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81. ‘나비’라는 뜻의 빠삐용(papillon) 영화를 떠올리게 되는, 나비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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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앉아 발뒤꿈치를 회음 근처로 가져가서, 발을 잡고 양 무릎이 마루에 닿을 때까지 넓적다리를 벌린 채 두 발바닥을 마주 붙인다. 양손으로 양발을 잡고 허리는 곧추세운 후 상체를 앞으로 천천히 숙인다. 가슴과 턱이 바닥에 닿도록 한다. 나비 자세는 비뚤어진 골반을 바로잡는 데 도움을 주며, 요통과 생리통을 완화해 준다. 시연 황은주.


중국 송나라 사상가였던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서부터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의 ‘나비효과’에 이르기까지, 나비는 문화 예술은 물론이고 철학 과학 등 거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우리 인간에게 다양한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 오고 있다.

색소 없이도 곱고 예쁜 색깔을 내는 나비 날개의 나노(nano) 구조를 응용해 독성 안료가 안 들어간 페인트를 만드는 연구와 나비 모양의 스파이 로봇 개발 등도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패션, 디자인, 수영(버터플라이) 등의 분야에서도 나비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고 있으며 연주자들이나 TV 시사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나비넥타이를 매는 것을 보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다.

겨울 지나고 봄이 다가오면 아름다운 자태로 맨 처음 나타나 할금할금 거리며 봄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 바로 나비다.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사이좋게 산과 들을 날아다니며 수놓는 배추흰나비와 노랑나비 등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종류다. 이 녀석들은 마치 시골 처녀처럼 수수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런 탓에 사람들로부터 은근히 홀대를 받곤 한다.

배추흰나비는 애벌레 시대에는 배추를 먹고 자라 배추벌레라고도 부른다. 반면 노란 저고리에 검정 끝동을 단 듯이 보이는 노랑나비는 얌전한 외모와는 달리 행동이 민첩하고 활발하다. 이 둘은 농부들에게는 봄이 찾아왔음을 알리고, 가을에는 추수를 재촉한다. 대표적인 자연의 단짝들 모습이다.

배추흰나비를 닮은 기생나비도 예쁘다. 깨끗한 외양에 청초한 표정을 지으며 날아다니기에 그렇게 부른다.

김흥국이 부른 호랑나비 노래 가사 ‘아싸, 호랑나비’의 몸짓이 먼저 떠오르는 아름다운 호랑나비도 우리나라에 널리 분포되어 살고 있다.

호랑나비의 한 종류인 청띠제비나비는 추운 지방에는 잘 살지 않는다. 울릉도나 제주도 남해안 일대의 따뜻한 곳에서만 산다.

풍류객처럼 도포 자락 펄럭거리며 날아다니는 호랑나비과의 꼬리명주나비도 무시할 수 없는 미모의 소유자다.

왕붉은점모시나비는 호랑나비과의 모시나비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고산의 청정지대에만 산다. 우리나라 고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나비라 할 수 있다. 특히 날개가 세모시처럼 시원한 멋을 지녔기에 ‘신접(神蝶)’ 즉 ‘신의 나비’라 일컫기도 한단다.

이 밖에도 최고의 멋쟁이인 큰멋쟁이나비, 긴꼬리제비나비, 검은표범나비, 청띠신선나비, 은판나비, 뿔나비, 부전나비 등 나비 종류도 많다.

나비와 나방은 모두 같은 나비류의 곤충인데 앞날개에 태극무늬가 선명한 태극나방도 있다.

북한에서는 나방이라는 단어가 따로 없으며, 나방을 밤나비, 나비를 낮나비라 부른다.

나비는 뚜렷한 대칭의 몸과 아름다운 무늬의 날개로 사뿐사뿐 가볍게 난다. 나비를 의미하는 접(蝶) 자의 모습이 잎사귀를 의미하는 엽(葉) 자와 비슷한 것도 나비의 가볍고 날씬함을 연상케 해준다.

“나비가 날기 위해서는 종류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나비의 체온이 섭씨 30도가 되어야 한다. 나비는 배에 태양광을 최대한 많이 쪼여 그 복사열로 체온을 높인다. 반대로 나비가 그늘에 있으면 체온을 낮추고 있는 중이다. 나비의 날개 역시 체온 조절과 관계가 있다. 나비의 날개가 아름다운 이유는 날개에 있는 인편(鱗片)이라는 비늘가루 때문이다, 가루 자체는 무색이지만 여러 층을 이루고 있는 가루의 일부는 빛을 반사하고, 나머지는 빛을 흡수하거나 산란시키면서 빛을 띠게 되는 것이다.”(곽정식)

인류는 예로부터 새와 곤충의 자유로운 비행을 모방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비행기를 발명했다. 하지만 나비처럼 우아하게 나는 비행술은 아직 모방하지 못하고 있다.

