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고기 덮밥에 계란 하나 올려주세요.”
11일 정오 서울 동작구 노량진역 근처 ‘컵밥’ 거리 노점에서 히잡을 쓴 인도네시아 출신 라티파(28)씨가 친구 레하(29)씨와 함께 능숙한 한국어로 식사를 주문한 뒤 1만원권 지폐를 건넸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학과를 졸업한 라티파는 지난 2022년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오가면서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다. 한국을 찾는 인도네시아 단체 여행객들이 몰리는 성수기마다 노량진 고시원에서 월 30만원을 내고 산다. 친구를 만나러 온 레하도 고시원에서 ‘일주일 단기 투숙’을 하면서 한국을 여행 중이다.
비슷한 시각 노량진역 앞 ‘서브웨이’ 패스트푸드점에는 손님 15명 중 7명이 외국인이었다. 한국과 가까운 러시아·중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체코·미국 등 국적이 다양했다. 매장에 혼자 앉아 유튜브를 보며 샌드위치를 먹던 카자흐스탄인 아스카르 보랏(31)씨는 서툰 한국어로 “곧 지하철 5호선 마곡역 공사장으로 일을 나가야 된다”고 했다.
고시·공시생들의 메카였던 노량진 고시촌이 ‘외국인 타운’으로 바뀌고 있다. 최근 공무원 채용 인원 축소, 전문직 인기로 인한 공무원 응시 감소 등이 겹치면서 이 지역 원룸과 고시원은 잇따라 공실(空室)이 됐고, 식당·상점 매출도 급격히 줄었었다. 작년 국가공무원 9급 채용 시험 평균 경쟁률은 21.8대1로 3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런데 고시촌이 다른 서울 도심보다 집값이나 식사 비용 등이 저렴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라진 공시생들 빈자리를 외국인 관광객과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고시촌’이라 불리는 노량진1동·대학동의 등록 외국인(한국에서 90일 초과 체류) 수는 작년 4544명으로 8년 전인 2017년(1429명)의 3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레테나친!(건배·에티오피아 공용어 암하라어)” 지난 7일 저녁 7시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고시촌의 한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에선 에티오피아인 남성 여섯 명이 이렇게 외치며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서울 도심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은 작년 6월부터 최근까지 잇따라 노량진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몇 달 전 노량진 집값이 다른 곳보다 싸다는 소문이 에티오피아 근로자들 사이에서 돌았고, 지금은 노량진에 사는 에티오피아인이 수십 명이다.
같은 날 오후 5시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의 생활용품점 다이소 매장에선 라트비아 출신 야나 안드리냐(28)씨가 샴푸와 칫솔을 고르고 있었다. 한국에서 한 달 머무를 예정인 그는 지난달 말부터 대학동 고시원에서 숙박하고 있다. 매장 입구에서 1시간가량 지켜봤더니 가게를 찾은 손님 80여 명 중 최소 25명이 유럽·동남아·중동·아프리카 등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외국인들에게 노량진의 상징인 컵밥과 분식은 특히 인기를 끌고 있다. 베트남인 응우옌 타인록(32)씨는 “다른 동네에서 한 끼 먹으려면 몇 만원을 내야 하는데, 4000원짜리 컵밥과 5000원밖에 안 하는 김밥·떡볶이 세트 등은 저렴하고 맛도 좋다”고 했다.
노량진 고시원도 ‘가성비 갑(甲)’이라며 이들 사이 소문을 타고 있다. 월 25만~30만원으로 다른 서울 지역 고시원들에 비해 20~30% 저렴하기 때문이다. 공시생 감소로 불황에 시달리던 고시원 업주들도 이들을 반기고 있다. 한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위해 숭실대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프랑스인 장 카린(47)씨는 올해 1월부터 노량진의 한 고시원에 살고 있다. 4층 규모로 총 60개 방이 있는 이 고시원에는 외국인 40명이 있다. 한국인은 단 5명뿐이다.
변화를 체감한 고시원들은 ‘1박·2박도 가능하다’고 광고하면서 적극적으로 외국인 여행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하루 자는 데 1만원대로 다른 지역 모텔이나 게스트 하우스보다도 저렴하다. 김치와 나물 등 기본 반찬과 밥 등 조식을 제공하는 곳도 많다. 이 지역 한 고시원 운영자는 “한 러시아인 사업가는 반년 사이 한국에 출장 와서 다섯 번이나 우리 고시원에서 자고 갔다”고 했다. 온라인에서는 외국인들이 고시원을 한국 발음 그대로 ‘goshiwon’이라 부르며 ‘깨끗한 고시원’ ‘고시원 생활 팁’ 등을 공유하고 있다.
한편 전 세계 외국인들이 급속도로 몰리면서 관련 범죄나 각종 문제도 늘고 있다. 일부 외국인이 술을 먹고 기물을 파손하는 일이 잇따르자 단기 외국인들 숙박은 거부하고 고시생들만 받는 ‘진짜 고시원’도 늘고 있다. 2년째 노량진 고시촌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모(29)씨는 “원래 살던 고시원에 외국인들이 늘어나 소음도 커지고 향신료 냄새도 참기 힘들어 작년 말 고시원을 옮겼다”고 했다. 동작경찰서 관계자는 “외국인 단기 거주자들이 늘면서 성범죄 등 중범죄 비율도 높아지는 추세”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