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오디세이] 새 출발하는 흥국생명
"김연경과 같은 팀에서 만난 게 내 인생 최고의 로또"라고 말한 권순찬 흥국생명 감독이 경기도 용인에 있는 구단 체육관에서 활짝 웃으며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김연경(34·192㎝)은 지난해 도쿄 올림픽(4강)을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센터 양효진(현대건설·190㎝)과 김수지(IBK기업은행·188㎝)도 태극 유니폼을 반납한 여자대표팀은 국제대회 16연패라는 참담한 기록을 남겼다. 그럼에도 한국배구연맹(KOVO)이 올 시즌 흥행을 자신하는 이유는 김연경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김연경은 해외에서 뛰다 처음 복귀한 2020~21 시즌 이재영·다영 쌍둥이가 학폭 논란으로 빠진 가운데도 흥국생명을 정규리그 2위와 챔피언결정전(GS칼텍스에 3전3패)까지 이끌었다.
김연경·옐레나, 외국인 선수 두 명 효과
1년 만에 국내에 복귀해 지난 8월 열린 V리그 컵대회에서 리시브를 하고 있는 김연경. [뉴스1]
권 감독은 지난 시즌 흥국생명에 대해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이 없고 선수들이 대부분 어리다 보니까 이기고는 싶은데 게임을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할지 모르고, 그냥 막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다”고 평가했다.
김연경이 복귀한 이후 팀은 완전히 달라졌다. “여자 선수들은 연습경기나 훈련할 때 100% 힘을 다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훈련이 길고 힘들기 때문에 체력을 안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김연경은 연습경기 공격 할 때도 전력을 다해 공을 때리고, 수비 한 번도 쉽게 하는 적이 없다. 무슨 일을 하든 다 계획을 갖고 있고 그걸 100% 실행한다. 그걸 보면서 우리 선수들이 많이 배운다”고 권 감독은 귀띔했다.
2006년 4월 2일 V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도로공사를 꺾고 우승한 흥국생명 선수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연경은 “선수들이 스스로 잘해주고 있기 때문에 딱히 강조하는 부분은 없다. ‘같이 잘해 보자’ 이야기 하면서 시즌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흥국생명은 외국인선수로 지난 시즌 KGC인삼공사에서 뛰었던 옐레나(25·196㎝)를 영입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인 옐레나는 김연경과 한 팀에서 뛴다는 소식에 감격했다고 한다.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훈련에도 열심이다. 권순찬 감독은 “옐레나는 승부욕이 강해 실수를 하면 자신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그런 모습은 동료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다’고 했더니 고치겠다고 했다. 우리 팀은 세터의 토스가 빠른 대신 높이가 좀 낮아질 수 있는데 그것도 잘 따라오고 있다”고 만족감을 표현했다. 김연경이 아웃사이드 히터(레프트), 옐레나가 아포짓 스파이커(라이트)에 포진하면 흥국생명은 외국인선수 두 명을 기용한 효과를 누리게 된다.
흥국생명 배구단 연혁
태광산업 배구단 구단주였던 고(故) 이임용 태광그룹 창업자의 배구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운영난으로 해체 위기에 빠졌던 동일방직 배구단을 인수한 뒤 선수들에게 “시집가기 전까지는 모두 내 딸이다”라며 지원과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은퇴 후에는 모기업에서 직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2005년 슈퍼 루키 김연경이 입단하면서 흥국생명은 날개를 달았다. 2005~06, 2006~07 시즌 연속 V리그 정규리그-챔피언전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2007~08 정규리그, 2008~09 챔피언전 트로피도 흥국생명 차지였다. 김연경이 뛴 네 시즌 동안 흥국생명은 챔피언전 3회, 정규리그 3회 우승을 달성했다.
창업주 “시집가기 전엔 모두 내 딸” 애정
김연경을 월드 스타의 길로 이끈 해외 진출에도 구단의 ‘통 큰 양보’가 있었다. 원래 6시즌을 뛰어야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릴 수 있었지만 흥국생명은 ‘전력의 50%’인 김연경을 네 시즌이 끝난 뒤 일본 JT마블러스로 보내줬다. 이 과정에서 마블러스 측이 김연경 임대 수용 조건으로 반다이라 마모루 감독을 흥국생명 사령탑에 앉힐 것을 요구했다. 흥국생명은 이 조건도 수용해 2009년부터 3년간 마모루를 구단 최초의 외국인 감독으로 모셨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은 당시 “김연경이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경험을 쌓는 게 본인과 한국 배구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흥국생명은 김연경이 2020년 복귀할 때까지 그의 등번호(10번)를 임시 영구결번으로 비워뒀다. 이에 대해 김연경은 “회장님이 배려해 주신 덕분에 많은 걸 배우고 돌아왔다. 감사하고 올 시즌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김연경은 성적 보너스를 받으면 선수단 숙소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늘 선물을 하곤 했다. 그는 “배구단을 위해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작지만 감사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배구 여제는 마음 씀씀이도 월드 클래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