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잊은 것처럼 살았지만 잊지 않았더라고요

2022.11.04. 오전 10:16

고향을 떠나 서울로 대학원 입학을 했을 때, 당시에는 컴퓨터에서 네이트온이라는 메신저를 카톡보다 더 많이 썼다. 스마트폰 메신저와는 다르게 친구가 로그인을 하면 로그인을 했다고 알림이 뜨고, 친구가 로그아웃을 하기 전까지는 친구 목록에 온라인으로 표시되어 있는 시스템이었다. 메신저에 로그인 되어 있는 친구들의 목록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자기 자리에 들고나는 것을 보는 것만 같은 감정이 들곤 했다.

저녁식사 이후 늦은 밤에 메신저 친구 목록에서 로그인 상태를 켜고 있는 고정 멤버 몇 명이 있었다. 막차시간이 넘어서 고요한 대학원 연구실에 나 혼자 남아서 적막한 공기를 따라 고독함이 찾아올 때면 나는 모니터 너머로 그들의 이름을 보곤 했다. 세상에 함께 깨어 있는 동료가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위로가 되어주었던 고마운 사람들.

해철이 형은 그중 하나였다. 형은 나보다 세 학번 위의 대학 선배다. 신해철을 닮아 별명이 해철이였고 지금도 동아리 선배들은 형의 이름과 별명을 섞어 부른다. 해철이 형은 가끔, 아니 종종 바보 같았다. 동생인 내가 놀리고 화를 내도 다 받아주면서 웃기만 하는 그런 사람이었고 화를 내더라도 하나도 안 무서워서 오히려 역으로 놀림을 당하곤 했다. 과학을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것 만은 확실했다. 어떤 날은 식사 메뉴 정하는 이야기나 소녀시대를 제외하면 하루 종일 물리나 컴퓨터에 대한 이야기만 하기도 했었다.

형과는 각별했는데 내가 대학 시절 가장 오래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인 것 같다. 나는 군 입대 없이 학부를 졸업했어서 군 휴학 후 복학한 형과 학기가 겹쳐 3년 동안 같은 수업을 들으며 붙어 다녔고 같은 동아리에 몸담으며 함께 대학원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2011년 2월. 우리는 같은 해에 졸업을 했고 각자 서울과 수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떨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메신저라는 도구로 간간이 근황을 전하곤 했다. 나는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는 타입이어서 보통은 퇴근 전까지 메신저에 로그인을 해둔 채로 두었고, 해철이 형은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메신저를 켰다. 우리는 일~이 주일에 한 번 정도는 메신저에서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보통은 뭐가 이렇게 힘든지, 대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과 같은 푸념들이었고 그 대화는 형이 맥주 두 캔을 다 마시고 나면 종료되었다.

한 해가 더 지나고 연말쯤,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 꽤 오래 한 번도 못 봤다는 이야기를 했다. 보통은 먼저 보자고 하는 사람이 아닌데 해철이 형은 메신저로는 못 한 얘기가 많다며 만나면 맥주 한 잔 사주겠다고 말했고, 나는 연말에 있는 연구과제 정리 일정 때문에 다음 해 봄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보자며 그렇게 이야기를 마쳤다.

형을 만난 것은 한 달 뒤였다. 취업 시즌에 형이 이력서 사진이라며 보여줬었던 그 사진이 향 뒤의 액자에 걸려있었다. 사진으로 형의 얼굴을 마주한 채로 처음으로 형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아버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시지도 못하셨는데 나는 제대로 위로도 못 해드리고 그렇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수많은 청춘들을 황망하게 떠나보낸 참사와 이어지는 추모 속에서 나는 내가 떠나보낸 해철이 형을 떠올렸다. 잊은 듯이 살다가도 떠오른다. 한때 옆에서 그가 그려가던 인생의 이야기를 관측할 수 있었던 바 나는 그가 미래에 대해 어떤 걱정을 했고 잘 돼보자고 어떤 고생을 했는지를 알기에 갑작스럽게 끝을 맺은 그의 이야기가 안타깝다.

같은 연유로 이번 참사 희생자들의 사연이 가슴 아프다. 각자의 사연이 드러날수록 156명이라는 수치 안에 뭉뚱그려져 있던 개인들이 실제로 어떤 꿈을 남겨두고 떠나갔고 어떤 고민을 안고 살았는지가 드러나면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번 주까지 국가 애도 기간이라고 한다. 인생에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갑작스럽게 상실한 이들의 이야기에서 충분히 느꼈을 거라 믿는다. 마음 편히 사는 법이라거나 더 나아지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잠시 쉬어가고 싶다.

희생하신 분들의 영면을 기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내야만 했던 가족, 연인. 또 영영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겨둔 누군가에게 위로와 마음의 회복을 기원한다.

올해 가을이 되면서 파릇함이 사라진 화초의 잎을 솎아내려던 계획을 했었다. 그러나 이번 겨울만큼은 그냥 넘어가야겠다.


글쓴이 소개

연구보다 삶을 고찰하는 게 더 즐거운 3n세 공학박사.

예술고를 갈망하던 중학생이 공부로 전향해 훗날 굳이 박사학위에 도전하기까지,

인생에 대한 통찰과 번아웃 경험을 통해 배운 기술을 에세이, 소설로 적습니다.

무료 구독 이벤트 진행중입니다 (~12/31)

좋아요와 공유는 글쓰기에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