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잡을 쓰든 말든 내 맘대로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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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2.10.23. 오후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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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모나 헤이더

‘히자비’ 부른 시리아계 힙합 가수
“세상이 강요하는 기준에서 분리…
히잡 쓰는 건 내 선택”이라 노래해
주체적으로 택한 ‘패션’ 관한 논쟁
시리아계 힙합 가수 모나 헤이더는 “히잡을 쓰는 것은 나의 결정이며 나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모나 헤이더의 뮤직비디오 ‘도그’(Dog)의 한 장면. 뮤직비디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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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머리카락은 어떻게 생겼니? 넌 머리카락도 예쁠 거 같은데? 그러고 있으면 땀 차지 않아? 너무 갑갑하지 않아? 네 머리카락은 얼마나 길어? (그런 질문 하기 전에) 네 인생이나 챙겨. 넌 날 이국적으로만 바라보지. 계속 이빨만 까고 입술만 계속 놀리지. 네 입은 러닝머신처럼 돌고 돌지. 난 너의 이국적인 휴가지가 아니야. 난 계속 내 히잡을 두를 거야. 내 히잡을 두를 거야.”

2017년 미국 무슬림 여성 힙합 가수 모나 헤이더가 발표한 노래 ‘히자비’(Hijabi(Wrap My hijab))의 가사다. 스카프 형태로 머리, 귀, 목과 어깨를 가리는 히잡은 무슬림 여성의 전통적인 의복이다. 얼굴만 내놓는 차도르, 눈만 겨우 내놓는 니캅, 눈도 그물 형태의 천으로 가려야 하는 부르카와 비교하자면 비교적 자유로운 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세속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튀르키예(터키), 모로코에서는 히잡 착용이 의무는 아니다. 하지만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히잡 착용은 의무다. 그런데 당신이 서구 국가에 사는 무슬림 여성이라면?

히잡을 벗어던진 여성들


오랫동안 히잡은 논쟁의 영역이었다. 가장 논쟁이 강하게 벌어진 나라는 프랑스다. 프랑스는 이미 정교가 분리된 서구에서도 가장 공격적인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우는 국가다. 2004년 프랑스는 “공공 교육시설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종교적 상징물도 착용할 수 없다”며 히잡, 부르카를 공공 교육기관에서 금지했다. 이 정책이 무슬림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시크교의 전통적인 터번은 물론 유대교의 다윗의 별, 심지어 기독교의 십자가마저 금지됐다. 그러나 역시 가장 뜨겁게 불타오른 논쟁의 중심에는 히잡이 있었다.

프랑스의 열렬한 세속주의 정책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프랑스는 2011년 모든 공공장소에서의 부르카 착용을 금지했다. 2016년에는 이슬람식 수영복인 부르키니도 금지하려 했다. 당시 많은 프랑스 해변 휴양지는 부르키니를 입고 수영을 하다 경찰들에게 끌려 나가는 무슬림 여성들의 항변으로 가득했다. 당시의 나는 프랑스가 지나치게 결벽증적으로 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공공장소 부르카 착용 금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었다. 여성의 몸이 손톱만큼도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고 부르짖는 부르카는 나처럼 세속주의적인 인간에게는 확실히 여성 억압의 상징에 가까웠다. 하지만 부르키니를 입고 수영을 즐기려는 여성들을 굳이 경찰력을 동원해 끌어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 딜레마가 시작된다. 도대체 우리 서구(솔직히 말하자, 한국 역시 ‘명예 서구’다)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무슬림 여성들의 의복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 모든 무슬림 여성들이 히잡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무슬림 국가에 살면서도 히잡 등이 종교적 억압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미국에 사는 무슬림 여성을 몇 명 알고 있다. 그들은 히잡을 버리고 에이치앤엠(H&M)을 선택했다. 정말이지 멋진 커리어 우먼인 그들은 멋진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히잡은 억압의 상징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 아니 우리 역시 그렇게 생각해왔다. 1979년 이란 혁명 이전의 여성들과 이후의 여성들 사진을 비교하며 얼마나 여성 인권이 후퇴했는가를 이야기하는 글들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 몇년 동안 재미있는 변화가 일어났다. 많은 서구 무슬림 여성이 히잡이 여성을 억압하는 복식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선택한 패션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리버럴한 미국산 온라인 미디어 <허핑턴 포스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미국발 기사를 그대로 번역해서 실었다. 흥미롭게도 2010년대 후반부터 히잡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유니클로나, 에이치앤엠 같은 거대 패션회사들이 히잡을 생산했다. 히잡을 쓰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여성 선수가 등장했다. 히잡을 쓴 바비인형도 출시됐다. 미국 매체들은 히잡이 새로운 무슬림 여성들의 주체성을 대변하는 복식이라고 선언했다. 그 중심에 ‘히자비’를 부른 힙합 가수 모나 헤이더가 있었다.

