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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전박찬, 루이스에 대한 각주_연극 <라스트 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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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7. 10:11798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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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박찬, 
루이스에 대한 각주

연극 <맨 끝줄 소년>에서 친구의 엄마를 차지하려는 소년 클라우디오, <에쿠우스>에서 말의 눈을 찌르는 소년 알런, <이방인>에서 햇살이 눈이 부셔 살인을 저지르는 청년 뫼르소. 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깊이 각인된 배우 전박찬의 이미지는 이렇다. 조용하고 무난한 겉모습과 달리 결핍 또는 욕망, 광기를 숨긴 소년, 혹은 단단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부서질 듯 여린 심성을 가지고 청년. 그와 달리 이번 <라스트 세션>에서 전박찬은 마흔의 루이스를 연기한다. 
editor 김일송  photographer 김선진



어떻게 이번 <라스트 세션> 공연에 참여하게 되었나요. 
<로드킬 인 더 시어터> 공연을 올렸을 즈음인 것 같아요. 파크컴퍼니 박정미 대표님이 대본을 하나 보내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재공연에 2인극이고, <로드킬 인 더 시어터> 끝나고 바로 1달 반 연습해서 올려야 하는 게 평소 패턴이랑 맞지 않아서……(고사하려 했어요) 하지만 대본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는 작품인 거예요. 초연 리뷰도 굉장히 좋았고요. 텍스트와 리뷰로 확신이 들었어요. 재공연이라는 부담이 있었지만, 신구 선생님과 오영수 선생님이 출연하시겠다고 하셔서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동안 ‘여기는당연히극장(이하 여당극)’의 작품에 주로 참여하셨습니다. 여당극의 작품에 일관된 정서가 있는데, 그런 점에서 <라스트 세션>은 결이 조금 다른 작품 아닌가요?
그렇죠. 그런 면에서 도전이기도 했어요. <라스트 세션>은 프로이트의 서재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무대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의 집을 구현한 무대에 서는 경험이 거의 없었어요. <7번국도>는 빈 무대에 자동차 부품들을 놓았고, <이방인>은 원형 무대, <맨 끝줄 소년>은 책상 4개만 있었어요. 이렇게 벽체가 있는 사실적인 무대는 대학 이후로 처음 같아요. 무대가 다르면, 연기도 평소와 다른 연기를 하게 되니까. 데뷔할 때처럼 어려운 경험을 하는 것 같아요. 다시 배우는 기분이에요.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실존 인물을 연기해야 하니 인물의 성격을 잡는 일부터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아요.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먼저 초연이라는 든든한 재료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오경택 연출님이 초연 때 만들어놓은 걸 고집하지는 않으셨어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또 초연에 출연하신 신구 선생님도 마음대로 하라고 자유를 주셔서 마음대로 연습할 수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을 많이 연기했는데, 이 작품은 그렇게 연기해선 안 될 작품이더라고요. 그래도 루이스가 기독교인이었고, 제가 기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됐죠. 이전에도 들어본 이름이었고, 공연 준비하면서 루이스의 책과 루이스와 친구(톨킨)에 관한 책도 읽어봤어요. 그런 점에서 재료가 많아 도움이 되었어요. 또 루이스나 프로이트를 실제로 만나본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도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게 열려있던 것 같아요. 

여당극 작품도 많이 출연했지만, 이전에 <이방인>의 뫼르소, <에쿠우스>의 알런, <맨 끝줄 소년>의 클라우디오 등 소년이나 청년의 역할을 많이 맡았어요.
<선샤인의 전사들>의 나선호라는 인물은 극중에서 여섯 살부터 시작해요. 그래서 관객분들이나 연극계 동료분들 중에 제 나이보다 훨씬 젊게 봐주시는 시선들이 있어요. 제가 마흔하나라고 하면 다들 놀라세요. 제 나이를 지운 작품도 있지만, 제 나이를 연기한 작품도 있어요. 예를 들어 <떠도는 땅>에서는 귀신 보는 무당 역을 맡아 나쁜 남자 연기를 했고, <그 샘의 고인 말> 2015년 공연 때에는 ‘샘’이라고 300년 산 정령 역할을 맡아 나이 많은 노숙자처럼 보이는 연기도 했어요. 아마도 청년 역을 했던 작품을 많이 보셔서 그런 것 같아요.

