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00엔=1000원’ 시대… 약한 엔화보다 더 약한 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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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4.28. 오전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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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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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에 악재 될 우려 커”

일본에서 각종 기능성 도료(塗料)와 건강식품 등을 수입해 국내에 유통하는 ‘아이테크코리아’ 김샛별(52) 대표는 최근 손해를 보며 물건을 납품하고 있다. 지난 2월까지만 해도 100엔당 900원대 초반에서 움직이던 엔화 대비 원화 환율이 최근 1000원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1~2개월 사이 원·엔 환율이 6~7%가량 상승(원화 가치 하락)하면서 납품 마진을 넘어섰다. 김 대표는 “환율 상승에 따른 손해를 납품 가격에 반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원화 가치가 오를 날만 기다리며 손해를 감수하고 있다”며 “지난해보다 일본 상품 주문이 크게 늘었지만 웃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센터에서 관계자가 미국 달러와 일본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약세를 면치 못했던 일본 엔화가 최근 원화 대비 강세를 보이면서 ‘100엔=1000원’ 시대가 다시 열리고 있다. 100엔당 원화 환율은 이달 6일 1001.34원을 기록, 지난해 5월 이후 11개월 만에 1000원 선을 넘었다. 이후 잠시 주춤했던 원·엔 환율은 27일 다시 1000원 선을 돌파해 1001.61원으로 마감했다.

통상 엔화 강세는 일본 제품의 수출 경쟁력 약화로 이어져 경쟁국인 한국에는 호재로 인식된다. 하지만 최근 엔화의 상대적 강세는 ‘약한 엔화, 더 약한 원화’라는 기현상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한국 경제에 호재보다는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우려가 나온다.

약한 엔화, 더 약한 원화

최근 외환시장에선 달러 약세 상황에서도 원화와 엔화가 동반 약세를 보이는 이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 주요 6국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27일 101.47을 기록해 연초 대비 3% 하락했다. 이에 따라 올 들어 유로, 영국 파운드, 중국 위안화 등 주요국 통화가 달러 대비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독 엔화와 원화만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지난 21일 기준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작년 말에 비해 2.3%, 원화 가치는 5% 떨어졌다.

대표적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엔화가 미국 지방은행 연쇄 파산 등 위기 속에서도 약세를 보이는 주된 이유는 일본중앙은행(BOJ)의 초완화적 통화 기조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임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25일 열린 의회에서 “수익률곡선제어(YCC)에 따른 금융 완화를 계속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YCC는 10년물 국채 금리 목표치 허용 범위를 정해 돈을 푸는 정책을 말한다. 일본은 제로(0) 금리 정책도 유지 중이다.

이런 엔화보다 원화가 더 약세를 보이는 까닭은 결국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기초 체력)을 일본보다 비관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황 악화, 대중국 수출 감소 등이 겹쳐 무역수지는 13개월 연속 적자 행진 중이고,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는 경상수지마저 1~2월 두 달 연속 적자가 났다.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 부채와 급증하는 재정 적자에 대해서도 해외 투자자들은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미국과 금리 역전이 한국, 일본 양국 통화의 동반 약세를 유발하고 있다”며 “수출 의존도가 일본보다 훨씬 큰 우리나라는 경상수지 악화에 따른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해 엔화 대비 원화 약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다른 통화와 원화의 격차는 엔화보다 훨씬 더 크게 벌어졌다. 27일 유로 대비 원화 환율은 장중 1483원까지 올라 2014년 3월 이후 처음 1480원을 돌파했다. 위안화 대비 원화 환율도 193원대로 뛰어 연말 대비 6.3% 올랐다. 급등하는 환율 탓에 해외에 송금할 일이 있는 사람들은 비상이다. 유학생 자녀를 둔 김모(50)씨는 “송금 부담이 만만치 않은데 환율이 너무 빠르게 올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대일 여행적자·무역적자 심화 우려

통상 엔화가 원화 대비 강세가 되면 우리 기업들이 생산하는 제품은 수출 시장에서 일본 제품보다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다. 하지만 지금의 수출 침체는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인한 수요 부족에 기인한 것이어서 원화 약세가 수출 증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 원화와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은 각각 96.26, 77.96으로 엔화가 여전히 원화에 비해 경쟁력을 갖고 있다.

이런 가운데 엔화 대비 원화 환율이 오르면 만성적인 대일 무역수지 적자만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일본에서 주요 소재·부품·장비 등을 수입하는 기업들도 제조 원가가 상승해 수익성이 악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한국은 일본과의 교역에서 언제나 적자인 나라”라며 “이런 상황에서 환율 상승으로 적자 폭이 커질수록 국내 기업들에 큰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대일 여행수지 개선도 어려워 보인다. 엔화 환율이 다소 올라도 보복 소비, 보복 여행 심리가 워낙 강해 일본 여행 수요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관광청에 따르면 올 1~3분기 160만여 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을 찾아 1인당 평균 12만5000엔(약 123만원), 총 1999억엔(약 1조9700억원)을 썼다.

한국과 일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역전도 미뤄질 전망이다. 당초 일본경제연구센터(JCER)는 올해 한국의 1인당 GDP가 3만4505달러로 일본(3만3334달러)을 추월할 것이라고 지난해 말 전망했다. 그러나 올해 예상 밖의 큰 폭의 원화 약세가 이어지고 있어 한일 1인당 GDP 역전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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