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노동자를 편법으로 소모품처럼 사용하다 쉽게 버리려는 행태”
울산방송은 내년부터 이산하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날씨방송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울산방송 측은 이 아나운서에게 CG나 행정직 등 다른 직무로 바꿀 것을 통보했다.
이 아나운서에 따르면, 울산방송 보도국 조아무개 팀장은 지난 20일 이 아나운서에게 '날씨를 없앨 생각'이라며 '행정직과 뉴스PD, CG 중에 하라'고 통보했다. 이 아나운서가 다른 직무로 전환하지 않겠다고 밝히자 조 팀장은 "그럼 아무 일도 안 해도 괜찮느냐"고 했다.
울산방송은 2021년 이 아나운서가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 복직한 뒤 현재까지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 이 아나운서에게 맡기던 유일한 프로그램인 일일 날씨방송을 없애기로 결정한 것이다.
울산방송은 2015년 12월부터 2021년 4월까지 5년여 간 이씨에게 서면계약서 없이 기상캐스터와 뉴스앵커, 라디오진행, 취재와 기사 작성 등 업무를 지시했다가 2021년 4월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울산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가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받아들였으나 울산방송이 거듭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도 지난해 11월 이 아나운서의 손을 들어주며 판결이 확정됐다.
이처럼 법원이 이 아나운서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확인한 지 1년이 넘었지만 그의 싸움은 진행형이다. 울산방송은 그에게 근로계약서를 제시했는데, '적격성이 부족하면 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노동자 귀책으로 사측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등 독소조항을 담거나 '1년 기간제 계약'을 요구했다. 이 아나운서가 이들 계약서에 서명을 거부하고 제대로 된 계약서를 요구했으나 현재까지 사측은 응하지 않고 있다.
이 아나운서는 "회사가 계약서도 쓰지 않고 노동자로 인정하지도 않아 다시 소송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방송을 없앤다는 통보는 보복성이자 압박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회사는 '직원으로 생각하니 보직변경을 하는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저와 계약서도 쓰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1월에 출근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해 답답하고 힘들다"고 전했다.
고 이재학 PD의 사망 이후 무늬만 프리랜서 방송 노동자들이 법적 다툼에 나서고 승소하는 판례가 쌓여왔지만, 회사가 법적 판단 취지를 거스르거나 회피하면서 되려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상황이 이어져왔다. 회사의 방송노동자에 대한 직무전환 강요는 단적 사례다. 일례로 KBS가 2021~2022년 노동청의 근로감독이나 노동위 판정으로 노동자성이 확인된 방송작가들에게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할 경우 행정직 전환을 요구했다.
이 아나운서를 법률대리하는 정일호 변호사(법률사무소 시선)는 "울산방송은 방송노동자를 편법으로 소모품처럼 사용하다 쉽게 버리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법원이 이런 행위가 위법하다고 판단해 제동 건 뒤에도 방송인으로부터 방송을 빼앗을 또다른 꼼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울산방송 경영관리팀 정아무개 부장은 이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날씨방송을 없애는 것이 맞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전달한 걸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날씨방송을 폐지하는 이유와 이 아나운서에 직무 전환을 요구하는 이유,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이유 등을 묻는 질문에 "소송과 관련이 돼 따로 답변 안 하겠다. 소송 관련 사항이라 따로 할 말이 없다"고 거듭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