나쁜 역할이라니 연상이 되지 않네요. 그동안은 (내면의 광기를 숨기고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선한 인물을 자주 연기한 것 같아요. 
제가 연기한 인물들이 선한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죠. <맨 끝줄 소년>의 클라우디오도 선함과는 이질감이 있는 인물이고, 알런도 그렇고, 뫼르소도 실존적인 인물이지 선하진 않잖아요. 다만 그렇게 많이들 읽어주시는 것 같아요. 관객들이 다양하게 읽으실 수 있도록 인물을 다각도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사실 공연할 때는 여력이 없어서 그런 계산까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라스트 세션> 프로그램북을 보면, ‘허술하지만 선하고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인 루이스’를 연기하려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텍스트 속 루이스는 그 반대인 것 같아요. 선하긴 하겠지만, 프로이트와 논쟁을 벌이려는 루이스의 모습이 보이는데, 일부러 반대 성향의 루이스 모습을 더하려 한 건지 궁금합니다.
일부러 다르게 하고 싶은 욕심까지는 없었어요. 이 작품에 루이스에 대한 정보가 많지는 않아서, 루이스의 성장기와 회심기를 찾아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프로이트를 만나기 전의 전사(前史)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먼저 ‘허술하다’라는 표현에 대해 사실은 제가 ‘허술한 캐릭터를 연기하겠다’로 생각하실까 봐 걱정되었어요. 루이스에 대해 재미있는 정보 중 하나가 손가락 관절이 하나밖에 없었다는 건데요, 그래서 인물 자체가 엉성함이 있었다는 글이 있더라고요. 그걸 토대로 작품을 읽으니까 루이스의 변증법이란 게 어떻게 보면 완벽한 논리로 해석이 안 되고 비약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허술하다’라는 건 그런 면에서 이야기한 거였어요. 그리고 루이스가 프로이트를 정말 많이 알고, 상당히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지만, 극중에서는 여기(프로이트의 서재)에 와서 프로이트의 고통을 들여다보게 되잖아요. 처음 신에 대한 논쟁으로 작품이 시작했다면 나중에 프로이트로부터 유대인 탄압, 암, 가족 문제를 들으면서 인간 프로이트에 집중해 삶과 죽음에 관한 토론으로 번져버리는 것 같았어요.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쓴 건, 그런 면에서 ‘인간적인 면이 부각되는 작품’이라는 의미였어요. 처음에는 프로이트를 이기려고 하던 루이스가 프로이트를 들여다보게는 되는 게 이 작품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다면 ‘허술하지만 선하고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인 루이스’는 전박찬의 루이스인가요? 혹은 이상윤 루이스도 같은 해석일까요?
농담 식으로 이상윤 배우님과 “우리는 쌍둥이처럼 생겼지만 다른 루이스로 보였을 때 관객들이 좋아할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일부러 다르게 만든 부분도 있지만, 워낙 둘이 다르잖아요. 키도 다르고, 그동안 연기해온 방식도 다르고요. 자연적으로 다른 부분이 생긴 것 같아요. 저에게 있어 프로이트의 고통, 한 젊은이에게 보여주는 속 깊은 이야기가 가장 중요했다면, 어떤 창작진에게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중요할 수도 있고, 신에 대한 논쟁이 중요할 수도 있죠. 저도 기독교인이지만,  -청소년기에 회심까지는 아니지만-신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한 적이 있어요. 욥기를 읽으면서 하느님이 정말 너무 하셨다는 생각도 했거든요. 기독교에 대한 고민은 일곱 살 때부터 했어요. 그런 면에서 루이스의 변증법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죠.

기독교인이라는 점이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나요?
연습 중 힘들었던 날이 있어요. 아주 오랜만에 이런 의심이 드는 거예요. ‘신이 없으면 어떡하지?’ 루이스는 신이 있고,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잖아요. 그런데 프로이트의 고통을 보면서 흔들리는 지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가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어요. 그러면서 스스로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을 찾기도 했고요.