비행기는 양력(揚力)으로 인해 하늘을 난다. 양력이란 공기가 중량을 받치는 힘이다. 비행기는 양력이 중력보다 클 때 떠오른다. 반면 나비는 비행기처럼 도움닫기를 해서 양력을 만들지 않는다.

나비는 양쪽 날개를 몸통 가운데 위쪽으로 한데 모은 후에 부채질하듯 두 날개를 힘껏 떨어뜨리면, 그때 날개 앞쪽 윗부분에 작은 공기 소용돌이가 만들어지면서 동시에 공기 압력이 낮아지는데 이때 발생한 양력으로 이륙하게 된다.

나비는 비행기와 달리 앞으로 나아가는 비행과 제자리 비행이 모두 가능하고 돌풍이 불어도 뛰어난 안정성을 보인다. 비행기가 매끈한 날개 주위에 공기 흐름을 만들어서 비행하는 반면, 나비는 두 쌍의 날개가 만드는 미세한 소용돌이로 비행하기 때문이다.

나비의 날개는 네 장이지만 앞날개 두 장만으로도 나는 데는 지장이 없다. 나머지 두 장으로는 지그재그 패턴의 비행을 하여 천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우아한 나비에게 이런 고도의 비행술이 숨겨져 있다니 자연의 경이로움에 그저 경탄할 뿐이다.

고전이 된 프랑스 영화 빠삐용(papillon)은 나비라는 뜻이다. 가슴에 나비 문신이 있는 주인공은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고 단 한마디의 항변도 못한 채 지옥 같은 감옥 생활에 시달린다. 여러 번 탈옥 시도 끝에 결국은 탈옥에 성공한다. 주인공의 나비 문신은 자유와 희망을 암시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치 유대인 소년 수용소에서 발견된 나무 침대에도 나비 무늬가 상징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시조창 교실에서 곧잘 흥얼거렸던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나도 가자/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라는 ‘나비야 청산가자’라는 이 시조에서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청산엘 가는데 하필 나비와 함께 간다고 할까. 이는 아마도 나비는 묶여 있는 삶에서 놓인 자유자재의 삶을 상징하기 때문이 아닐까.

불교 전통의식에 ‘나비춤’이 있다. 하얀 장삼을 펼치며 춤을 추는 모습이 마치 나비를 연상시킨다. 고깔을 쓴 승려가 양손에 꽃을 들고 긴 소매의 장삼을 걸치듯 입고 추는 춤이다. 속세와 이승의 번민에서 벗어난 가벼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법정 스님은 “겨울에는 나비를 볼 수 없다. 3월이면 어디에서 있다 오는지 꼭 찾아온다. 나비를 성찰하는 사람은 겨울에도 나비를 본다”고 하였다. 작고 연약하며 짧은 일생을 살다 가는 나비를 보고 자연의 순환과정과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 스님처럼 세상 만물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

형형색색 나비의 비늘을 문질렀을 때 그만 무색이 되는 것은 나노 구조가 파괴되어 본래의 색이 사라진 탓이다. 아리따운 꽃잎이 생화학적인 색소를 품고 있다면, 팔랑이는 나비 날개는 물리학을 싣고 다닌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나비들은 비늘에서 반사하는 자외선으로 종족을 알아내고, 짝꿍을 찾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나비는 비늘로 말하고 있다’.

“애호랑나비나 모시나비 등은 수놈이 짝짓기를 하면서 암놈의 몸속에 정자 말고도 아주 커다란 영양분 덩어리를 슬그머니 삽입한다. 놀랍게도 이 물질에는 성욕 억제제가 들어 있어 암놈 나비로 하여금 다시는 더 짝짓기를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든다. 그리고 그 영양분 덩어리가 처음에는 반투명하지만 조금 뒤에는 회백색으로, 하루가 지나면 갈색에 가까워지면서 딱딱하게 굳어져 자궁의 입구를 막아버린다. 이것을 수태낭(受胎囊)이라 부르는데 일종의 정조대(貞操帶, chastity belt)인 셈이다. 얼마나 이기적인 수놈의 생식 형태인가. 이런, 고얀 놈 제 씨(유전인자)만 퍼뜨리겠다는 수놈 나비의 심보에 아연 혀가 내 돌린다.”(권오길)

나비는 자유, 경쾌, 즐거움이나 행복을 상징한다. 세계 헤비급 권투 챔피언이었던 무하마드 알리는 경쾌한 몸놀림과 펀치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표현을 만들어 냈다. 영어권 사람들은 나비로부터 경쾌함과 설렘의 메시지를 받는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 장롱인 나비장의 놋쇠 나비 장식은 집안의 부와 행복을 기원하는 상징이다.

