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기 폰트 크기 설정
대릉하 유역 우하량 돌널무덤 출토 곡옥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 우하량 돌널무덤 출토 용 모양 옥장식[용형옥수(龍形玉墜)]. 마치 삼성타랍촌(三星他拉村)에서 출토된 옥룡의 형상을 추상화한 것 같다. 재료는 염록색 옥석이며, 높이 10.3cm, 너비 7.9cm.

고대의 동방에는 크게 화하족(華夏族)과 동이족(東夷族)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한족(漢族, 중화족)과 한족(韓族, 조선족)으로 대표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같은 민족끼리 어떤 상징적인 동물을 숭상하는 토템(totem)을 가졌는데, 화하족인 중국 민족은 용(龍)을 토템으로 삼았고, 동이족인 한민족은 새[조(鳥)]를 토템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민족은 모두 용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는데 용은 곧, 중국 민족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황하문명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는 동방 최고의 용의 형상이 화하족의 본향인 황하 유역의 중원(中原) 지방을 크게 벗어난 지점인 바로 발해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 유역에서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동방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용의 형상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옥(玉)으로 만들었는데, 용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말하길 “옥은 돌 중에서도 아름다운 것[석지미자(石之美者)]”을 가르킨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갈고 닦지 않으면 옥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이르기를 “它山之石 可以爲錯”이라고 하였다. “옥을 쪼고 갈려면 다른 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예로부터 옥을 완성하는 과정[조탁(雕琢)]을 인간의 성장과정에 비유하였고, 그 완성된 옥을 군자의 다섯 가지 덕목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옥은 장식으로서의 예술적 가치 이외에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매장함으로써 영생(永生)을 기원하는 종교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

서요하(西遼河) 유역 출토 옥룡(玉龍)
짙은 녹색의 옥으로 상상의 동물인 용을 처음으로 형상화하였다. 그 솜씨가 매우 유려하고 특히 갈기는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하다. 허리 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실을 꿰어 목에 걸 수 있게 되어 있다. 기원전 3500~3000년경 제작된 가장 이른 시기의 용의 형상이다. 크기 26cm.

용의 형상을 갖춘 가장 오랜 시기의 옥장식[일명 옥룡(玉龍)이라고 함]이 1972년, 발해연안 북부 서요하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유역의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랍촌(三星他拉村)에서 발견된 바 있다.1) 이 옥룡은 흑록색 옥석을 재료로 용의 형상을 조각한 것으로 크기가 26cm나 되며 용의 모양은 ‘C’자형을 하고 있으며 꼬리가 거의 한 바퀴 돌았다. 용은 입을 꼭 다물고 코는 높이 치켜세우고 있어 마치 용머리가 전진하는 모습이고 목덜미의 갈기는 날아가는 듯 유려하다. 그리고 몸체의 중앙에 작은 구멍을 뚫어 실을 꿰어 목에 걸 수 있도록 하였다.

옥룡이 출토된 지점에서는 발해연안 신석기시대 문화유형의 하나인 홍산문화의 전형적인 ‘갈 지(之)’자형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함께 발견되고 있어 이것의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홍산문화 시기는 대개 기원전 3500년경에 해당한다.2)

이와 같은 홍산문화 시기에 대릉하 유역에서는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요녕성 건평현 우하량 돌널무덤에서도 용 모양의 옥장식이 한 쌍 발견되었는데, 이 용 모양은 삼성타랍촌 출토의 옥룡보다 매우 간결하게 추상화되었다.

요령성 건평현 출토 곡옥
대릉하 유역 우하량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용 모양 옥장식과 매우 비슷하다. 허리 부분에는 끈을 꿰어 목에 걸도록 구멍을 팠다. 크기 15cm.

이 용 모양 옥장식은 얼굴이 마치 짐승의 모양을 닮고 통통한 몸은 한 바퀴를 감돌았다. 그리고 머리 부분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 실을 꿰어 걸 수 있도록 하였다. 출토 당시 주검의 어깨 밑 부근에서 각각 발견되었기 때문에 귀고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하량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용 모양 옥장식과 같은 옥기가 서요하 서랍목륜하 유역의 적봉시(赤峯市), 파림좌기(巴林左旗), 오한기(敖漢旗) 그리고 대릉하 유역의 릉원현(凌源縣) 삼관전자(三官甸子), 객좌현(喀左縣) 동산취(東山嘴), 건평현(建平縣), 조양시(朝陽市), 부신현(阜新縣) 호두구(胡頭溝)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점이 특색이다.3)

홍산문화의 용 모양 옥장식은 대릉하 유역에서 서남향하여 은나라 수도 은허(殷墟)에서 크게 유행했다. 뿐만 아니라 대릉하 유역에서 용모양 옥장식과 함께 출토된 새 모양 옥장식[조형패식(鳥形佩飾)]도 함께 유행했다.4) 이와 같이 대릉하 유역의 용과 새 모양의 옥제 조각의 전통이 은나라에 전승, 유행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은의 선조가 알에서 태어난 난생설화(卵生說話)를 믿는 발해연안의 동이족이라는 사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은허(殷墟) 부호묘(婦好墓) 출토 곡옥
은나라 무정(武丁) 왕비 부호(婦好)의 능묘에서 출토된 수백 종의 옥기 가운데는 용 모양 연옥제 조각이 많다. 높이 5.8cm.
은허(殷墟) 서구묘(西區墓) 출토 곡옥 각종
크기는 오른쪽으로부터 3.5cm, 3.5cm, 1.9cm.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현 의란(依蘭) 출토 곡옥

한편, 대릉하 유역에서 동남향으로 내려가 청동기시대의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도 용 모양의 옥장식이 유행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옥장식을 ‘굽은 옥’ 혹은 곡옥(曲玉) 또는 구옥(勾玉)이라고도 한다.

