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닫기
엠스플뉴스 Sports

[배지헌의 브러시백] 임병욱의 작은 기다림, 큰 도전

엠스플뉴스님의 프로필 사진
21,922 읽음

20160128_225143.jpg

넥센의 새로운 센터, 임병욱은 올 시즌 자신의 감춰뒀던 야구 열정을 마음껏 분출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경기도 화성 집에서 네 식구가 살던 시절, 덕수고 1학년생 임병욱은 매일 시외 버스를 타고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등교길을 오갔다. 등교하는데 두 시간, 다시 하교하는데 두 시간. 


버스 뒷자석에 가만히 앉아 학교로 향할 때면, 임병욱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조금 뒤 학교에 도달하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운동장과 경쾌한 타구음, 글러브의 냄새 같은 것들을 생각했다. 


“야구가 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임병욱이 말했다. “경기도 분당에서 서울 학교로 전학을 왔기 때문에 1년 동안 경기 출전이 불가능한 상태였어요. 경기는 나가지 못하고 선배들 뒷바라지를 하며 남들이 야구하는 모습을 보기만 했죠. 빨리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1년을 기다렸어요.”


왕복 네 시간 등교길이 지겹다거나 불만스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집에 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임병욱의 말이다. “형도 집 근처에서 학교를 다녔고, 부모님 직장도 집 근처인데 저 하나 때문에 모두가 옮길 수는 없으니까요. 그냥 그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임병욱은 그런 사람이다. 불평 불만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핑계를 대고, 남을 탓하며 도망갈 구멍을 만드는 대신 ‘어 그래? 그럼 한번 해볼까’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할 일을 한다. 그리고 때가 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린다. 매일 네 시간씩 학교와 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버스를 타던 때처럼, 선배들의 심부름을 하며 보낸 전학생 출전금지 기간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넥센 입단 직후 입은 발목 부상으로 1년을 재활로 보낼 때처럼 말이다.


“발목 수술을 받고 깁스한 채 오랫동안 누워서 지냈습니다.” 임병욱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만히 누워서, TV로 우리 팀이 경기하는 모습을 봤어요. 보면 볼수록 빨리 나가서 뛰고 싶다, 나도 저 자리에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그리고 제가 야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새삼스럽게 느꼈죠.” 


다시 만난 넥센, 그리고 중견수

mug_obj_146310606746775262.png고교 시절 주로 유격수로 활약했지만, 임병욱에게 중견수는 익숙한 포지션이다. 초등학교에서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중견수였다(사진=넥센)


화성에서 보낸 학창 시절은 왕복 네 시간 버스 이동의 고충을 준 대신, 현재 소속팀과의 소중한 인연을 선물로 남겼다. “넥센에 지명됐을 때 기분이 참 묘했어요. 초등학교 시절에 현대 유니콘스를 좋아했거든요.” 임병욱의 말이다. 지금은 사라진 현대 유니콘스는 넥센 히어로즈가 창단하는데 모태가 된 구단이다. 


“제가 처음 ‘직관’한 프로야구 경기가 수원에서 열린 현대의 홈 경기였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인데, 막 야구부에 들어가 야구를 시작한 때였죠. 현대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잘한다, 진짜 멋있는 팀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계속 야구를 한다면 저 팀에 꼭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해체된 현대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지금의 넥센 히어로즈로 새롭게 태어났다. “‘현대가 다시 생겼네?’하고 뉴스를 보면서 생각했었죠. 그런데 제가 그 팀에 지명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가고 싶던 팀을 결국에는 입단하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요.” 임병욱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 사이 현대의 상징색인 초록색은 버건디 색으로, 전설 속의 유니콘은 상상 속의 영웅들로, 수원야구장은 고척스카이돔으로 바뀌었지만 그대로인 것도 있다. 야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도 지금도, 여전히 임병욱은 넓다란 외야의 한 가운데를 지키는 중견수다. “달리기가 빠르다는 이유로 중견수부터 보기 시작했어요.” 임병욱의 얘기다. 