나비의 일생은 네 단계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는 알로서 정지해 있는 잠의 시간, 두 번째는 끈적거리는 흉측한 애벌레로서 기어 다니며 풀잎사귀를 뜯어 먹는 꿈틀거림의 시간, 세 번째로는 집을 짓고 들어가 번데기로서 잠을 자며 기다리는 시간, 마지막으로 번데기에서 나와 깨끗하고 화사하고 현란한 날개를 팔랑거리며 허공을 날아다니며 꽃 속에 빨대를 들이밀어 꿀과 향을 빨아먹는 시간. 꿈꾸는 자, 즉 초월자처럼 유유자적하는 시간을 보내는 삶의 단계이다.

아마도 나비가 주는 최고의 드라마는 긴 번데기 상태에서 한 장의 아름다운 나비로 변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순간일 것이다.

인간도 한 번씩 환골탈태가 가능할까? ‘사람 잘 안 바뀐다’ 하지만 때로는 어느 날 멋지게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나타나 주위를 놀라게 하는 경우도 가끔 있으니 영 불가능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성장하는 청소년들에게 어떤 강한 모티브가 주어졌을 때, 이런 환골탈태의 모습도 쉽게 일어난다고 한다. 이는 역시 정성 어린 참사랑으로 지도편달했을 때 기대되는 일일 것이다.

화사하고 현란한 문양의 날개를 가진 나비들은 자기들이 한 마리 한 마리의, 주름살 많은 번데기였음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종종 자신의 근본을 잊고 살지는 않는지? 결국은 돌고 돌아 동양의 효(孝)의 개념으로 귀착하게 된다. 항간에 일어나는 패륜적 행위들을 돌아보게 된다. 인성교육을 소홀히 한 물질 만능시대가 이끌어낸 자가당착적 현실이지만 지금 이만큼 한 그대가 있기까지의 여정을 어찌 잊어서야 되겠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닐진대.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병풍의 두 번째 폭에 나오는 나비는 아들 율곡이 환골탈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당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그 꽃에 향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선덕여왕의 재기를 다룬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조선의 화가들은 나비 그림을 즐겨 그렸다. 사랑하는 남녀를 꽃과 나비에 비유하기도 하고 명예와 권력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나비에 담기도 했다. 당시 많은 나비 그림이 그려졌지만 남계우만큼 사실적이면서 과학적으로 나비를 그린 화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덕분에 그는 ‘남나비’라는 멋진 별칭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꽃과 꽃 사이를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나비에게 매혹 당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독일 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나비에게 “나비는 동화의 나라에서 온 존재이자 예술 작품이다”라는 찬사를 바쳤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곤충인 나비는 신화나 전설, 문학, 미술에 자주 등장하여 다양한 상징적 의미로 활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18세기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의 ‘프시케와 에로스(1798)’의 그림에 나오는 나비는 영혼의 부활을 상징한다.

현대 물리학의 카오스(chaos) 이론도 나비로 설명한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가 그것이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튼 로렌츠(Edward Norton Lorenz)가 1961년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주에 토네이도(tornado, 돌풍)를 일으킬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작은 사실 하나로도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하나의 작은 사실을 보고 이후의 모든 현상을 파악하는 것을 기미관조(機微觀照)라고 한다. 영어에도 예언적 지혜(prophetic wisdom)라는 표현이 있다. ‘지식은 지혜를 위해서, 지혜는 미래를 예견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모름지기 대수롭지 않고 사소한 것이라고 가볍게 얕보지 말지어다. 처음엔 아주 소소하고 미미했던 것이 나중에 가서는 아주 큰 차이를 불러오는 법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개미구멍이 방죽을 무너뜨린다”고 하지 않던가.

