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을 만들다

맨해튼 프로젝트

물리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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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을 만드는 프로젝트는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암호명으로 불려졌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물론 나치를 피해 미국에 와있던 유럽의 과학자들과 동맹국인 영국과 캐나다를 대표하는 과학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그들을 뉴멕시코 주의 생그레 드 크리스토 산중에 있는 로스앨러모스(Los Alamos, 로스 알라모스)에 새롭게 세워진 연구소에서 연구하도록 했다. 로스앨러모스는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로 외부와 격리되어 있는 산중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어서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1 원자폭탄을 만드는 비밀 프로젝트, 맨해튼 프로젝트

최초의 원자폭탄의 폭발 장면.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로스앨러모스에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과학자들이 모여 들었다. 앤더슨, 베테, 보어, 페르미, 파인만, 프리쉬, 파이얼, 라비, 세그레, 스릴라드, 텔러, 울람, 바이스코프, 휠러, 위그너, 폰 노이만 등 중요한 물리학자나 수학자들만 해도 백 명이 넘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당시 이미 노벨상을 받았거나 후에 받은 사람들이었다.

로스앨러모스에는 초록색으로 칠해진 급조된 건물들이 지어졌다. 이 건물들은 숙소와 실험실로 사용되었다. 환경은 열악했다. 포장되지 않은 길은 진흙투성이였고 난방을 위해서는 석탄이 제공되었다. 철조망과 담이 이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곳에 온 과학자, 수학자, 공학자, 기술자 그리고 그들의 조수들은 암호명을 받았고 가족을 포함한 아무에게도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들은 열심히 일했다. 그들은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만들기 전에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던 과학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던 이들에게 나치가 먼저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동기와 목표가 확실했다.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원자폭탄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할 여유가 없었다.

2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오펜하이머

맨해튼 계획의 연구책임자 오펜하이머.
(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

맨해튼 프로젝트의 연구 책임자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화학(전공)과 물리학을 공부했고, 케임브리지에서 J. J. 톰슨과 함께 연구했으며, 코펜하겐에서 보어와 함께 연구했고, 괴팅겐에서는 막스 본과 함께 연구하기도 했었다. 로스앨러모스에 오기 전에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과 파사데나에 있는 칼텍에서 이론물리학 분야 연구팀을 이끌던 사람이었다.

오펜하이머와 함께 로스앨러모스에서 연구했던 과학자들은 그가 소장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 그는 거만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좌익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과학연구개발부 소관으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의 연구비는 고작 6,000달러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미군의 레슬리 R. 그로브 준장이 책임자가 되었고 모든 연구 프로젝트 중 최우선적인 프로젝트가 되었다.

오펜하이머를 과학 분야 연구책임자로 선발한 것은 그로브였다. 이 프로젝트의 연구비는 20억 달러로 늘어났고 가장 많을 때는 고용인원이 13만 명이나 되었다. 세계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돈과 두뇌가 과학 프로젝트에 집중된 예는 없었다.

3 원자폭탄의 원료는 우라늄235와 플루토늄

로스앨러모스에서는 연구만 진행되었다. 실제로 원자 폭탄을 만드는 일은 미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다른 시설에서 진행되었다. 테네시의 오크리지에는 천연 우라늄으로부터 원자폭탄의 원료로 사용되는 우라늄235를 분리해 내는 시설이 만들어졌다.

우라늄238과 우라늄235는 원자핵에 포함되어 있는 양성자의 수는 같지만 중성자의 수가 세 개 다른 동위원소이다. 화학적 성질이 같은 동위원소는 화학적 방법으로 분리해 낼 수는 없기 때문에 두 원소의 작은 질량 차이를 이용하여 분리해 내는 물리적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질량이 약간 차이가 나는 동위원소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자기장 안에서 원자를 회전시킬 때 작은 질량 차이로 인해 동위원소들이 약간 다른 원 궤도를 돌게 되는 것을 이용했다. 그러나 동위원소의 분리는 이론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학자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크리지에는 우라늄235를 분리해내기 위한 거대한 전기시설을 갖춘 실험실이 만들어졌다. 34,000명의 노동자가 우라늄238로부터 우라늄235를 추출해 내는 작업에 참여했다. 오크리지에서는 일주일 동안 작은 가방에 넣어서 옮길 수 있을 정도의 우라늄235를 분리해냈다.

