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76. 근본(根本) 없는 생명체 있으랴, 뿌리(Root)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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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자세(칸다 아사나·kanda asana)는 앉은 자세에서 양 발바닥을 뒤집듯이 한껏 당겨서 몸통 쪽으로 향하게 하고, 양 무릎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무릎, 발목 관절과 엉덩이 쪽 근육의 경직을 완화해 주며 복부를 자극해 소화력을 증진하는 효과가 있다. 시연 최진태.


지금 한 ‘인간’으로서 나를 존재하게 한, 하지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뿌리(root·根)’를 생각해 본다.

인간의 삶에는 ‘생명체로서의 살아 있음과 주체로서 살아감’이 어우러져 있다. 라틴어로 휴먼(human·인간)과 휴물리스(humilis·낮다)의 어원은 휴무스(humus·땅)라고 한다. 이것은 삶의 뿌리에 생명을 이어 가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자연 교감이 땅에 씨를 뿌리고 먹거리를 거두는 행위임을 알려준다.

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지금까지의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것, 앞으로 존재하게 해 주는 것’ 아닐까? 어떤 결과를 초래한 직간접적인 원인을 뛰어넘어 아주 구체적이고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면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의미 말이다.

뿌리가 없는 것이 있을까?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물이든 생물이든 뿌리가 없는 것은 없다.

138억 년 전 빅뱅은 우주, 우리 은하계, 태양계 생성의 근본 원인이고 미래의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그 비밀의 문을 열어 당면한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려고 끊임없이 연구한다. 이것은 과학적 난제를 해결하려는 직업적 소명임과 동시에 인류를 포함해 모든 존재의 뿌리를 알고자 하는 본능적 탐구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2022.8.5) 대한민국의 첫 번째 달 탐사선인 다누리(KPLO)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인도 유럽에 이어 7번째 달 탐사국 대열에 오른 것이다. 명실상부한 세계 7대 우주 강국의 위상을 굳힌 이런 쾌거 역시 존재의 뿌리를 알고자 하는 본능적 탐구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1976년 미국 흑인 작가 알렉스 헤일리는 ‘뿌리(Roots)’라는 소설을 통해 자신의 뿌리 찾기를 시도한 결과 잠비아에 사는 만딩카족의 존경받는 킨테 부족의 일원인 7대조 조상 쿤타킨테를 찾게 된다. 소설 뿌리는 이듬해 ABC방송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미국 전역에 방영되었고, 세계 각국에서도 수입 방영되었다. 이 뿌리 드라마로 인하여 당시 흑인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찾는 열풍이 일어났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작가는 이 소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는 식물의 뿌리를 ‘살아 있는 죽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죽은 듯 지내지만, 식물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기반임을 가리키는 데 더없이 적격인 표현이다. 그러나 이 나무뿌리는 평소에 제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건 식물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신비롭게 느껴지는 게 뿌리가 아닌가 싶다.

뿌리는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가치다. 누구든 어떤 생물도 근본이 없이 생겨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속담에 “뿌리가 다르면 줄기가 다르고 줄기가 다르면 가지가 다르다”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 뿌리가 기본이고 그에 따라 모든 현상과 결과가 달라짐을 말하는 것이다.

산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산길을 가다가 드러난 뿌리를 왕왕 밟고 지나가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뿌리를 주의 깊게 잘 관찰하지는 않는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비바람에 흙이 씻겨 밖으로 드러난 나무의 뿌리를 조금만 관심을 갖고 관찰한다면 놀라운 생존의 비결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통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 뿌리의 말을,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푸른 생명의 말을 들을 수 있을지니. 나무는 자신이 처한 환경과 조건에 따라 아주 정교하게 뿌리를 뻗어 가면서, 위기에 대처하면서 생존을 이어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무의 뿌리는 땅속의 영양분을 줄기로 옮기는 기초 작업인 동시에 균형 잡힌 삶을 위한 필사 노력의 결과물인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며, 나무는 넘어지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 뼘이라도 더 태양을 향해 손을 뻗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캄캄한 어둠 끝까지 달려가는 모습,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더라도 죽을힘을 다해 기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 지상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지하에서 중심점을 찾아 온몸으로 떠받치려 하는 처절한 몸부림, 땅속 어둠 속에서 애써 희망의 등불을 밝히고 절망을 견뎌간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기꺼이 고통이 되고 눈물이 되고, 세상을 밝히는 한 자루의 촛불이 되는 삶을 사는 성자(聖者)의 일생과도 같은 궤적을 뿌리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오랜 세월 견딘 고목의 뿌리를 보노라면, 툭툭 갈라지고 찢기고 비틀어지고 잘려 나간 늘 푸른 노송의 뿌리를 대하노라면, 문득 주름지고 깊게 팬 이 땅의 아버지들의 손등을 보는 듯하다.