“현대인들은 스펙터클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무관심해지고 있다. 전쟁과 참사가 일상화하면서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수잔 손탁 <타인의 고통>)인 것이다. 입으로는 슬프다고 하지만 가슴속에선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 상실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세계는 결코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 아니더라도, 곰곰 생각해보면 만물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오늘 당신이 먹은 한 끼의 식사가 당신 입속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되새김해 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과 사물, 그리고 시(時)·공간이 연루돼 있는가.”(윤현주)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문학관이 카리브 해 연안의 작은 마을 아라카타카에 자리 잡고 있다. 2014년 4월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추도식에 참석한 콜롬비아 사람들은 종이로 노란 나비를 접어 하늘 높이 날아 올렸다. 그의 작품 ‘백년의 고독’에서 노란 나비떼는 마술적인 상징으로 일컬어졌으나, 현실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식자들도 있다.

장자(莊子)의 재물론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우화에서 장자는 나비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야기했다. 어느 날 장자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한다. “내가 지난 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팔락이며 꽃과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았다. 너무 기분이 좋아 내가 나인지도 몰랐다. 꿈에서 깨자 나는 나비가 아니고 내가 아닌가?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어 꿈을 꾼 것인가? 그때는 즐거워 내가 장주(莊周, 장자의 본명)라는 것을 완전히 잊었다”는 그의 말에서 무경계(無境界)가 느껴진다.

“이는 만물이 상호 합일하고, 상호 침투하고, 상호 연관하고, 상호 의존하고, 상호 변화하는 세계를 일컫는다. 자아와 타자 사이에 서로 분별이 없어지고 하나로 합일·교환·의존하는 세계이다. 일찍이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아름다운 시 ‘엄숙한 시간’에서 노래한 ‘불이성(不二性)의 세계’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누군가 울고 있다/지금 까닭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나를 위해 울고 있다//….”(윤현주)

조선시대 고승 서산(西山) 휴정(休靜)이 읊은 ‘삼몽사(三夢詞)’라는 시가 이 이치를 묘파한다. “주인은 꿈속에서 손님에게 얘기하고(主人夢說客, 주인몽설객)/손님도 꿈속에서 주인에게 얘기하네(客夢說主人, 객몽설주인)/지금 두 꿈을 얘기하는 이 사람도(今說二夢客, 금설이몽객)/역시 꿈속의 사람인 것을 (亦是夢中人, 역시몽중인).”

주인과 손님이 각각 자기 꿈속에서 상대방을 마주하고 얘기하는데 두 사람이 꿈속에서 얘기한다고 말하는 자신도 꿈속의 사람이라니 참으로 큰 꿈이 아닐 수 없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슬퍼하여 우는데, 장자 자신은 춤을 추고 노래를 하였다. 사람들이 장자를 비웃고 꾸짖자 장자는 태어나기 전에 물이었던 아내가 지금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갔다고 말한다. 장자가 바라본 세계는 죽음도 없고, 가고 옴도 없는 하나의 세상일 뿐이었다.

영화 매트릭스가 활용되기 이전부터 ‘호접몽’ 이야기는 많은 사람을 매혹해 왔다. 호접몽에 견줄 만한 서양의 이야기로는 카프카의 ‘변신’을 들 수 있다. 변신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몽환적인 스토리의 대가 호르헤 보르헤스는 이 변신의 서두가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라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나비 자세’를 범어로 ‘받다 코나 아사나(baddha konasana)’라고 한다. 이 자세는 바닥에 앉아 발뒤꿈치를 회음 근처로 가져가서, 발을 잡고 양 무릎이 마루에 닿을 때까지 넓적다리를 벌린 채 두 발바닥을 마주 붙인다. 양손으로 양발을 잡고 허리는 곧추세운 후,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하면서 팔꿈치는 바닥에, 상체는 앞으로 천천히 숙인다.

가슴과 턱이 바닥에 닿도록 한다. 괄약근을 수축 이완 후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이것은 인도의 구두 수선공들이 즐겨 앉는 자세라 하여 일명 ‘구두 수선공 자세’라고도 부른다.

나비 자세는 비뚤어진 골반을 바로잡는 데 도움을 주며, 요통·생리통을 완화해 준다. 특히 하타요가의 대가인 아헹가는 이 자세를 취하면 골반과 복부가 혈액의 충분한 공급으로, 자극받게 되면서 신장과 전립선 그리고 방광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해 주는 데 도움을 준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골반 개폐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어 임산부가 따라 해도 좋은 자세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특히나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 중에는, ‘쾌차하여 나비처럼 이 세상을 한번 훨훨 날아다녀 보고 싶다’라는 간절한 소망을 말하기도 한다.

