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정신적 고통 안락사' 논쟁 [뉴스 깊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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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6.26. 오전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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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네덜란드에서 ‘정신적 고통’에 따른 안락사를 둘러싼 문제 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문제 제기의 핵심은 환자가 겪는 정신적 고통의 무게를 신체적 고통만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영국 신문 가디언의 일요판인 옵저버는 네덜란드 검찰이 2017~2018년 진행된 안락사 가운데 3건을 조사하고 있으며 이중 1건이 정신적 고통 안락사라고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지난해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정신질환자 사례였다. 수십년간 조현병 증상에 조증·우울증 같은 기분장애 증상이 함께 나타나는 ‘조현정동장애’로 고생한데다 폐암까지 걸린 70대 여성은 “정신적 고통이 너무 크다”며 안락사를 원했다. 담당 의사는 자문기구인 ‘네덜란드 안락사 지원·자문’(SCEN) 소속 상담 의사의 자문을 거쳐 안락사를 시행했다.

반면 안락사가 엄격한 기준에 의해 이뤄졌는지 평가하는 지역심사위원회(RTE)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채 시행됐다”고 판단했다. 담당 의사가 정신과적 전문성이 없는 SCEN 상담 의사의 자문을 받았을 뿐 독립적인 정신과 전문의의 ‘2차 의견’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역심사위는 “정신질환자가 안락사를 요청한 경우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면서 “진정한 본인 의사인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 정신과 전문의와 반드시 상의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신적’ 고통과 안락사

정신적 고통 안락사를 둘러싼 가장 최근의 논쟁은 지난 2일 네덜란드 동부 아른험에서 18세 소녀 노아 포토번이 숨을 거두면서 점화됐다. 14세 때 성폭행을 당한 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던 포토번은 죽기 전날 인스타그램에 “고심 끝에 나 자신을 보내주기로 했다”고 남겼다. 전세계 곳곳에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네덜란드 10대 소녀가 합법적 안락사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사실과 거리가 있는 보도였다. 포토번은 타인의 조력에 의한 안락사가 아니라 스스로 먹고 마시는 것을 중단해 아사했던 것이다. 그는 지난해 지역언론 헬데를란터 인터뷰에서 “헤이그에 있는 ‘절명’ 클리닉에 합법적인 안락사를 할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어리다고 거절당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오보를 본 사람들은 ‘어떻게 앞날이 창창한 소녀를 죽게 내버려둘 수 있냐’고 비판했다. 오보가 잇따르자 포토번의 가족과 네덜란드 보건부까지 나서 “포토번은 안락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네덜란드에서 그의 또래들이 안락사할 수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지난해 12월 헬데를란터 홈페이지에 올라온 노아 포토반의 인터뷰 기사 캡처.


네덜란드는 2002년 4월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안락사법을 시행했다. 네덜란드 왕립의학협회는 안락사(조력자살 포함)를 “충분한 정보에 입각한 환자의 자발적 요청에 의한 적극적 삶의 종결”로 정의한다. 육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안락사의 근거로 인정했다.

안락사를 하려면 만 12세가 넘어야 한다. 17세 미만은 부모 동의가 필요하다. 지난해 6126명이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같은해 사망자의 4% 수준이다. 정신적 고통 안락사는 전체 안락사의 1% 남짓이다. 2002년 이후 네덜란드에서 이뤄진 12~17세 청소년의 안락사는 10건 정도로, 모두 신체적 질병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안락사를 승인받기가 쉽지는 않다. 수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의사에게 두가지를 납득시켜야 한다. 개선될 가망이 없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가졌다는 점,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합리적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담당의는 반드시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의사에게 2차 의견을 얻어야 한다. 환자가 안락사로 사망한 뒤에는 변호사·의사·윤리학자로 구성된 지역심사위가 안락사가 적절하게 시행됐는지 평가한다.

■신중한 판단 vs. 자기결정권

적극적 안락사와 조력자살을 모두 허용하는 국가는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캐나다, 콜롬비아 정도다. 대다수 국가는 한국처럼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만 허용하거나 일부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안락사나 조력자살을 인정한다.

네덜란드 안락사법에서 주목할 점은 환자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근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네덜란드 안락사법이 의사의 주관적 판단에 너무 기대고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정신질환은 환자의 예후를 알기 힘들기 때문에 안락사만이 해결책인지 판단하기 더욱 어렵다.

미국의 정신과 전문의 스콧 킴은 시사지 애틀랜틱에 “네덜란드 안락사법은 광범위하게 그려져 있을 뿐 지침이 거의 없다”면서 “어떤 의사가 18세도 안 된 정신질환자에 대해 안락사 기준을 충족한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환자의 정신건강이 사회적 환경에 따라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안락사를 검토하는 심의위원회에서 9년간 일한 의료윤리학자 테오 부르는 “우리는 끔찍한 ‘죽음’을 막는 최후의 수단으로 안락사를 허용했는데, 이제는 끔찍한 ‘삶’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실제로 포토번과 가족들은 청소년을 위한 정신재활시설이 없다고 호소해왔다. 포토번은 최근 몇년 간 병원, 청소년 보호기관, 정신건강 전문센터 등을 수차례 들락거렸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성인 대상 폐쇄병동에서 갇혀 지냈고 그마저도 오래 대기해야 했다. 포토번은 생전에 “당신이 심각한 심장 질환이 있으면 몇주 내로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정신진활을 겪는) 우리는 대기자 명단에 올라야할 뿐”이라고 말했다.

안락사를 옹호하는 이들은 정신적 고통 안락사가 신체적 이유만큼 타당하다고 말한다. 국제단체 ‘젊은 휴머니스트’의 부대표 자드 아민 자이투니는 NRC한델스블라트에 “단순히 젊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을 외면한다면 진정으로 참기 힘든 고통을 무시하는 꼴이 될 수 있다”면서 “안락사를 선택지로 남겨두되 우울증과 자살에 대한 예방책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종말 클리닉의 엘케 스와르트 대변인은 “안락사를 요청하는 환자들은 ‘나는 죽고 싶지 않지만 살 수 없다’고 말한다”면서 “안락사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의 최후 외침이며 모든 안락사 요청은 신중히 고려해 볼만하다”고 말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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