텁텁한 탁배기 한 사발 들이켜고 구부정한 등을 뒤로한 채, 눈가 한번 쓱 닦고 하늘 한번 우러르며 자식들 앞에선 애써 미소 짓던 그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름을 어이하랴.

여기서 뿌리라고 하면 제일 먼저 식물의 뿌리가 연상된다. 뿌리가 하는 일은 식물을 튼튼하게 고정시켜 주는 지지 작용과 흙 속에 녹아 있는 물과 양분을 빨아들이는 일을 하는 흡수작용, 당근 무 고구마처럼 뿌리에 양분을 저장해 두는 것을 저장뿌리라 하는데 이처럼 저장작용을 하기도 한다. 산소를 받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방출시키는 호흡작용도 한다.

뿌리의 종류별로는 다른 식물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뿌리털 없이도 물과 양분을 받아들이는 겨우살이나 새삼 뿌리를 기생뿌리라고 하며, 뿌리의 지탱 능력을 돕기 위해 줄기에서 뿌리가 땅 위로 나와 넓게 뻗어 있는 옥수수나 수수의 부리를 버팀뿌리라고 한다.

물속에 늘어진 뿌리로 물과 양분을 흡수하고 몸이 뒤집히지 않게 하는 개구리밥이나 생이가래 부레옥잠 등은 수중뿌리이다.

나무나 돌 같은 다른 물체에 뿌리를 붙이고 자기 몸을 지탱하는 담쟁이덩굴, 송악 같은 붙음뿌리도 있다. 주로 늪이나 산속에 사는 식물의 뿌리로, 뿌리가 숨을 쉬기 위해 땅 위로 올라와 자라는 맹그로브나 벵골보리수 같은 호흡뿌리도 있다.

뿌리가 자라는 길이는 식물의 종류, 흙의 성분, 온도, 습도 등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자라는 식물은 물을 찾아 뿌리가 길게 자라는데, 뿌리 길이가 50m가 넘는 사막식물도 있을 정도이다. 길고 튼튼한 뿌리를 가진 식물일수록 건강한 식물체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줄기에서 다시 뿌리로 내리는 반얀나무가 있다. 이 뿌리는 기근(氣根)이라 불리는 변형된 뿌리의 한 형태이다. 줄기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반얀나무의 특성으로 인해 한 나무가 1.5km 넓이로 자라기도 한다.

인도 동부 캘커타 인근에서 자라는 한 반얀나무는 둘레가 500m에 달하고, 줄기가 25m 높이까지 성장한다. 멀리서 보면 숲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한 뿌리를 지니고 있는 한 그루의 반얀나무이다.

열대지역에 서식하는 야자수의 일종인 ‘워킹 팜(walking farm)’은 아주 천천히 걸어서 움직인다. 이 식물이 이동할 수 있는 까닭은 새로운 뿌리가 자란 후에 기존에 있던 뿌리를 스스로 없애는 변형뿌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 후 처음으로 글을 짓게 했는데 그게 바로 용비어천가이다. 조선을 건국한 6대조의 업적을 찬양한 내용으로 여기에 나오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의 구절이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매사에 불여튼튼, 기초·기본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음악 미술 등 예능 분야는 물론이고 문학 및 각종 스포츠, 학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김진섭의 수필 ‘모송론(母頌論)’에서 ‘어머니는 자녀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말과 최초의 지식, 도덕 등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우리의 뿌리이자 고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의 모든 여성은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성한 존재 그 이상이란 말에 힘이 실린다.

대전 중구에는 1997년에 문을 연 뿌리공원도 있다. 씨족의 유래와 역사를 주제로 꾸며져 있다. 조상의 뿌리를 기리고 찾는다는 의미에서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공원으로 일컬어질 정도이다.

세간에선 흔히 ‘근본(根本)이 있다, 없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근본이란 뜻 그대로 뿌리가 있는 나무라는 뜻인바 근본이 있는 집안이나 사람을, 또한 그 사람의 자라온 환경이나 혈통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뿌리가 들어간 말씀들이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디모데 전서 6:10)

돈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탐욕에 대한 경계 말씀이렷다.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요, 고요함은 조급함의 주인이다.” ‘중위경근 정위조군(重爲輕根 靜爲躁君)’, 가벼우면 근본을 잃을 것이고, 조급하면 주인을 잃을 것이다.(노자의 도덕경 제26장)

서양에서는 찔레나무 뿌리로 담배 파이프를 만들었다. 최고급 남성용 담배 파이프의 대명사인 던힐의 창업주 엘프리드 던힐이 런던 듀크가에 담배 가게를 열면서 만든 것이 바로 찔레나무 뿌리로 아름답게 수가공한 파이프였다.

