 말해주니 안심됐다.

“역시 책은 쓸데없이 말이 어려워.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이딴 책을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어.”

제르딘은 책장을 몇 번 더 넘겨보더니, 혀를 차며 책을 덮었다.

“이딴 걸 읽는 것보다 직접 몸으로 깨우치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야.”

갑자기 제르딘이 일어서자 아이레네도 덩달아 일어섰다.

“아, 너는 앉아 있어도 돼.”

제르딘은 아이레네를 다시 앉히더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황태자는 서 있는데 저만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한데, 어깨에 손을 올리니 더욱 껄끄러웠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본래는 마나 핵을 뚫어주는 것부터 하지만, 너는 ……니까 그럴 필요가 없겠지.”

중간에 말이 끊긴 것 같은데, 내 착각인 걸까. 아이레네는 고개를 들고 제르딘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제르딘이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며 웃었다.

“내가 잘생겨서 계속 보고 싶은 건 알겠는데, 지금은 수업에 집중해야지.”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그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이레네는 고개를 내리는 순간, 심장 부근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아.”

아이레네는 신음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제르딘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물었다.

“혹시 통증 같은 걸 느꼈어?”

“네.”

“역시 마나 핵을 뚫어주지 않아도, 몸속에 마나가 돌고 있구나.”

제르딘은 아이레네가 가지고 온 노트를 펼치더니, 거기에 적으며 설명했다.

“너도 책을 읽어서 알겠지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마나의 성향이 조금씩 달라. 성향이 다른 마나끼리 충돌하면 반발하면서 이상 작용을 일으키지.”

“아, 그래서 통증이 느껴졌던 거군요.”

아이레네는 제르딘이 말해준 것과 비슷한 내용을 책에서 본 적이 있는 터라 바로 이해했다.

“다행히 네가 가진 마나와 내가 가진 마나의 성향이 완전 정반대는 아니라서 이 정도에서 그쳤지만, 만약 상극이었다면 너는 쇼크로 기절했을 거야. 최악의 상황에는 죽을 수도 있지.”

죽는다. 듣기만 해도 섬뜩한 단어에 아이레네의 몸이 살짝 떨렸다. 동시에 의문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황태자 전하께서 가진 마나와 제 마나가 상극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아신 건가요?”

제르딘이 아무것도 몰랐다면,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를 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다 알고 했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책에는 마나의 성향은 직접 부딪쳐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던 터라 더욱 의아했다.

“…….”

제르딘의 입매가 일순 경직됐다. 그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의미구나.

“그럼 마나 운용하는 법에 대해서 알려줄게.”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는 듯 대화의 주제까지 넘기니, 아이레네는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 마법 수업을 끝내고, 도서관을 나온 제르딘은 복도 벽에 서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큰일 날 뻔했네.”

아이레네가 깊게 캐묻지 않고 넘어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굉장히 곤란할 뻔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

난데없이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제르딘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아, 듀이구나.”

제시는 아이레네거나 제시, 혹은 칼로스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듀이가 눈매를 얇게 접고, 모노클을 추켜올렸다.

“또 이상한 작당을 꾸미고 계시는 겁니까?”

“또라니. 누가 보면 맨날 이상한 작당을 꾸미는 사람인 줄 알겠어.”

듀이가 픽, 웃었다.

“이상한 작당을 꾸미는 건 맞군요.”

“당연하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

제르딘이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뻔뻔하게 대답하자, 듀이는 혀를 찼다.

“그럼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얼른 가서 이상한 작당을 실행하시지요.”

“어라. 안 말리는 거야? 내가 스승님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풉.”

듀이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하실 수 있으시면 해보세요. 장담컨대 전하께선 주인님의 머리카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실 겁니다.”

듀이는 부디 노력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그러게.”

혼자 남은 제르딘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겨울이 성큼 다가온 만큼 낮의 길이가 짧아져, 어느덧 창밖에는 붉은 노을이 드리웠다. * 칼로스와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시간.

“……배웠어요.”

아이레네는 그가 명령한 대로 수업에서 있었던 일들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전부 다 말했다.

“그런데 황자 전하께선 어떻게 제 마나와 상극이 아니라는 걸 아신 걸까요?”

“글쎄.”

그러면서 슬쩍 해결하지 못한 의문을 꺼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시원찮았다. 이유를 안다는 걸까, 모른다는 걸까. 아이레네는 좀 더 자세하게 묻고 싶었지만, 제르딘과 달리 칼로스에겐 그럴 용기가 없어 조용히 식사했다. 딱히 의기소침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칼로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대답해 줄 걸 그랬나.’

아니야. 그랬다가는 결국 다 털어놓아야 할 거야. 언젠가 전부 다 말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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