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과 인도의 관계

파키스탄 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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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아시아 > 파키스탄
분야 외교

1. 인도-파키스탄의 전쟁

파키스탄과 인도는 오래 전부터 이슬람교와 힌두교 간의 종교적 대립이 있었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분리 독립하면서 그때 당시 양국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특히 카시미르(Kashmir) 지역 영유권을 둘러싸고 양국은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으며, 방글라데시의 독립과 관련해서 다시 한 차례의 전쟁을 치름으로써 양국 간 적대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카시미르(Kashimir) 지역을 둘러싼 영유권 분쟁은 1947년 영국 식민지 하에서 인도가 신생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될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카시미르 지역 인구의 절대다수(77%)를 차지하는 이슬람 측은 파키스탄에 귀속되고자 파키스탄 정부군의 지원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카시미르 지역의 힌두교 영주인 마하라자(Maharaja)가 인도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에 따라 1947년 10월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의 거중조정(居中調停)에 따라 휴전선이 설정되었다.

1965년 7월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중재로 휴전되었다. 1966년 1월 인도와 파키스탄의 수뇌는 소련의 타슈켄트(Tashkent: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에서 회동하여 정전협정(타슈켄트 협정)을 체결하였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싸고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다. 1972년 7월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와 인도의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총리 간에 심라협정(Simla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심라협정 내용은 점령지역에서의 철군, 카시미르 내 통제지역 설정, 쌍무협상을 통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이다. 그러나 심라협정만으로는 카시미르 지역의 영유권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1949년 국제연합 결의에 따라 카시미르 지역을 분쟁지역으로 표기하고,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카시미르의 장래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도는 카시미르 지역을 자국 영토에서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간주했다. 파키스탄은 카시미르 분쟁을 국제문제로 확대하여 현상타파를, 인도는 현상유지의 입장에서 카시미르 문제를 양자 간의 대화로 해결하기를 희망한다.

2. 1980년대 파키스탄과 인도의 관계

1979년 12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에 따라 파키스탄은 동·서 양국에 적을 두는 상황에 놓였다. 따라서 소련과의 군사협력 관계가 긴밀한 인도와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1981년 9월 불가침협정 및 무력불사용 협정 체결을 인도에 제의하였다. 인도는 1981년 미국과 파키스탄의 관계 개선에 따라 미국이 파키스탄에 무기를 제공하자 파키스탄의 불가침협정 및 무력불사용 협정 체결 제의를 받아들이고 1982년 8월 외상회담을 개최하였다. 1982년 11월 무함마드 지아 울 하크(Muhammad Zia ul-Haq) 대통령은 인도를 방문하여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총리와의 회담에서 파키스탄·인도 공동위원회(PAK-INDIA Joint Commission) 설립과 불가침협정 체결에 관해 토의하기로 하고, 1982년 12월 중에 외무차관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해 12월에 개최된 양국의 외무차관회담과 1983년 3월 지아 대통령과 간디 총리 간의 회담에서, 양국은 파키스탄이 제시한 부전조약과 인도가 제시한 평화우호조약 안에 협의하였다. 그리고 파키스탄·인도 공동위원회 설치협정에 서명하였다. 파키스탄·인도 공동위원회는 1985년 이래 중단되었다가 1989년 7월에 재개되었다.

1984년 11월 1일 지아 대통령은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총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인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주력하였다. 지아 대통령은 1987년 2월 인도를 방문하여, 라지브 간디(Rajiv Gandhi) 총리와 인도·파키스탄 국경지역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1988년 12월 출범한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 신정부도 인도와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였다. 1988년 12월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서 열린 제4차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 South Asian Association for Regional Cooperation) 정상회담을 계기로 부토 총리와 라지브 간디 총리는 세 차례의 개별회담을 통해 양국 간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1989년 7월 라지브 간디 총리는 인도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30년 만에 파키스탄을 방문하여 부토 총리와 정상회담을 개최하였으며, 양국 간 관계개선 원칙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1989년 12월 인도의 카시미르 지역에서 발생한 심각한 폭동사태로 양국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3. 1990년대 파키스탄과 인도의 관계

1991년 4월 파키스탄과 인도 양국 간에 외무차관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1991년 11월 영국연방 정상회담 때 무함마드 나와즈 샤리프(Muhammad Nawaz Sharif) 총리와 나라시마 라오(Narasimha Rao) 총리 간의 회담에서, 양국 간 현안 문제를 포괄적으로 협의하고 모든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원칙에 합의하였다. 1991년 10월 개최된 외무차관회담에서 핵 문제, 카시미르(Kasimir) 문제에 대한 양측의 기본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생화학무기 폐기, 재래식무기 감축, 핵 시설 자료교환 협의 등을 비롯하여 군사적 상호신뢰를 구축하는 조치에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1992년과 1994년에도 외무차관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양국 간 현안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외무차관회담은 1994년 이후 개최되지 않다가 1997년에 재개되었다.

1994년 3월 파키스탄은 인도의 협조 부재로 업무수행이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주 봄베이 자국 총영사관을 폐쇄하였다. 그리고 1994년 12월에는 인도가 카라치(Karachi) 사태에 개입한다는 이유로 주카라치 총영사관을 폐쇄하였다.

