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등산연구소 세미나서 문제 제기… 산악계 ‘발칵’
지난 4월 25일 한국등산연구소가 서울시 시민청 바스락홀에서 개최한 '8,000m 14좌, 그 정상은 어디인가' 세미나에서 나온 발표자의 말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중은 웅성거렸다. 이어진 자유토론 시간엔 객석에서 "어렵게 일궈낸 한국 등반 성과를 일방적으로 폄훼한 연구인데 왜 대응하지 않느냐"는 격앙된 목소리도 나왔다.
1962년부터 시작된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에 걸쳐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거나, 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은 총 8명이다. 이 중 일부 사례를 제외하곤 정상 등정 자료와 사진이 뚜렷하다고 여겨져 그간 등정 시비가 일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주장이 제기된 걸까?
사실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등반가들 중 상당수가 실제 정상은 다녀오지 못했다는 주장은 이미 2년 전부터 국제 산악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에버하르트 주르갈스키Eberhard Jurgalski를 주축으로 하는 산악기록단체 8000ers.com은 2021년 가을 마나슬루 등정 자료를 분석해 그간 대부분의 등정이 실제 정상에 못미치는 전위봉에서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또한 범위를 히말라야 14좌 전체 정상으로 넓혀 검토한 결과 단 4명의 등반가만이 14좌의 정확한 정상을 밟았고, 나머지 등반가는 정상이 아닌 곳까지만 올랐다고 밝혔다.
이번 세미나는 한국 산악계의 첫 공식 반응이다. 남선우 한국등산연구소 소장은 개회사를 통해 "누군가는 다 지나간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논의조차 안 하면 '집단적 방관'이라는 비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며 "다만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등반가들도 정상이 아닌 곳을 정상으로 여겼단 점에서 이는 착각이나 앞선 등정자들의 자료가 만든 오류가 주 원인으로 보인다. 따라서 등정, 미등정을 새롭게 가리는 것보다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합리적인지 논의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대한산악연맹 손중호 회장, 코오롱등산학교 이용대 명예교장, 서울시산악연맹 석채언 회장, 한국산서회 최중기 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곽정혜 연구원은 8000ers.com의 주장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오영훈 연구원은 뜨거웠던 한국의 히말라야 14좌 신드롬의 원인과 문제를 심도 있게 분석했다. 이후 박정헌 대장, 오은선 대장의 칸첸중가 등정 논란을 공론화했던 전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박준우 감독, 서현우 월간<山> 기자 등이 참여한 토론이 있었다.
너무 완만한 정상 능선
먼저 8000ers.com의 주장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곽정혜 연구원은 "정상의 모양이 삼각형으로 명확한 봉우리들은 대부분의 등반가들이 정확한 정상 지점을 다녀왔지만, 정상부가 평평하고 완만한 경우 그 능선부에서 가장 높은, 다시 말해 정확한 정상을 다녀오지 못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설명했다. GPS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기 이전에 이곳을 오른 등반가들은 정확한 정상의 위치를 앞서 오른 등반가들의 자료나 셰르파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비롯된 오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봉우리는 마나슬루와 다울라기리, 안나푸르나다. 한국 등반가들 대부분이 이 세 봉우리 중 2~3곳의 진짜 정상을 오르지 못한 것으로 파악돼 완등자가 0명이 됐다.
'등정 인정 구역' 설정 안 해
메스너는 자신이 안나푸르나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린 연구진에 대해 "그 긴 능선 위에서 (정상에) 겨우 5m 못미친 곳에 갔다고, 누군가 내가 한 등반이 바보 같은 짓Bullshit이었다고 한다면 마음대로 생각하라Think what you want"며 날선 반응을 보인 바 있다. 특별하게 더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있지 않은 정상 능선에서 딱 정확한 '정점'을 밟지 못했다고 하여 미등정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연구진도 초기에 '등정 인정 구역Tolerance Zone, TZ'을 도입하는 것을 검토한 바 있다. 즉 '여기까지 올랐으면 정상에 오른 것으로 인정'해 주는 구역을 정하자는 것이다. 가령 상당수의 등반가가 정상으로 오인했던 다울라기리 메탈 폴, 서릉 전위봉에서 등반을 마쳤어도 정상 등정으로 인정하자는 개념이다.
