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할 권한과 쓰지 않을 권한[취재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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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컷 취재를 하고 기사 작성이 망설여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접근 가능한 것이 표면적 사실관계일 뿐, 진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특히 사안에 얽힌 당사자가 사망한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관계자들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자’고 나서는 것조차 부담이 됩니다. 이른바 ‘<검정고무신> 사태’ 취재가 그러했습니다.

김찬호 기자
사실 취재하는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당사자들이 사안에 대해 이미 충분히 설명을 해뒀을 때입니다. 그대로 옮겨적기만 하면 됩니다. 문제는 <검정고무신> 사태에서는 피해를 호소한 고 이우영 작가 측 입장 외에 부당하게 저작권을 강탈했다고 지목된 형설출판그룹의 입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남들처럼 정보를 공개하는 쪽의 입장만으로 기사를 쓸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 경우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작가가 속은 것이고, 회사는 어떤 근거로 정당함을 주장하는지 등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가치 판단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 불편한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과정을 복기하는 것은 <검정고무신> 사태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언론의 취재 행태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형설출판그룹 관계자와 인터뷰를 마치며 한가지가 더 궁금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꽤 시간이 흘렀고, 취재요청을 처음 받은 것도 아닐 듯한데 왜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이 관계자는 “지금껏 유명 언론사 전화를 많이 받았고, 그중에는 직접 만난 곳도 있다”며 “몇 시간을 들여 설명을 해도 오해할 수 있는 말 한마디만 잘라서 보도하더라. 애초에 이해도 잘 못 하는 것 같았다”라고 했습니다.

형설출판그룹 측과 접촉한 언론사들은 진실을 꿰뚫어 본 ‘정의의 사도’로서 심판을 하기 위해 만났던 것일까요. 일주일을 취재했지만, 진실은 모르겠습니다. 예단이 있더라도 판단은 법원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언론은 첨예하게 맞붙은 주장을 공평하게 보도할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제도가 개선될 것입니다. 검찰의 ‘기소하지 않을 권한’처럼 ‘쓰지 않을 권한’을 누리는 언론은 누가 비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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