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신념보다 ‘공직 정신’ 절실하다[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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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관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

장발장 추적하는 자베르 경감

악인 아닌 근대국가 관료 전형

私見 앞세우면 국가 질서 붕괴

정치 편견 공표한 판사의 재판

편파 방송과 이념 교육 요지경

강직한 직업 정신 소유자 절실


빅토르 위고의 명작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성당의 기물을 훔쳐 달아난 후 체포되기 직전, 미리엘 주교의 자애로움에 감화돼 새사람으로 거듭나려 했다. 그는 세간의 눈총을 피하려 정체를 숨긴 채 자선을 베풀고 고난에 처한 여러 생명을 구했으며, 쇠락한 도시를 경제적으로 부흥시키는 등 인간을 돕고 사회에 공헌했다.

반면, 개과천선의 새 삶을 향한 그의 진심 어린 노력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잊을 만하면, 살 만하면 나타나 그를 감옥으로 다시 보낸 자베르 경감 때문이었다. 장발장의 잇단 탈옥과 자베르의 추격은 평생 반복됐다. 독자들은 선한 장발장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괴롭히는 자베르를 증오하면서, 그야말로 세상에서 격리해야 마땅할 악인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다시 보면, 자베르는 법과 원칙의 토대 위에 놓인 근대국가의 운영 원리를 빈틈없이 실천하고자 노력한 근대적 국가 관료의 위대한 전형이었다. 자베르에게 장발장은 단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절도범이자 상습적 탈옥수에 불과했다.

자베르는 장발장이 성자에 필적하는 훌륭한 인간이라는 자신의 내적 판단, 즉 ‘신념 가치’와는 전혀 상관없이, 범법자는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법 집행관으로서의 ‘직업 가치’를 충실하게 실천했을 뿐이었다. 그것만이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는 공직자로서 자베르가 마땅히 지켜내야 할 의무이고 책임이었다. 그로서는 존경스러운 한 명의 범법자를 구제하기 위해 국가 시스템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는 요구했다. 공직을 맡은 자는 ‘분노하거나’ ‘절망할’ 자유도, 개인적 편견과 사사로운 정리를 적용할 자유도, 정치적 투쟁에 참여할 자유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오직 비당파적·비인격적·비감성적 업무 처리만이 ‘공직의 정신(the ethos of office)’에 부합한다고 봤다.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국가 질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장발장도 훌륭한 사람일 수 있겠지만, 그와 별도로 자베르 경감이 없이는 근대국가의 존립도 올바른 운영도 실현할 수 없게 된다. 장발장의 위대함이 진심 어린 참회를 통한 영혼의 부활을 이룬 데 있었다면, 자베르의 위대함은 사사로운 인간적 정리나 신념의 편향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직의 정신’을 단호히 실천해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을 구현하고 ‘누구든지’ 범법하면 형사소추한다는 직업 가치에 헌신했다는 데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한 나쁜 풍조 하나는, 너나없이 불의에 항거하는 정치 이념을 앞세우며 국가 혁파를 향한 ‘투쟁’ 대열에 모여들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현직 판사는 정권교체가 자신의 정치 신념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에 “분노하라”면서 “더 두드려야 더 빨리 변할 것”이라며 자신의 정치적 편견을 명시적으로 공표하고, 실제로 재판에서 이를 반영하고 있다는 의혹이 뉴스를 타고 있다.

그뿐인가. 공영방송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이 자신들의 정치 이념을 앞세워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짓밟고 교활한 편파 방송을 일삼는가 하면, 정치 행위가 금지된 교사들마저 이념 집단을 구성해 교육 현장에서 자신들의 편협한 정치 신념을 관철하려 한다. 교수들은 강의실을, 종교인들은 성전을, 노동자들은 일터를, 예술인들은 공연장을 너도나도 ‘정치투쟁판’으로 변질시킨다. 자신들의 활동 영역에서 요구되는 고유의 직업 가치를 실천하기보다 급진적 정치사상에 오염된 낡고 편벽하고 왜곡된 사명감의 실현을 위한 투쟁에 몰두한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구국과 개혁의 기치 창검을 내걸고 국가 개조의 투쟁 대열에 분별없이 모여드는 것이야말로 ‘공직의 정신’을 훼손하고 국가 질서와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을 혁파해야 한다는 과도한 사명감에 사로잡혀 눈멀고 귀 막힌 지식인 군상, 이것이야말로 혁파돼야 할 대상이다. 지식인들은 자베르 경감과 베버의 정신을 되새기며 직업 현장에 복귀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당장 필요한 개혁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는 자베르 경감 같은 강직한 직업 정신을 소유한 사람 1명이 신념 가치에 함몰된 지식인 1000명보다 더 필요하다.

박승관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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