“나중엔 유격수로 갔다 중학교 때는 외야와 유격수를 오갔고, 1루수와 2루수, 투수도 모두 경험했죠.” 그럼 안 해본 포지션은? “포수만 아직 못 해봤네요.”


물론 덕수고등학교 시절부터 임병욱의 모습을 본 사람에게는, 중견수보다는 유격수자리에서 내야를 휘젓고 다니는 임병욱이 더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유격수치고는 눈에 띄게 큰 키에 긴 팔다리를 움직이며, 임병욱은 내야에서도 곧잘 자신의 몫을 해내곤 했다. 


"물론 프로 가서 유격수를 봐도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임병욱이 고교 3학년일 때 덕수고 정윤진 감독이 했던 말이다. "다만 병욱이가 유격수를 보는 건 팀 사정 때문에 맡긴 면이 있거든요. 나중에는 포지션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정 감독의 예상은 적중했다. 올 시즌 임병욱은 유격수가 아닌, 원래 포지션인 중견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몽고 초원만큼이나 광활한 고척 스카이돔 외야의 한 가운데를 지키고 있다.


"임병욱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입니다." 넥센 염경엽 감독의 말이다. "선수마다 자기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자리가 따로 있어요. 유격수를 계속 본다면 수비가 좋은 유격수라는 평을 듣기는 힘들 거예요. 이미 팀에 김하성이라는 뛰어난 유격수도 있고요. 하지만 외야수를 보면 얘기가 달라지죠. 수비도 좋고 발도 빠르고 타격도 잘 하는, 아주 좋은 외야수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게 선수가 사는 길이죠."


실제로 외야 수비에서 임병욱은 자신의 역할을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내고 있다. 내야를 지나면 바로 펜스가 나타날 것만 같던 목동야구장과 달리, 고척스카이돔은 외야가 넓고 이 때문에 좌중간-우중간 사이로 빠지는 타구가 나오기 쉽다. 외야 수비력이 약한 팀은 살아남기 쉽지 않은 환경이다. 고척에서의 첫 시즌을 앞두고 넥센이 임병욱을 주전 중견수로 낙점한 이유다.


"팀의 외야 수비력이 이전보다 강해졌습니다." 염경엽 감독의 말이다. "임병욱 선수가 중견수에서 넓은 수비범위를 보여주고 있어요. 발도 빠르고 좌우 수비폭이 넓어서 빠지는 타구를 잘 처리해 냅니다." 


임병욱 역시 새로운 포지션에 만족하는 모습이다. "학창 시절에도 감독님이 포지션을 바꾸라고 하시면 군말없이 따르는 편이었어요. 제가 프로에서 내내 유격수만 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거든요. 그것도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포지션이든지 소화할 수 있게 지금 경험해 둬야겠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했죠."


이제는 오히려 내야를 보면 어색할 것 같다고 했다. "내야 펑고를 한동안 안 받다 오랜만에 받았는데, 땅볼 타구가 무섭더라구요." 임병욱이 웃으며 말했다. "구장이 워낙 넓어서, 멀리 가는 타구도 계속 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돔구장 천장에 공을 놓치는 것만 조심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임병욱이 중견수에 배치되면서, 지난해까지 중견수를 본 베테랑 이택근이 우익수로자리를 옮겼다. 자신보다 팀을 먼저 생각하는 베테랑은 후배에 대한 배려도 각별했다. "이택근 선배께서 개인적으로 조언을 많이 해주세요. 수비는 물론 타격, 주루까지 조언해 주시고 경기장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려 주시곤 합니다." 임병욱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사실 제가 까마득한 후배라서 선배님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오히려선배님이 먼저 제게 다가와 주시더라구요. '방망이는 잘 맞니?' '수비는 잘 되니?' 하면서 친근감 있게 대해주시고,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해 주셔서 큰 도움을 받고 있어요. 정말, 정말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병·욱·본·색

mug_obj_146310606804483150.jpg시즌 초 1할대 타율에 그치는 동안에도, 넥센 지도자들은 임병욱이 조만간 껍질을 깨고 좋은 활약을 해줄 거라는 믿음을 보였다. 5월 들어 임병욱은 활화산 같은 활약으로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사진=넥센)