차(茶)나무가 한 번 뿌리 내린 곳에서 옮기면 잘 살지 못하는 성정을 표방하여, 시집가는 집안에 뿌리를 내리라는 뜻과 아들을 낳고 차 씨앗처럼 자손을 많이 퍼트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어서 예전에는 딸을 시집보낼 때 차 씨를 함께 보내는 풍속도 있었다.

‘칸다 아사나(kanda asana)’ 즉 ‘뿌리 자세’는 앉은 자세에서 양 발바닥을 뒤집듯이 한껏 당겨서 몸통 쪽으로 향하게 하는데, 이때 양 무릎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칸다(kanda)는 뿌리, 구근, 결절을 의미한다. 육체 내에 잠자고 있는 에너지 쿤달리니는 이곳 칸다나 나디(기의 통로)에 깃들어 있다고 한다. 이 자세는 무릎, 발목 관절과 엉덩이 쪽 근육의 경직을 완화시켜 주며 복부를 자극해 소화력을 증진시키는 효과도 있다. 특히 이 자세는 성(性) 에너지를 회복하는 동시에 성적 욕망을 제어하는 브라마차리아에 접근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씨앗이 떨어진 그 자리가 바로 우주의 중심이자 생존의 터전이다.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의 자리인 것이다. 아무리 거칠고 척박한 땅일지라도 설사 그 자리가 바위일지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존하기 위해서는 뿌리를 내려야 한다. 단단한 바위 속일지라도 사력을 다해 파고 들어가서, 밀고 나아가서 생존점을 찾아야 한다. 주어진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고난과 절망 속에서 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할 때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라 했다. 언젠가 꽃피우고 열매 맺는 날도 오지 않겠는가. 비록 탐스러운 꽃이 아니더라도 ‘듬실듬실’한 열매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으라차차 /최진태] 생명의 불꽃/활화산 같이 타올라 바위도 쪼갠다/견디고 버텨온 인고의 세월/‘파멸 당할 수도 그러나 패배는 안돼’*/두 주먹 불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중 산티아고 노인의 독백.(사진은 부산 금강공원 안에 서 있는 ‘바위를 뚫고 자란 소나무’)


첨부된 사진과 같이 부산 금강공원 내에는 바위를 뚫고 아예 바위까지 쪼개며 뿌리를 내린 후 푸른 기상을 내뿜고 있는 ‘바위를 뚫고 자란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그 소나무 앞에 서면 숙연하다 못해 경건해진다.

그 삶의 실존 현장 앞에서 다른 것은 사치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필자는 힘들고 지칠 때 삶의 무게가 짓누를 때, 이 소나무를 찾는다. 그 기상을 온몸으로 받들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소나무 앞에 선다.

이처럼 바위가 틈새를 내어주는 것은 빛과 꽃을 품고 있는 뿌리의 간절하면서도 처절하기까지 한 기도와 염원에 움직였기 때문이리라.

고래 힘줄보다 질긴 생명의 힘과 생존의 거룩함이 바위를 뚫었도다. 홍진영이 부른 ‘산다는 건’ 유행가 가사가 떠올려진다. “산다는 건 다 그런 거래요/힘들고 아픈 날도 많지만/산다는 건 참 좋은 거래요/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세상엔 보이지 않게 희망을 떠받치기 위해 고통을 즐거이 감수하는 나무뿌리와 같은 사람들도 많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런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균형과 조화의 미를 갖게 되나 보다.

요가에서 추구하는 가장 큰 덕목 역시 균형(밸런스·balance)과 조화(하모니·harmony) 아니던가.

화려하지도 시끌벅적하지도 않지만 그저 덤덤하게, 맡겨진 그 자리에서 제 소임과 역할을 다하고 있는 민초들의 삶 역시 이런 뿌리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뿌리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 싶다.

사람의 일생엔 행복한 나날만이 있는 게 아니다. 안정과 평안은 무수한 위기와 혼란, 좌절과 번뇌 속에서 삶의 뿌리가 단단해진 덕분에 얻어진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싱그러운 녹음, 아름다운 꽃·햇빛에 빛나는 열매는, 보이지 않는 뿌리의 고통과 어둠이 키워낸 눈물의 성취물임을 한시라도 잊어선 안 되겠다. 정안수 앞에 두고 새벽이슬 맞으며 아들딸 잘되라고 기도드리는 어머님들이 떠올려진다.