루이스라는 인물에 빠져서 고통을 같이 느끼는 건가요?
오히려 루이스라는 인물에서 빠져나와서 고통을 느낀 것 같아요. 신구 선생님을 보면서요. 자기의 고통을 토로하는 노학자에게 “그래도 신은 있다, 신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주장은 하지만, 더 이상 신으로는 설득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았어요. 자살 혹은 존엄사의 이슈가 나올 때 국면이 바뀌면서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가 아니라 “당신 같은 훌륭한 학자가 자살하면 안 된다, 고통과 싸워 이겨야 한다”라고 설득하거든요. 그렇게 제가 작품 초반에는 신실한 루이스의 모습을 보이지만, 뒤로 갈수록 마음이 동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작품이 뒷부분으로 갈수록 인간적으로 간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신에 대한 논쟁은 놓지 않아요.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에서 프로이트가 농담을 던져요. 무신론자와 목사가 임종을 앞두고 싸우는 이야기를 하는데, 프로이트가 “결국 보험외판원인 무신론자도 죽었다”라고 하거든요. 대사에서는 보험이라고 해서 제가 영어를 찾아봤어요. 원작에는 ‘Insurance’라고 쓰여있는데, 보험이라는 게 생명보험, 화재보험 같은 것만이 아니잖아요. 신에 대한 보험 같은 것까지도 확대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한 번도 신에 대한 논쟁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촘촘하게 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프로이트의 “말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라는 대사가 와닿더라고요. 연극에서도 행간에 숨겨놓은 게 있을까요?
너무 많아요. 관객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방독면에 관해 이야기할 때 프로이트가 “우리 동네 여자애들이 좋아한다”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어요. “여자아이들이 (방독면을) 색깔별로 바꾸기도 하고, 미키마우스라 부르기도 한다”고요. 그때 루이스가 “남자아이들도 좋아한다”라고 이야기해요. 프로이트가 페미니즘에서 비판을 받는 학자인데, 작가가 그 부분까지 건드렸는가 생각하기도 했어요. (드러내놓고)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프로이트는 “여자아이들이 철이 없다, 전쟁의 끔찍함을 모르고 놀기만 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거기에 루이스가 “남자아이들도 철없기는 마찬가지다”라고 이야기해요.

20세기였으니, 루이스도 지금과 같은 젠더 의식은 없었을 텐데요.
사실 프로이트나 루이스나 젠더 이슈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남자들이죠. 사실 삭제된 대사 중에 스트리퍼에 대한 부분도 있어요. 지금 시대에 맞지 않고, 삭제해도 내용 전개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 초연 때부터 뺐던 것 같아요. 작가가 두 명의 지성을 붙여놓고 싸움을 시키는데, ‘여자애들’, ‘남자애들’ 이러니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또 하나, 프로이트가 루이스에게 하는 대사 중에 “선생 같은 지성인이 어떻게 세상을 흑백으로만 보느냐, 이 세상은 수천수만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대사가 있어요. 그런데 다음 대사가 “따님도 알고 있느냐”인데요, 저는 작가가 위트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프로이트가 인간은 모두 양성애자라고 이야기하지만, 딸 안나 프로이트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으려 하죠. 안나가 레즈비언이었다는 사실은 프로이트의 평전이나 여러 책에 나오는데 말이에요. 그런 장면이 왕왕 있어요. 덕분에 대본을 즐겁게 읽었어요. 저는 초연의 스터디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니까 다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43페이지짜리 대본을 외우는 과정도 지난해서 그런 부분까지 토론할 여력이 없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한땀 한땀 채워가는 심정으로 연습을 했어요. 어떤 이유에서 나온 대사인지. 

관객들이 그런 행간을 눈치채는 것 같나요?

관객들은 예리하고 정확해요. 제 호흡이 불안할 때는 같이 흔들리기도 하고, 집중할 때는 같이 집중해주시는 것 같기도 하고.  (<이방인>을 했던) 산울림소극장은 공간이 작고, 무대 바로 앞에 객석이 펼쳐져 있어서 시선을 두기가 어려운 공간이잖아요. 자기 확신이 없으면 관객에게 금방 들켜버리죠. 다른 개념적인 작품(여당극의 작품)을 할 때는 관객을 정면으로 보고 주변 배우와 대사를 주고받는 터라 관객을 만나는 건 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을 하면서, 상대 배우와의 호흡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처절하게 느끼고 있어요.  

신구, 오영수 배우님이 두 분이 상대 배역이세요.
두 분 선생님이 아주 달라요. 전에 <에쿠우스> 때도 두 다이사트를 만났는데, 그때는 별 차이를 못 느꼈어요. 그런데 지금은 두 분의 호흡이 워낙 달라요. 신구 선생님이랑 속사포처럼 대사를 주고받을 때는 빨리 주고받는 재미가 있고, 오영수 선생님이 살살 놀리실 때는 또 그런 재미가 있어요. 두 분의 눈빛도 다르세요. 신구 선생님은 눈동자가 굉장히 까맣고 빛나는데요, 그 눈을 볼 때 일순간 긴장이 풀어질 때가 있어요. 반면에 오영수 선생님은 갈색에 매서운 눈매거든요. 가끔은 나를 노려보고 계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그런 눈빛을 커튼콜까지 이어가세요. 사실 그전에는 상대 배역의 눈을 보고 연기하는 작품이 많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서는 묘한 떨림 때문인지 눈 보고 연기하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결국은 눈을 보고 하는 거잖아요.



눈을 보고 하는 것이 비단 연극뿐일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와 여러 번 눈이 마주쳤다. 속수무책이다. 그의 눈을 보고 그에게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소년에서, 청년으로, 다시 장년으로, 깊어지는 건 그의 연기만이 아니다. 눈빛마저 깊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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