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계 비백인 배우 기용
‘담대·공정·용기·진실’ 강조한
현대적 각색에도 아쉬운 결과물
다양성 조롱하는 인종차별 관객이 더 문제
'위키드' 실사화의 감동적인 넘버와 '겨울왕국' 시리즈의 자매애로 뭉친 공주들을 맞이한 이후의 관객에게, 그저 원전을 실사화하는 데 전념한 2025년의 '백설공주'란 너무 시시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림형제의 동화보단 디즈니의 빈티지 애니메이션에 익숙할 대중을 겨냥한 '백설공주'는 의상도, 노래도, 가장 중요한 서사도 우왕좌왕하며 게으른 재현에 그치고 만다.
1998년부터 널리 읽힌 바바라 G.워커의 '흑설공주 이야기'는 현명한 왕비와 약탈자 남성을 그리며 소녀들에게 '누가 진짜 위험한 존재인지' 알리려 했고, 리베카 솔닛의 '해방자 신데렐라'는 궁궐에 입성하는 대신 베이커리를 차리는 신데렐라와 왕자를 그리며 소녀들이 참고할 만한 혁명을 고안한다. 그러나 여전히 왕정과 로맨스에 집착하는 디즈니의 '백설공주'는 앞선 동화들을 반도 따라가지 못한다. 왕자 대신 평민 출신 도적 우두머리를 내세운 건 '라푼젤' 플린 라이더의 인기를 다분히 의식한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신분이야 어찌 됐든 어리고 무력한 공주를 구하는 남성 연인의 등장만으로 똑똑한 각색에 대한 기대감은 식기 마련이다.
허점 많은 내러티브를 메우기 위해 디즈니가 강조한 것은 '담대함, 공정, 용기, 진실'이란 가치다. 한 치의 비유도 없이 반복 기입되는 키워드들은 코뮌을 연상케 하는 성실한 노동과 공정한 분배를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나 결론적으론 타깃 관객을 잘못 조준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아직 사회의 환부를 모르는 어린이들에겐 아무리 명확한 메시지인들 깊이 다가올 리 없고, 어른들에겐 메시지가 간명하게 전달될수록 유치하게 느껴지는 딜레마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제안은 영화라는 매체에서 그 어떤 정치적 메시지도 기대하지 않는 관객들로부터 비난받기 좋기에 별로 영리하지 못한 선택이다.
능숙하지 않더라도 '백설공주'는 극 중반의 '공주적 사고'를 경유해 현대 사회로의 이식을 노린다. 가난한 극단 배우였다가 여왕의 악독한 경제정책 탓으로 실직하고 도적이 됐다는 조연 남성 조나단은 여전히 서로 나누고 돌보기를 소망하는 백설공주를 지나치게 순진한 몽상가라며 꼬집는다. 여왕이 마련한 적자생존의 세계가 현대 자본주의 헤게모니의 도덕적 위기를 가리킬 때, 조나단은 윤리를 포기하고 이기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궁지에 내몰린 빈자를 상징한다. 그렇기에 조나단은 '가질 것 다 가진' 엘리트 여성인 백설공주가 이야기하는 원론적 연대가 마뜩잖을 수밖에 없다. 소유를 포기하지도, 실질적 개선책을 마련하지도 못한다는 세간의 오해가 함축된 '공주적 사고' 넘버를 뒤로 하고 백설공주는 타자를 정성스레 호명하는 정석의 해법으로 나아간다. 왕궁 병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그들의 지난 삶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리며, 배부르고 철없는 지도자가 아니라 동료 시민이 되어 다가가는 것이다.
미약하고 서툴지만 '백설공주'의 첫걸음을 감싸주고 싶은 건 영화 바깥에서 라틴계 배우 레이첼 지글러 개인이 감내해야 했던 극심한 조롱을 알기 때문이다. 하얗고 어여쁜 공주를 보여주지 않았으니 제 '동심'을 훼손한다며 신나게 비난한 사람 중 서사의 설득력이나 미래 세대를 위한 상상력을 진정으로 우려했던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PC가 망친' 동화가 두렵고 싫어서 새 시대의 가치에도 조응하지 못하고 차별적 발화의 책임도 지지 않는 어른으로 남겠다는 선언이 과연 '동심'에 충실한 선택일까. 지나치게 단일한 국가의 주류 인종으로, 여성에게만 가혹한 코르셋에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으로, 영원히 뒤처진 채 비백인 여성의 외모를 소란스레 집단 린치하는 모습이야말로 후세대의 동심을 침해하는 나쁜 예다.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니까 주연 배우가 예뻐야 한다는 말이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아이들도 예쁜 사람은 알아보고 좋아한다'는 건 실상 검증되지 않은 구전의 가설에 가깝다. 인간이라면 응당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어차피 모든 미학은 사회적이다. 리베카 솔닛은 '해방자 신데렐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란 있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아름다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거든. 어떤 사람은 둥글고 부드러운 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날카로운 선과 단단한 근육을 좋아하니까. (…) 사람은 많고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도 저마다 달라서 다 이야기하기도 힘드네."
어떤 이들에겐 레이첼 지글러의 백설공주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고, 그리고 사실 별로 아름다울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예쁜 공주의 상실로 말미암아 현재의 배우를 공격하고 싶어지는 그런 동심이라면 이미 썩은 지 오래이니 놓아줄 때가 된 거라고 말하고 싶다.
애초에 디즈니와 그림 동화의 '원전'마저 유럽 지역 민간 설화를 적절히 취사선택한 것에 불과하고, 제1세계 영화 산업도 전 세계 신화와 동화를 그러모아 적극적 전유와 변용을 시도한 지 오래다. 북유럽 신들이 모인 아스가르드에 있을 리 없는 흑인과 동양인 신을 보여주고, 메소포타미아 고대 설화 속 길가메시 역에 한국 배우 마동석을 캐스팅하는 마블의 수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국경과 인종과 미추에 구애받지 않는 새 시대의 어린이들을 고려하며 만들어진 '백설공주'는 충분히 좋은 교보재가 되어줄 수 있다.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그런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