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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포연제(1)2023.08.09.

아이레네는 칼로스에게 매일 보고하는 게 부담스럽고 걱정했는데, 우려했던 것보다 수월했다. 수업 때 뭘 배웠는지 말하는 건 복습하듯이 이야기하면 되는 거였고. 제르딘은 수업과 관련 없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을뿐더러, 해봤자 자기 자랑 같은 시답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보고하는 게 다소 부끄럽기는 해도 어렵지 않았다. 제르딘이 헛소리한 걸 보고할 때마다 칼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인상을 쓰거나 혀를 차는 반응도 나름 재미있었고.

“아, 정말이지. 스승님, 너무하세요.”

“내가 너무한 게 아니라, 네가 주제를 모르고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나?”

칼로스와 제르딘의 사이가 썩 나빠 보이지 않는 것도 아이레네가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칼로스가 제르딘이 하는 말을 전부 보고하라고 한 건, 아마 다른 사정이 있는 거겠지. 내가 모르는 귀족들의 사정 같은 거. 아이레네는 그렇지 않고서야 칼로스와 제르딘의 사이가 저리 좋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 부분에 대한 근심을 완전히 털어냈다.

“한 번쯤은 줄 수 있잖아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자꾸 이상한 고집 부릴 거면 그냥 황궁으로 돌아가.”

……두 사람, 아직도 싸우네. 아이레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리 애원하는데 끝까지 허락해주지 않는 칼로스도 대단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부탁하는 제르딘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였으면 칼로스가 안 된다고 말하자마자 바로 수긍했을 텐데. 그런데 뭐 때문에 싸우는 거지? 아이레네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두 사람은 싸우고 있는 터라 뭐 때문에 싸우는 건지 듣지 못했다. 뭔가 달라고 하는 걸 보면 물건 때문에 싸우는 것 같기는 한데……혹시 제시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혹시 대공 각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왜 싸우는지 이유를 알고 있어요?”

“마령 때문이에요.”

제시가 즉각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마령을 달라고 말도 안 되는 요구하시니, 주인님께서 저리 화를 내시는 거예요.”

“그렇군요.”

아이레네는 마령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칼로스가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걸 보면 그에게 중요한 물건일 거라고 생각했다.

“에이씨, 안 받으면 되잖아요.”

한 치의 양보도 없던 치열한 공방에서 결국 백기를 든 사람은 제르딘이었다.

“그러니까 스승님이 미움을 받으시는 거예요.”

물론 그냥 포기하진 않고 독설을 날렸다. 이에 칼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누가 누구한테 미움을 받는다는 거지?”

“누구겠어요? 당연히 아이레네죠.”

응? 나? 갑자기 제 이름이 언급된 것도 당황스러운데, 두 사람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아이레네는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길게 내리깔았다. 타박, 파릇파릇한 잔디를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내 제 앞에서 발소리가 사라지자 아이레네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제 머리에 닿자 아이레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칼로스는 무심하게 아이레네의 머리칼에 붙은 낙엽을 떼어냈다. 저런 게 붙어 있었구나. 말해줬더라면 내가 직접 뗐을 텐데. 아이레네는 볼을 살짝 붉히며 머리를 만졌다. 칼로스의 손에서 벗어난 낙엽이 나부끼며 멀어졌다. 무심코 낙엽을 좇던 아이레네는 문득 주변 나무들이 헐벗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의미. 새삼 시간의 흐름을 깨달은 아이레네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용케 아직까지 살아 있구나.’

금방 죽을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신기했다.

“…….”

동시에 언제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전에 듣자 하니 내가 필요해서 데리고 온 거라고 하던데, 울긋불긋 물든 단풍잎들이 다 떨어지도록 왜 필요한 건지 이유를 듣지 못했다.

‘언제쯤 말해주려나.’

혹시 제게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안 좋은 거겠지. 좋은 거라면 굳이 말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이렇게 잘해주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일상에 잠시 잊고 있었던 불안감이 꿈틀거리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이레네가 가늘게 떨리는 몸을 끌어안는 그때, 그녀의 어깨 위로 외투가 올라왔다. 낯선 듯 익숙한 향기가 확 끼쳤다. 아이레네는 너무 커서 흘러내리는 외투를 여미며 칼로스를 올려다봤다. 제르딘과 듀이도 놀란 눈으로 칼로스를 바라봤고, 제시는 칼로스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제게 쏟아지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칼로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이만 들어가지.”

“오늘 점심은 정원에서 먹는다고……컥.”

제르딘이 눈치 없이 끼어들려고 하자, 곁에 있던 듀이가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입을 막았다. 제시도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지만, 아이레네에게 말할 땐 환하게 웃었다.

“이만 들어가요, 아가씨.”

“네……아!”

발에 외투 끝자락이 밟히면서 아이레네의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울어졌다.

“아가씨!”

제시가 재빨리 잡아준 덕분에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뒤에서 듀이와 티격태격하던 제르딘이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

아이레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아이레네가 걸치고 있는 칼로스의 외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찼다.

“외투가 너무 길어서 땅에 끌리네. 또 밟고 넘어질 수도 있으니 벗는 게 좋겠다.”

제르딘이 외투를 벗어 아이레네에게 내밀었다.

“대신 내 걸 덮어.”

“괜찮아요.”

애초에 추워서 덮고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아이레네는 외투를 벗어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었다. 제시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 테니 이리 주세요, 아가씨.”

“아니에요. 제가 들게요.”