과학자들은 우라늄235를 분리하는 동안에 또 다른 원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라늄235가 분열할 때 나오는 중성자 중의 일부가 우라늄238에 흡수되어 우라늄238이 플루토늄239로 변환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라늄238을 이용하여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일은 워싱턴주에 있는 한포드에서 진행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우라늄235를 이용한 폭탄과 플루토늄을 이용한 폭탄을 동시에 만들어갔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원자폭탄의 구조. 원료를 2개로 나누어 두었다가 합치는 단순한 형태와 원료를 사방에서 압축하는 발전된 형태가 있다.
전자는 우라늄235폭탄에, 후자는 플루토늄 폭탄에 적용되었다. <출처: (CC) Dake at wikipedia / Fastfission at Wikipedia>

4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이 사용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로스앨러모스에 모인 과학자들이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는 동안 유럽에서 독일은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4월 30일에는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자살했고, 5월 8일 독일의 패배로 유럽에서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원자폭탄을 만들고 있던 과학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해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인류를 파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자들 중에는 원자폭탄과 같은 강력한 폭탄은 그 존재만으로도 전쟁을 억제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6월에 스릴라드(Leó Szilárd, 1898~1964)는 트루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그것은 일본에게 공개적으로 항복을 요구하고 일본이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였다.

스릴라드의 청원서에는 150명이 넘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서명했다. 이 청원서는 원자폭탄이 실제로 사용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7월 16일 5시 30분에 로스앨러모스에서 남쪽으로 34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알라모고도에서 원자폭탄 폭발 실험이 실시되었다. 기술자들이 30미터 높이의 강철로 된 탑을 세우고 그 위에 “baby” 라고 부르던 플루토늄 폭탄을 얹어놓았다. 드디어 최초의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강철 탑은 몇 개의 녹다 만 금속자국을 남기고 증발해 버렸고 아스팔트는 비취처럼 초록색의 유리재로 변했다. 과학자들은 5,000톤의 TNT와 맞먹는 폭발을 기대했었지만 실제 폭발의 위력은 20,000톤의 TNT에 해당했다.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영상, 영상에 나오는 버섯구름의 높이는 12Km에 달한다.


두 주일 후 원자폭탄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에는 우라늄235로 만들어진 폭탄이 투하되었고, 나가사키에는 플루토늄 폭탄이 투하되었다. 폭탄이 투하되고 난 후 로스앨러모스에는 칭찬과 축하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했고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5 원자폭탄은 완성된 순간 과학자의 통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오래지않아 과학자, 정치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원자폭탄의 엄청난 파괴력에 대해서 심각하게 우려하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에서 7만 명이 순간적으로 목숨을 잃었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화상과 방사능 질병으로 천천히 죽어갔다.

한 달 후에 로스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을 연구했던 물리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필립 모리슨이 히로시마 상공을 비행하면서 히로시마를 관측했다. 그가 본 것은 한 대의 비행기와 한 개의 폭탄이 만들어낸 폐허였다. 30만 명이 살고 있던 도시가 순식간에 폐허로 바뀐 것이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한 일이 과연 성공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폭탄이 지구상의 생명을 파괴할 가능성을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 후 많은 로스앨러모스 과학자들은 핵에너지를 평화적인 목적에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인슈타인은 그가 만약 루즈벨트에게 보낸 그의 편지가 이런 결과를 가져올지 알았었더라면 그 편지에 서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만든 원자폭탄은 만들어지는 순간 이미 과학자들의 통제 밖으로 빠져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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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일2010.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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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영직 수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터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수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이다. 저서로는 [과학이야기], [자연과학의 역사], [원자보다 작은 세계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