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욕쟁이 이모 눈에 밟혀 찾아가는 식당처럼…헤드윅 두서없는 이야기 빠져든 순간 유연석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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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4.17. 오전 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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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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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헤드윅' 14번째 시즌
7년만에 돌아온 유연석 주목
두겹 스크린 등 영상장치 눈길
[서울경제]

/사진 제공=쇼노트


“내 얼굴엔 메이크업/ 이 예쁜 선물 가발을 쓰면/ 어느새 난 무대에 선 노래하는 펑크 록스타 / 난 이제 다시 돌아가지 않아” (헤드윅 ‘위그인어박스(Wig in a box)’ 중)

형광 연두색 망사 스타킹, 숏팬츠에 청재킷. 아찔하게 들어올려 완전 무장의 요새를 떠올리게 하는 속눈썹까지 잔뜩 힘을 준 헤드윅이 관객석 뒤편에서 등장했다.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손 내미는 가운데 한 남자 관객이 돌아보지 않자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자신의 얼굴로 끌어당겼다. 얼굴이 빨개진 당사자 빼고 환호성이 터졌다. 헤드윅의 유연석 배우가 직접 관객들과 스킨십을 하는 강렬한 방식이다.

2005년 대학로에서 시작해 올해 서울 잠실 샤롯데시어터에서 14번째 시즌을 맞은 ‘헤드윅’. 뮤지컬 속 주인공 헤드윅의 첫 미션은 관객을 재빨리 잠실을 벗어나 뉴욕 브로드웨이의 외딴 밀레니엄 극장으로 끌고 가는 것. 그렇다고 무리를 하지는 않는다. 다만 경고할 뿐.

“이따가 호응 안 좋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야. 다섯시간 할 수도 있어.” 관객들은 한술 더 뜬다. “1박2일 가요.” “이것들아 한 번 더 돈 주고 티켓 사. 장사 어떻게 하라는거야.”

호스트인 헤드윅은 관객들과 실랑이를 벌이거나 타박을 하기도 하고 밑도 끝도 없는 한탄을 늘어놓는다.

이야기는 중구난방이고 자주 화제가 바뀐다. 하지만 욕쟁이 이모가 홀로 자리를 지키는 가게가 괜히 눈에 밟혀서 다시 찾는 것처럼 관객들은 헤드윅을 떠날 수 없다. 이미 그 순간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배우의 예전 이미지는 사라진다. 헤드윅에 빠져드는 시간이다.

/사진 제공=쇼노트


뮤지컬 중 헤드윅은 ‘분노의 질주’라는 뮤지컬이 급하게 막내리면서 무대 세트도 치우지 못한 황폐한 극장에서 공연을 한다. 위치상 대각선으로 바라보는 큰 콘서트홀에는 당대 톱 록스타인 토미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헤드윅은 토미와 사연이 있는 듯하지만 설명 또한 친절하지 않다. 이야기는 자꾸 삼천포에 빠진다. 헤드윅이 토미의 노래 선생이자 뮤즈였다고 하는데 관객들도 이게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저 무대 한편의 출입문으로 토미의 콘서트의 압도적인 열기와 두 사람 간의 현실적 차이만 느낄 뿐이다.

무대에 색을 입혀주는 건 영상 장치다. 이번 시즌 들어 처음으로 두 겹의 스크린을 썼다. 뒷 배경에서 거친 질감의 팝아트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기도 한 그림이 전개되는가 하면 공연하는 헤드윅 앞에도 스크린이 펼쳐져 여러 겹에 둘러싸인 헤드윅을 만난다. 이를 위해 세 달에 걸쳐 백여장의 초안을 만든 뒤 단 하나의 스타일을 골라냈다는 설명이다. 두 개의 반쪽이 합쳐지는 장면은 무대 전체 연출을 통틀어 압권으로 꼽힌다.

/사진 제공=쇼노트


헤드윅이 꼬여버린 데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당하고 이후 성전환수술까지 실패한 뒤 얻은 상처가 회복되지 못한 탓이 크다. 이를 거친 말들과 가발, 화려한 메이크업으로 감춰보지만 지켜보는 관객들에게는 안타까움이 커진다.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던 헤드윅이 토미와 대화하며 과거를 마주하는 부분부터 감정의 밀도는 극대화된다.

상처라는 속박을 벗어난 헤드윅은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자신의 남편인 이츠학에게 가발을 절대 찾지 말고 남자로 살라고 강요했지만 이제 그에게 가발을 준다. 이윽고 핑크색 가발을 쓴 채 설레는 표정의 여인으로 나타난 이츠학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미드나이트 라디오’에서 느끼는 희열은 관객들에게도 전염됐다. 결국 ‘남자도 여자도 아닌’ 헤드윅이 진짜로 찾아 헤맸던 오랜 반쪽은 상처입기 전의 헤드윅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유연석 배우는 앙코르곡을 4곡이나 했고 러닝타임은 150분을 넘어섰다.

기자 프로필

2021~23년 실리콘밸리 특파원을 거쳐 2024년부터 문화부에서 책, 지식, 공연, 종교를 취재합니다. 배우는 데 만족하지 않고 크로스보더 지식 플랫폼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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