칼로스가 호의를 베풀었는데 다른 사람 손에 외투를 맡기는 건 아닌 것 같아, 아이레네는 거절했다. 제시는 더 물어보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났다. 아이레네는 혹시나 외투를 떨어뜨릴까 봐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 탓인지 칼로스 특유의 체향이 훅, 끼쳤다. 칼로스가 무섭다면 그의 체취를 맡는 것도 기분이 나빠야 정상인데, 전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운 느낌이 드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 아이레네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혼자서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누군가 깨우면 미적거리지 않고 즉각 일어났다. 부친에게 오랫동안 시달리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바로 일어나지 않으면 감히 아빠 말을 무시하는 거냐며 발길질이 쏟아졌으니까.

“아가씨,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캐노피 밖으로 울리는 제시의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아이레네는 심장 부근에서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자 눈썹을 찡그렸다. 때마침 캐노피를 걷은 제시가 그 표정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아가씨?”

“아니요. 괜찮아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통증이 사라졌다. 아이레네는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일어섰다. 제시가 곧장 세숫물을 준비해서 가져왔다.

“아침 식사는 평소처럼 간단하게 준비해드릴까요?”

아이레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세숫물에 손을 넣었다. 적당히 따뜻한 물이 기분 좋게 손을 감쌌다. 말끔하게 세수를 끝낸 아이레네는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제대로 먹지 못해 다소 홀쭉했던 뺨에는 어느덧 살이 차올랐다. 혈색도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고, 푸석푸석했던 머릿결도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그래서일까. 제 얼굴인데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생겼던가. 괜히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테이블 세팅을 끝낸 제시가 불렀다.

“아가씨, 식사하세요.”

“네.”

아이레네는 곧바로 자리를 옮겨 앉아 식기를 들었다. 처음 에스페르 성에 왔을 때는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로 적게 먹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깔끔하게 비웠다.

“잘 먹었습니다.”

그만큼 에스페르 성의 생활에 적응했다는 의미이니 제시는 흐뭇하게 웃으며 후식까지 챙겨 먹는 아이레네를 바라봤다. *

“오늘은 마물에 대해서 배워보자.”

녹색 칠판에 마물이라고 큼지막하게 쓴 제르딘이 아이레네에게 물었다.

“마물이 뭔지 알고 있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악한 괴물입니다.”

즉각 나온 대답에 제르딘이 웃었다.

“역시 그렇게 알고 있구나. 하긴 신전에서 그렇게 가르쳤고, 수많은 책에도 그렇게 적혀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 말씀은 아니라는 건가요?”

“아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야. 마물은 대체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니까.”

제르딘은 마물 옆에 마법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기본적으로 마물은 마법을 쓰는 괴물이라는 뜻이야. 오크나 가고일 혹은 슬라임 같은 놈들은 마법을 쓸 줄 모르기 때문에 마물이 아닌 몬스터라고 부르지.”

아이레네는 제르딘의 말한 것들을 노트에 꼼꼼하게 적었다.

“그래서 마물은 보통 몬스터보다 지능이 높아. 애초에 마법이란 게 머리가 나쁜 놈들은 쓸 수가 없거든. 수식이나 마법진 같이 외워야 하는 게 무척 많으니까.”

그렇구나. 아직 마법의 기초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이레네에겐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그렇다 보니 마물은 상대하기가 굉장히 힘들어. 그나마 급이 낮은 마물들은 쉽지만, A급만 돼도 실력 있는 기사나 마법사들이 수십 명은 달려들어야 겨우 잡을 수 있어.”

“와.”

마물이라는 거,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한 존재였구나. 감탄하던 아이레네는 문득 에스페르 영지에는 마물이 들끓는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니 에스페르 영지에는 절대 가면 안 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지만, 그런 것치고 아이레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물을 본 적이 없었다.

‘아, 본 적이 있긴 하네.’

에스페르 성을 탐색하느라 산책했을 때, 요미라는 이름을 가진 귀여운 마물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에스페르 영지에 오는 길에 토끼 모습의 흉측한 마물도 봤었지. 아, 걔는 마법을 안 썼으니까 그냥 몬스터인가? 그러고 보니 에스페르 영지는 마수 전리품이 특산물이라고 했는데, 뭐가 다른 거지?

“마물과 마수는 다른 건가요?”

아이레네가 묻자 제르딘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좋은 질문이야.”

그리고 마물이라는 글자 밑에 마수, 그리고 그 옆에 마령을 적었다.

“마물은 크게 마수와 마령, 이렇게 두 분류로 나눌 수 있어.”

전에 제르딘이 칼로스에게 달라고 했던 마령이 마물이었구나.

“가축처럼 길들인 마물을 마령, 야생 상태인 마물은 마수라고 불러.”

“아,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 이전에 각하께 달라고 하신 게 길들인 마물인 거군요.”

“맞아.”

그때의 일을 떠올린 제르딘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스승님도 너무하시지. 매년 포연제가 열릴 때마다 부탁했는데, 어떻게 단 한 번도 안 들어주시는 건지.”

“포연제?”

처음 듣는데. 축제 이름인가?

“아, 너는 모르겠구나.”

제르딘은 칠판에 포연제를 적으며 설명했다.

“길들인 마령에게 주인을 정해주는 의식을 치르는 날을 포연제라고 불러. 포연제는 1년에 딱 하루만 열리다 보니, 이날을 놓치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해.”

그런 게 있구나. 오늘따라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내일이 바로 포연제인데…….”

제르딘은 말꼬리를 흐리더니 아이레네를 빤히 쳐다봤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의미심장한 눈빛에 아이레네는 긴장하며 펜을 움켜쥐었다. 제르딘은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올리며 웃더니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포연제가 어떤 건지 직접 보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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