뿌리는 어떻게 될지 정해지진 않았지만, 그 무엇을 향한 첫 움직임에서 뻗어 나온다. 오랜 시간이 지나 알기 어렵다고 해서 가볍게 지나칠 것은 아니다. 뿌리를 모르고서 지금과 여기를(now&here) 말할 수 없고 미래를 향한 돛을 올릴 수 없다. 그러므로 나와 우리를 키워낸 뿌리를 찾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얼마 후면 가을 추수가 시작되고 햅쌀과 햇과일로 조상들께 감사의 마음으로 차례를 올리는 한가위, 중추절(仲秋節)이라고 일컫는 추석이 온다. 서양의 명절과 다른 점은 단순히 먹고 즐기는 축제가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다하여 후손이 경건하게 조상의 뿌리를 되새기는 날이라는 점이다.

꼰대의 소리라 하겠고 고리타분한 말이라고도 하겠으나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결혼의 문턱에 섰을 때 아직도 여전히 서로의 가문을 들여다보게 되고, 서로의 부모나 형제 친척 심지어 선조들까지 짚어보게 됨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런 후손들에게 존경받고 자랑스럽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모습만이라도, 맹자가 말한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잃지 않고, 거창하게는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정신이 번쩍 나면서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

오늘 뿌리 깊은 나무 즉 근본이 있는 인간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는 것은 순전히 ‘칸다 아사나(kanda asana·뿌리 자세)’ 덕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뿌리는 무엇일까? 앞에서 기술한 가족의, 가문의 족보 같은 뿌리도 중요하겠지만 내게 평온함과 평상심을 가져다주는, 내가 세파에 흔들거리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할 때, 모든 걸 내려놓고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다시 우뚝 서게 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그러한 곳을 향하는 내 마음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그 뿌리는 누구에게 있을까? 그 뿌리는 어느 기억 속에 있을까? 그 뿌리는 고전의 어느 한 구절 속에 있을까? 어느 말씀 속에 있을까?

어느 절대자에게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순간에도 절대적 신뢰를 주고받는 단 한 사람만이라도 옆에 있다면, 평생지기가 있다면, 그것이 부모 자식 사이든 부부 사이든 연인 사이든 사제 간이든 친구 사이든 그런 내 마음의 뿌리 하나 단단히 잡고 있다면, 그런 나를 받쳐주는 뿌리 하나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 아닐까?

그것이 우주에서 지구별로 던져진 하이덱거가 말한 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 존재의 최대의 행운이며 축복일 것 같다.

그러나 바라지만 말고 기대하지만 말고 나 스스로가 그렇게 되어 보는 것은 어떠할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비록 허상일지라도 그러한 모습을 꿈꾸는 모습이 사뭇 아름답지 않은가?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아름답다 했거늘.

뿌리는 근본이다. 근본은 삶을 지탱하는 핵심이라 할 수도 있다. 생명의 뿌리(root), 마음의 뿌리(root)를 생각하면 이렇듯 사유와 성찰이 한없이 확장되고 더 깊어짐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까지 우주의 뿌리(root)까지 우리의 본성(本性)이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키싸스(quizas) 키싸스(quizas) 키싸스(quizas).”

[칸다 아사나(뿌리 자세)/ 최진태]

뿌리없는 생명체가 이 세상에 있을소냐/사물이든 생물이든 그것이 우주 섭리/근본을 기억한다는 그 자체가 삶의 통찰

삶의 중심 잡기위해 고통과 아픔까지/온 몸에 상흔조차 생존의 동력이다/젖먹던 안간힘까지 쏟아부은 결과물들

넘어지지 않으려고 생존하기 위해설랑/한 순간도 방심하면 아니된다 되새겼지/이렇듯 치열한 삶을 살은 흔적 담겨있다

눈물을 되삼키며 절망을 견디었다/땅속이며 어둠속에서 희망 등불 밝히면서/한송이 꽃을 피우려 온 몸 바쳐 걸어온 길

안정과 평안일랑 거저되지 않았구려/삶의 뿌리 단단해진 그 덕분에 얻은 결과/잊지마오 뿌리는 근본 모든 사물 핵심인걸

아름다운 저 꽃이며 튼실한 열매보라/진통과 위기 속에 키워낸 성취물들/한시라도 잊지마소서 그 노고를 치하하오

갈라지고 찢겨진 채 비틀리고 잘려나간/노송의 뿌리보면 울퉁불퉁 깊게 패인/이 세상 아버지들의 주름진 손등 생각

정안수 앞에 두고 새벽이슬 맞으면서/아들 딸 잘되라고 두 손 모은 어머님들/날 키운 팔할의 힘은 보이지 않는 저 손였군

거슬러 올라간다 뿌리를 사유하면/생명의 근원이며 우주의 본질까지/근본있는 인간이로세 예사롭지 않은 말

양 발을 잡아당겨 가슴에 부쳐본다/생각보다 쉽지 않네 예상외로 힘들다네/그래도 시도해본다 흉내라도 내어본다

바닥에 무릎부쳐 양 발바닥 가슴향해/발목과 무릎관절 자극에 만족한다/거창하게 브라마차리아 달성까진 언감생심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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