어느 정도 융통성 있는 제안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진은 최종적으로 등정 인정 구역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 이유로는 "첫 번째, 실제 지리적 경계를 설정할 때 모든 등반가가 납득하기 어렵다. 두 번째, 무엇보다 실제 정상에 도달한 등반가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들을 등정 인정 구역 내에만 진출하고, 실제 정상은 가지 않은 등반가들과 동일시하는 건 형평성의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등로주의는 등정주의보다 우월하지 않다"
이처럼 곽정혜 연구원은 8000ers.com의 연구 결과를 객관적으로 전달한 데 이어 오영훈 연구원은 한국 히말라야 14좌 완등 시대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오 연구원은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다고 알려진 이는 총 53명이며 국적 순으로 보면 대한민국, 이탈리아(8명), 스페인(7명), 네팔(6명), 폴란드(3명) 등"이라며 "앞선 나라들은 일상적으로 알파인 등반이 행해지는 데 반해 대한민국은 만년설이 있는 산도 없고, 알파인/고산 등반을 하는 등반가도 극소수인 것을 고려하면 매우 미스터리한 결과"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산악계 내의 의미부여, 대중매체의 대국민 포장, 기업체 후원이라는 3요소가 맞물린 결과"라고 분석했다.
"등반가 자신은 물론, 비평가들은 등반을 영웅 서사로 재구성하고, 히말라야 고봉을 신화화했습니다. 산악전문지와 대중매체는 개인 대 개인, 국가 대 국가의 경쟁 구도로 내몰았고,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장에 뛰어든 기업들은 영웅 탄생에 조력하며 브랜드 이미지 향상을 꾀했습니다."
또한 오 연구원은 히말라야 14좌 프로젝트가 한국에서 가졌던 의미를 국가와 민족의 승리 서사, 진보와 우열의 서사, 체험 우선주의의 서사, 인간관계의 서사 네 가지의 집합으로 봤다. 즉 등반가들의 성취가 국가주의적 승리로 표상됐고, 히말라야 14좌 완등이 다른 등반에 비해 '우월한' 최고의 등반으로 여겨졌으며, 극한의 환경에서 이뤄진 등반 과정은 체험주의적으로 해석돼 직접 이를 체험해 본 적이 없으면 말할 자격조차 없어지는 신성한 영웅의 영역이 됐고, 그러면서도 함께 등반한 선후배나 타인을 위해, 혹은 그들과의 관계를 강조하며 지극히 인간적인 서사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물론 곡해된 것이 아니라 등반가 집단의 진심과 실제 의도가 녹아 있는 서사들이다.
끝으로 오 연구원은 "이번 8000ers.com의 연구가 한국 산악계의 유산에 타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대한민국 산악계의 불행이라면 그들의 진심과 의도가 경쟁 구도와 기업 논리에 가려, 그렇게 전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음에도 산악계 밖의 많은 이들에게 등반의 즐거움, 자연 체험의 소중함을 공유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일 것"이라고 했다. 또한 "우월주의, 진보주의, 체험우선주의에 얽매여 정상 수집 등반의 독자성, 나아가 등반 개개의 가치를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관용이 정착하지 못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며 "흔히 한국 산악계가 등로주의를 등정주의보다 우월하고 발전된 개념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는 서로 별개의 가치를 지닌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진 토론에선 박준우 감독은 "상업적 등반과 비상업적 등반을 구분하되 서로 다른 영역으로 보고 서로 다른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박정헌 대장은 "과거에는 정확한 정상을 판별하기 어려웠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해해야 한다"면서 "등정주의 시대는 저물었고, 등로주의 시대가 왔기에 이번 연구로 인해 등정 기록이 취소된 이들이 큰 반응을 내놓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본 기자는 "그간 정상의 모호성이 곧 모험성을 만들어냈는데 이번 연구는 완전히 히말라야 14좌를 하나의 스포츠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향후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며 후원 유치 양상도 변할 것"이라며 "단기적으로는 최초의 기록이 초기화된 상태라 새로운 물결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이미 셰르파나 다른 나라 등반가들은 자신의 실익에 따라 이번 연구 결과를 해석하고 있는데 한국 산악계도 실용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편 토론에선 구체적으로 의견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애초에 이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등정 인정 구역TZ'을 설정하고 등정 기록을 해석할 것인지, 또 이 구역을 설정한다면 향후 등반은 어떻게 볼 건지, 반대로 연구진의 주장대로 등정 인정 구역을 두지 않는다면 기존 등정자들의 유산은 구시대의 것이 되는 건지, 또 근본적으로 산을 '등정'한다는 개념이 꼭 '정확한 꼭지점'을 밟아야만 하는 것인지 등 이번 연구에 대한 한국 산악계의 입장을 정리하려면 논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다만 세계적으로 이번 연구 결과를 적용해 14좌 완등 레이스를 펼치는 산악인들이 많다는 점에서 지속적으로 공론장을 만들어 모종의 결론을 내놓을 필요는 있어 보인다. 지난 4월 26일 중국 여성 등반가 동홍쥐안董紅娟, Dong Hong Juan은 시샤팡마를 등정하며 자신을 8000ers.com이 공인한 '진짜 정상'을 모두 오른 '최초의 여성 14좌 완등자'라고 선언했다.
*상세한 세미나 자료는 '한국등산연구소' 홈페이지 mountaineering.kr '공지사항' 게시판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며 전체 세미나 영상은 유튜브 '한국히말라얀펀드' 채널에 업로드될 예정이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