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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 11회]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2022.05.16. 오후 8:01
by 철학커뮤니케이터

"인간이 쓸쓸할 때가 제일 제 정신 같아요. 그래서 밤이 더 제 정신 같아.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 제목 적어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 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91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오십 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어디 한 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이불 속에서도 불안하고 사람들 속에서도 불안하고...

'난 왜 딴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애...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나는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의 독백 중에서

사진작가: Wsdidin 출처: pexels

"인간이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 같아요"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친다. 완전히 제 정신으로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완전히 제 정신이면 ‘살아간다=죽어간다’는 진실을 직면해야만 한다. 이 진실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할 수 없다. 혼자일 때는 가슴 밑바닥의 진실이 올라온다. 그래서 이 묻어두고픈 진실이 스멀스멀 분명해지려 한다. 그러니 쓸쓸할 때가 제일 제 정신이라는 것이 말이 된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는 혼자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철학의 제1의 물음은 ‘도대체 이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가? 왜 無가 아니고 有인가?’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존재는 있음이니 우리는 없음을 경험할 수 없다. 있음과 없음을 모두 경험할 수 있어야 있음에 대해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는 없음을 경험할 수 없으니 당연히 있음의 의미를 말할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답이 궁금하다. 나의 있음의 의미가 궁금하다. 그래서 답이 안나오는데도 생각하게 된다.

철학에서는 이 물음을 형이상학적 물음이라 한다. 형이상학은 ‘자연적인 것 너머의 것’을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인간은 답이 나오든 안나오든 의미를 묻는 존재이다. 의미가 충족되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지만 의미가 충족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워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나의 존재의 의미는 외부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나의 존재는 나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 존재다. 그러니 내가 내 존재의 의미를 선택해야 한다. 내가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인간은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에서는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좋아한다. 인간은 본능과 욕망에 결정당하기 쉬운 존재인데 본능과 욕망을 넘어서는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 본능과 욕망에 결정당한 자기 자신에게는 실망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아닌 것에서 의미를 느끼는 존재이므로 자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의미를 느끼는 삶을 살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의미를 느끼는 인간의 특성에 대해 파악하고 자신에게 어떤 것이 의미있게 느껴지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배워나가야 한다.

“이불 속에서도 불안하고 사람들 속에서도 불안하고” 근본적으로 인간은 불안하다. 스스로 존재를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차리고 보니 이미 태어나있었는데 설상가상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불안한 존재이다. 그 불안을 이기기 위해 그 불안을 직면하지 않게 해주는 마취제(돈, 권력, 명예 등등)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마취제에 취해 살아도 불안은 느껴진다. 불안을 회피하는 데 얼마나 성공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누군가는 교수의 페르조나를 쓰고 살고 누군가는 학생의 페르조나를, 누군가는 엄마의 페르조나를 쓰고 산다. ‘교수다움’이 뭔지를 모르지만 교수는 교수다와지려 노력하고 ‘학생다움’이 뭔지 모르지만 학생은 학생다와지려 노력한다. ‘부모다움’이 뭔지 모르지만, 엄마는 엄마다와지려, 아빠는 아빠다와지려 노력하며 산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부모다움이 뭔지를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 그래도 좀 더 부모답다는 것이다. 이 물음을 팽개치지 않고 이 물음의 무거움을 기꺼이 견딜 때 부모다움에 대한 윤곽이 조금 더 잡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 인간다운 사람은 인간다움이 뭔지를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다. 머리 아프다고 쉽게 물음을 내려 놓지 않고 인간다움을 끝까지 묻는 사람이다. ‘진짜 나’도 이런 식으로 찾아나가야 한다. ‘인간다움’, ‘자기다움’이 뭔지를 끊임없이 물으면서 그 물음을 견디며 살아내면서 ‘진짜 나’를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을 철학에서는 ‘현존재(現存在, Dasein)’라 칭한다. 이들은 남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 살아간다. ‘무엇이 나다운가?’ 등의 질문은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것이 인간의 특징인데 현존재는 존재를 문제 삼는 것이 피곤하고 힘들어서 이 물음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철학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방식의 존재양식을 ‘실존‘이라 칭하고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지 않고 타인들의 기준을 받아들여 사는 사람의 존재양식을 ’현존재‘라 칭한다. 실존적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유능하지 못하다. 이에 반해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지 않는 사람들(현존재에 그치는 사람들)에게는 돈, 권력, 명예 같은 타인들의 기준이 너무나 중요해진다. 그런데 인간은 근원적으로 현존재에 그치는 자기 자신에게는 실망한다. 그 실망을 스스로에게도 감추기 위해 신상품을 사고 아파트 평수를 늘린다. 그리고 소비가 주는 만족감에 도취되기 위해 소비를 위한 돈을 버는 데 주력한다. 인간다움의 가치와 돈이 충돌하면 인간다움의 가치를 포기한다.

인간에게는 피하기 어려운 경향성이 있다. 이 경향성은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고자 하는 경향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자고 일어나서는 불만족감, 불충분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향성대로 행동하게 되지만 그 경향성의 결과에는 만족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 잘못된 쳇바퀴돌기의 허무함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경향성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향성의 문제점을 의식하는 사람일수록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건국대학교 강의교수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저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철학적 성찰력의 힘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 삶에 닿아있는 철학을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일반인과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철학커뮤니케이터의 역할을 하기 위해 철학커뮤니케이션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를 쓴 이후, <인간관계에 대해 철학하기>,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카운슬링>, <삶을 견디고 있는 당신을 위한 철학>, <행복은 인식의 균형에서 온다> 등의 제목의 강의로 일반인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EBS Books),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소울메이트)를 단독으로 썼고, 『철학, 삶을 묻다』 『미래인문학 트렌드』 『왜 철학상담인가』 등을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썼으며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를 단독으로, 『철학Ⅱ:실존조명』, 『50인의 철학자』를 함께 번역했다. 저서링크: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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