만주 지방에서는 요동반도의 여대시 곽가촌(郭家村)유적[아래층]에서 기원전 3000년경[C14측정년대: 5015±100]의 송록석제(松綠石製) 곡옥이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5) 길림성 영길현 동해강(東海崗) 돌널무덤, 왕청현(汪淸縣) 천교령(天橋嶺) 돌널무덤 및 신화려(新華閭) 돌널무덤에서 곡옥이 출토되었다.6)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천하석(天河石)으로 만든 만월형(彎月形) 곡옥이 함경남도 북청군 죽평리, 함경북도 웅기 송평동, 충청남도 대전시 괴정동, 아산시 남성리, 부여군 연화리·송국리, 충청북도 제원군 황석리, 경상북도 영덕군 오포리 등 주로 돌널무덤이나 고인돌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경상남도 진주 대평리 옥방(玉房) 유적에서 옥기를 제작하던 옥기공방(玉器工房), 즉 옥방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7) 이와 같이 돌무덤에서 굽은 옥이 출토되는 것은 대릉하 돌무덤에서 출토된 홍산문화의 용 모양 옥장식과 일맥상통한다.

경상북도 영덕군 오포리 출토 곡옥 1쌍
크기가 각각 3.7cm, 3.8cm의 천하석(天河石)제 곡옥은 그 형태와 빛깔이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 출토 천하석제 곡옥과 매우 비슷하다.
경주 출토 곡옥
신라에서는 금관이나 금제 혁대 장식 등에 비취로 만든 곡옥 장식을 많이 이용했다. 오른쪽 금모(金帽) 곡옥. 발해연안 곡옥 문화와 신라의 황금 문화가 결합한 독특한 형상이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까지도 출토되고 있는 비취 곡옥이 일본에서도 구주 지방과 관서 지방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래서 한반도와 일본의 곡옥의 조형(祖形)에 대하여 용이나 짐승의 태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짐승의 이빨로 만든 장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으로는 만주 지방이나 한반도의 곡옥은 발해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에서 기원한 용 모양 옥장식이 곡옥으로 연변(演變)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곡옥의 조형을 옥룡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견해는 어디까지나 조형상의 문제이다.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동방에서의 용에 대한 신앙적인 관념의 세계가 중국의 심장부인 중원지방을 크게 벗어나 동방으로 만리장성을 넘어 한민족과 가까운 동이(東夷) 지역에서 형상화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옥을 갖게 됨으로써 영생불멸(永生不滅)한다는 생각과 당시 고대 사회의 어떤 신분상의 등급과 권력에 대한 관념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예(禮)의 원형이다. 특히 용은 하늘을 숭배하는 고대 농업사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옥으로 사물을 조각했다는 사실은 곧, 문명 발생의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만리장성 동쪽의 발해연안에서 동방문명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출처

출처 도움말
확장영역 접기

고구려, 부여, 발해의 찬란한 역사가 되살아난다! 중국과 북한 유적·유물에 대한 실증적 연구로 한·중 역사...더보기

  • 저자

    1962년 홍익대학교에 입학하여 최순우(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하에서 수학했다. 대만에 유학하여 국립대만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교 역사학과에서 『발해연안 고대문화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대만 고궁박물원과 중앙연구원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있었다. 1981년 귀국 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학국학중앙연구원) 역사연구소 교수·한국학대학원 교수, 중국 북경대학 고고학과 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고고연구소장·중앙도서관장과 대학원장도 맡았다.

    한편,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과 문화재위원을 역임하고, 개성 영통사 복원추진위원회 남측 대표로 방북했고, 2002년 10월과 2003년 10월에는 평양에서 개최된 단군과 고조선 관계 남북학술의회를 주관하였다. ‘특별기획전 고구려!’ 준비기획위원장을 맡아 남북학술교류에 힘쓰기도 했다. 지금은 동양고고학연구소 대표로 있으면서 고조선단국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 서울 풍납토성 백제 왕경(王京) 유적 발견과 풍납토성 보존에 힘쓴 공로로 국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우리나라 고대민족·문화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반론 고증하여 현행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삭제하게 하였다.

    저서로 『광개토대왕릉비 신연구』(박노희 공저),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 『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 조사연구』, 『강화도』, 『고조선문화연구』(공저), 『단군과 고조선』(편저), 『고구려의 고고문물』(공저),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 실측조사연구』, 『백제의 토성』 등이 있다.

    논문으로 「발해연안 빗살무늬토기문화의 연구」, 「발해연안 석묘문화의 원류」, 「청동기문화의 비교Ⅰ·Ⅱ」, 「갑골문화의 기원과 한국의 갑골문화」, 「한국민족문화의 시베리아 기원설에 대한 재고」 등 100여 편이 있다. 이 밖에 『朝鮮古代文化の起源』 등 일문·중문으로 수십 편의 저서와 논문이 간행되었으며 역서로 『갑골학 60년』(동작빈 저)이 있다.

    더보기
  • 제공처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