1997년 3월 나와즈 샤리프 신정부가 출범한 이후 파키스탄과 인도는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외무차관회담을 재개하였다. 1997년 6월 개최된 2차 외무차관회담에서 8개의 의제에 합의하였다. 1997년 9월 개최된 3차 회담에서는 의제별 논의에 대한 메카니즘 구성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카시미르 문제를 논의하는 메카니즘에 대한 이견으로 회담은 결론 없이 끝났다. 파키스탄은 인도가 2차 외무차관회담에서 카시미르 문제를 논의할 작업 그룹(Working Group)을 구성하기로 합의했으나 이러한 합의에서 후퇴하였다며 인도를 비난했다.

1999년 5월 카시미르 지역에서 인도 순찰대와 카시미르 지역의 친(親) 파키스탄 무장 단체 간에 소규모 전투가 재개되었다.

4. 2000년대 파키스탄과 인도의 관계

2000년 3월 미국의 빌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은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를 방문하여 카시미르(Kashmir) 지역을 둘러싼 인도·파키스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000년 11월 인도가 카시미르 지역에서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하였다.

2001년 5월 인도는 지난 50년간의 양국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aiz Musharraf) 파키스탄 군사정부 수반을 초청한다고 발표하였다. 2001년 7월 페르베즈 무샤라프 신임 파키스탄 대통령과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Atal Bihari Vajapayee) 인도 총리는 인도 아그라(Agra)에서 3일간 회담하였으나 카시미르 지역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인도가 휴전 선언을 한 이후 10여 개월이 지난 2001년 10월 처음으로 카시미르 주 접경 지대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조지 부시(George Bush)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진행하는 군사행동에 제약이 된다며 양국에 전투를 즉각적으로 중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2001년 12월 인도의회 의사당에서 정체불명의 무장괴한들과 경호원들 간의 총격전으로 최소 13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인도 정부는 의사당 총격 사건에 파키스탄 정보부가 개입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인도 의사당 자살테러로 양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양국은 카시미르 통제선(LoC, Line of Control)을 두고 또 다시 충돌하면서 전면전 위기로 치달았다.

2002년 11월 파키스탄은 미르 자파룰라 칸 자말리(Mir Zafarullah Khan Jamali) 내각이 출범하면서 인도와의 대화를 위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2003년 4월 인도의 바지파이 총리는 파키스탄 측에 대화를 제의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자말리 총리는 바지파이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양국 간 관계 개선의 협의, 2003년 5월 인도 바지파이 총리의 대사급 외교 관계, 그리고 항공편 재개를 선언하였다. 인도 바지파이 전 총리는 2004년 1월 4일~6일간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서 개최된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 South Asian Association for Regional Cooperation) 정상회의에 참석하여 무샤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이 회담은 양국 관계 개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양국은 2004년 2월 16일~18일간 이슬라마바드에서 다방면 대화를 개최하여 양국 간 제반 문제를 협의하고 향후 계획과 전략에 합의하였다.

2004년 5월에 출범한 만모한 싱(Manmohan Singh) 총리 정부도 이를 승계하였다. 양국은 2010년 현재까지 세 차례에 걸쳐 재래식무기 및 핵무기, 잠무-카시미르 문제, 운하, 문화, 테러 및 마약, 경제통상을 비롯한 8개 분야에서 양국의 신뢰구축조치(CBMs, Confidence-Building Measure)와 관련된 협의1)를 진행하고 있다. 양국의 외무장관들은 회담을 통해, 신뢰구축조치와 관련된 양국의 합의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다. 그러나 잠무-카시미르 문제와 관련된 협의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별다른 진전이 없는 카시미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2006년 12월 인도의 NDTV와의 인터뷰에서 4가지 카시미르 평화안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인도와의 회담에서 가시적인 진전이 이루어진다면 카시미르와 관련된 국제연합 결의와 주민투표 주장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무샤라프 대통령의 카시미르 평화안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카시미르는 현재의 경계선을 유지하지만 주민들이 지역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허용한다.
② 카시미르 지역은 자치권을 보유하나 독립은 허용하지 않는다.
③ 군대는 시차를 가지고 카시미르 지역에서 철수한다.
④ 인도, 파키스탄, 카시미르 대표자로 구성된 공동감독기구가 카시미르를 운영한다.

만모한 싱 인도 총리는 2006년 12월 무샤라프 대통령의 카시미르 분쟁 해결을 위한 제안뿐만 아니라 인도-파키스탄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환영한다고 언급하였다. 2008년 5월 샤 메무드 후세인 쿠레시(Shah Mehmood Hussain Qureshi) 파키스탄 외무장관은 프라나브 무케르지(Pranab Mukherjee) 인도 외무장관과 이슬라마바드에서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하여, 제4차 다방면 대화 결과를 평가하고 제5차 다방면대화를 뉴델리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2008년 7월 뉴델리에서 제5차 다방면 대화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2008년 11월 뭄바이(Mumbai)에서 대규모 테러가 발생하였다. 인도는 파키스탄 정보부가 이 테러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여겼다. 인도가 이 테러의 배후 혐의자 명단을 파키스탄에 통보하고 이들의 이관을 요구하자, 양국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2011년 7월 파키스탄 외무장관이 인도를 방문하였다. 이후 인도 외무장관과 상무장관이 파키스탄을 방문하여 다방면 대화를 재개하였다. 인도는 양국 간 교역을 확대하기 위한 대인도 최혜국대우(MFN, Most Favored Nation) 지위 부여 및 비자 간소화 그리고 비관세 장벽의 완화를 위한 협의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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