평소에 자신을 위해, 자신의 심신 건강을 위해 투자하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사실, 아니 최고의 투자임을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촉구해 본다. 요가원장으로서는 당연히 ‘꾸준한 요가수련’, ‘평생 요가수련’을 권하는 바이지만 각자 적성과 체질·여건에 맞는 운동이면 오케이다.

사람들은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호랑나비 시절임을 가끔 망각하고 산다. 노래 가사처럼 오늘이 남은 인생 중에 가장 젊은 날인 것을 잊고 산다.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화양연화의 시절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이 소중한 순간들을 시시콜콜한 것에 빠져 허비하고 산다. 길흉화복, 희로애락애오욕(喜怒愛樂愛惡慾)이 인간의 숙명인 건 부정할 수 없겠으나, 잠시 심호흡을 하며 숨을 돌리고 이 쾌청한 가을 하늘도 한 번씩 우러러보았으면 한다.

‘내가 나를 추앙(推仰)한다’는 강력한 ‘자기 포옹’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오늘’, ‘지금 여기(now&here)’임을 상기해야겠다.

한국인들은 나비가 하늘하늘 난다고 할 때, 중국인들은 나비가 비래비거(飛來飛去)한다고 말한다. 나비는 하늘하늘 날아왔다가 하늘하늘 날아간다. 사람도 어디선가 왔다가 어디론가 갈 뿐인 것을, 이 지구별의 영원한 보헤미안인 것을.

갑자기 오래전에(1966년) 신성일·김지미 주연의 ‘하숙생’ 영화 주제곡이었던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 노래가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내친김에 33세에 요절한 김정호가 부른 ‘하얀 나비’도 읊조려본다. 언제 들어도 애달프다. 현철의 ‘사랑은 나비인가봐’도 흥얼거려본다,

‘나비 자세’ 한 동작에 맞춰서.

아, 아득한 그 시절, 세월은 흘러도 추억은 영원한 것인가 보다. 나비 자세가 그 시절을 소환시켜 주었다.

‘요가 아사나’. 최진태 作


[나비 자세/ 최진태]

겨울 지나 봄이오면 할금할금 나타나서/봄소식 전해주는 전령 중의 전령이라/‘그대를 성찰하는 사람 겨울에도 나비 본다’*네

*법정 스님 말씀

작고도 연약하며 짧은 일생 살다가는/그대보고 자연순환 생명존귀 느낀 스님/나도야 세상 만물을 경이로운 눈으로

날고 싶은 욕망일랑 비행기에 실었다네/제자리서 사뿐히도 날아오르는 비행기법/아직 인간 비행술로는 그대 따라 가지 못해

무고한 죄 덮어쓴 나비 문신 빠삐용의/수없는 탈옥시도 불굴의 투혼의지/일컬어 자유와 희망 암시했던 것이리라

그대를 만진 후에 눈 비비면 눈이 먼다/어릴적 들은 말에 평생토록 후덜덜덜/날개를 비에 안젖게 하는 역할 그뿐인걸

비늘에서 반사하는 자외선 그 하나로/종족을 알아내고 짝꿍을 찾아낸다/모든건 비늘로 통해 그대들의 비밀코드

수놈 중 짝짓기 후 자궁입구 막는 놈도/수태낭을 일컫는다 일종의 정조대라/독점욕 이기심일랑 못된 인간 이상이군

측근에게 화를 내면 연쇄반응 일으켜서/결국은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돌아오는/인과법을 나비효과라 일컫는다 하지요

이슬방울 하나에서 우주를 본다하네/작은 사실 하나로도 전체를 파악하는/서양의 예언적 지혜 기미관조 같은 뜻

처음엔 소소하고 미미했던 것이지만/나중엔 아주 큰 차이 불러오는 법이란다/건강이상 작은 신호도 예사롭게 보지 말길

꿈속에 꿈을 꾼다 꿈속에 나비되어/꿈에서 깨어나자 내가 나비 나비가 나/무경계 물아일체군 삶 자체가 한바탕 꿈

양무릎 펼친 채로 양발을 부여잡고/몸통을 숙였다가 다시금 올라오는/단순한 동작같지만 그 효과는 오묘하오

비뚤어진 골반교정 생리통을 완화하고/신장 방광 전립선 계통 건강하게 도와준다/진리는 간단명료함 머리아닌 몸 자체로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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