모나 헤이더는 히잡 착용이 자신에게 ‘억압’이 아닌 ‘패션’이라고 노래했다. 모나 헤이더 페이스북, 뮤직비디오 ‘히자비’ 갈무리


‘히잡=억압’이란 생각에 어퍼컷


모나 헤이더는 1988년생 시리아계 미국인이다. 그의 부모님은 1971년 시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 일곱 자식을 키웠다. 모나 헤이더는 14살이 되던 해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의 많은 흑인 여성으로부터 백인 우월주의와 서구 문화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이용하라고 배웠고, 그걸 이른 나이에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는 2011년 미시간대학교를 졸업한 뒤 시리아로 건너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시리아 내전이 터졌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무슬림 여성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궁리했다. 결론은 음악이었다.

모나 헤이더의 첫 앨범인 <바바리칸>(Barbarican)은 2018년에 발매됐다. 특히 “계속 내 히잡을 두를 거야”라고 노래하는 첫번째 싱글 ‘히자비’는 곧바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인기를 모았다. 빌보드가 이 노래를 ‘역사상 최고의 페미니스트 송가 25’ 중 하나로 선정하자 모나 헤이더의 이름은 국제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국 <엔피아르>(NPR)는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비욘세의 <레모네이드>(Lemonade)와 비교했다. 흑인 인권운동가 맬컴 엑스의 “미국에서 가장 존중받지 못하는 부류는 흑인 여성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비욘세의 앨범은 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찬사이자 정치적 선언이다. 모나 헤이더의 앨범이 무슬림 여성의 정치적 선언이라는 점에서 둘의 비교는 정말이지 온당하다.

모나 헤이더는 여성 잡지 <글래머>와의 인터뷰에서 “히잡을 쓰는 것은 나의 결정이며 나의 선택이다. 세상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기준으로부터 나를 분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전에는 단 한번도 듣지 못한 무슬림 여성의 목소리였다. 히잡이 당연히 종교적 억압이라고만 생각하던 사람들을 향한 거대한 어퍼컷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모나 헤이더는 오랜 세속주의자이자 무신론자인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을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요즘 나는 다시 딜레마에 빠졌다. 지난 9월13일 스물두살의 이란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머리카락을 히잡으로 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경찰에 끌려간 뒤 사망했다. 이란 곳곳에서 경찰의 가혹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이어졌다.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은 목숨을 걸고 히잡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치렀다. 지금까지 100여명이 죽고 수천명이 체포됐다. 그럼에도 이미 타오른 불길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1979년 혁명 이후 이란에서 벌어진 가장 거대한 혁명이다.

얼마 전 프랑스 여성 셀레브리티들은 이란 시위에 동참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퍼포먼스 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자벨 아자니도 제인 버킨도 카트린 드뇌브도 동참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퍼포먼스에 가장 열을 올리는 나라가 프랑스라는 사실일 것이다. 무슬림 이민자들과 가장 강력한 문화적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국가다. 나는 여기서 1996년 출간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다시 떠올린다. 그는 이슬람의 인구 증가와 아시아의 경제 성장이 계속 이루어진다면 서구 문명과 다른 문명 사이의 갈등이 이데올로기 갈등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뮤얼 헌팅턴의 주장은 흥미롭게도 인터넷, 소셜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더욱 힘을 얻게 된 것처럼 보인다. 테헤란의 소녀도 서울의 소녀도 뉴욕의 소녀도 같은 소셜미디어를 본다. 같은 노래를 듣는다. 같은 드라마를 본다. 각각의 문명은 더는 고립될 수 없다. 고립될 수 없는 문명은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미국 힙합 가수는 히잡을 쓸 자유를 노래한다. 이란 여성은 히잡을 벗을 자유를 토로한다. 정교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프랑스의 세속주의는 스스로 히잡을 선택하겠다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억압일 것이다. 정교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이란의 이슬람주의는 히잡을 벗겠다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억압일 것이다. 둘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나 헤이더는 히잡 착용이 자신에게 ‘억압’이 아닌 ‘패션’이라고 노래했다. 모나 헤이더 페이스북, 뮤직비디오 ‘히자비’ 갈무리


쓸 자유와 벗을 자유의 충돌


물론 이란 여성들이 히잡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선택의 자유다. 그럼에도 결국 모든 것의 중심에는 히잡이 있다. 소셜미디어 시대는 다원주의의 시대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모두가 말한다. 그건 지나칠 정도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모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은 어떠한 옳고 그름의 경계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동일한 말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니 솔직하게 고백하자. 나의 내면은 지금 충돌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내면 역시 충돌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충돌의 시대에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경구는 어쩌면 하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돈 룩 업.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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