임병욱을 오랫동안 지켜본 한 스카우트는 "마치 화산 같은 느낌을 주는 선수"라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고 잠잠하지만,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다가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화산 같달까요. 병욱이도 겉보기엔 차분하고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파이팅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했죠. 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 조용한 모습 속에, 야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는 선수에요. 한번 그 잠재력이 제대로 분출되는 날에는, 모두가 깜짝 놀랄 모습을 보여줄 겁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이 호언장담은 지난 주말 넥센이 KIA를 불러들여 치른 홈경기에서 현실이 되었다. 8일 KIA전, 이날 임병욱은 경기 후반 두 방의 결정적인 홈런을 때려내며 팀의 역전승을 이끌었다. 팀에 4-2로 앞선 세 번째 타석에서 고척스카이돔의 가운데 담장을 훌쩍 넘기더니, 5-6으로 패색이 짙던 9회말 마지막 타석에서는 우중간 펜스 너머로동점 홈런을 날려 보냈다. 다이아몬드를 돌아 덕아웃에 들어온 임병욱은 큰 소리로포효하고 주먹을 휘두르며, 그동안 꼭꼭 숨겨온 열정을 마음껏 분출했다. 


"이젠 됐어요. 병욱이가 드디어 감을 잡은 것 같아요." 넥센 스카우트 자문을 맡은 주성노 이사의 말이다. "시즌 초반 타격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을 텐데, 이제부터는 정말 잘 할 겁니다."


하지만 주위의 걱정과는 달리, 임병욱 본인은 시범경기부터 4월까지 1할대 타율에 그치는 동안에도 조급해 하거나 자신의 페이스를 잃은 적이 없다. 


"지금 안타를 몇 개 치고 이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진 않아요." 임병욱이 한 말이다. "그보다는 제 느낌이 중요합니다. 안타를 쳐도 제가 원한대로 쳐서 나온 안타일 때는 만족할 수 있지만, 원한대로 안 되면 생각이 많아지거든요. 제 느낌이 괜찮아요."


4월 한달간 타율 0.167로 부진하던 임병욱은, 5월 들어 13일 현재까지 타율 0.625에 3홈런 4타점 2도루로 넥센이 기대했던 바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타율은 어느덧 0.271까지 끌어 올렸고, 5개의 도루와 안정적인 수비로 매 경기 넥센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하는 중이다. 


"올 시즌에는 타격, 주루, 수비 세 가지 모두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 드릴 겁니다." 임병욱이 시즌 전에 했던 다짐이다. "도전 한 번 해볼게요. 목표는 크게 가질 수록 좋잖아요."


그리고 왕복 네 시간씩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학창 시절과 달리, 임병욱은 더 이상 야구 열정을 마음 속에만 품고 있을 필요가 없다. 기다림의 시간은 끝났다. 넓은 고척 스카이돔 외야가 그의 앞에 펼쳐져 있다.


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 엠스플뉴스 & MBC스포츠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원익의 휴먼볼] 2017 WBC 1R 韓 개최 유력, 청사진은?

[팩트체크] 한화 부진의 근본적 문제는 '회장님 야구'다.

김성근과 한화의 잘못된 만남

[이현우의 MLB 노트] '한 경기 20탈삼진' 슈어저, 뭐가 달라졌나

[더 파이브] 프로야구 임의탈퇴 잔혹사 5

[인사이드아웃] ‘빅초이’ 최희섭, MLB 해설가로 데뷔 

더 많은 뉴스 보기 www.mbcsportsplus.com

로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