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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세상에 던져졌기에 공허감을 느낀다

2022.10.20. 오전 6:00
by 철학커뮤니케이터

인간은 세상에 던져졌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피투(被投)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존재하기로 결정해서 존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결정 없이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에 근본적인 불쾌감이 있습니다. ‘내가 언제 존재하겠다고 한 적 있어?’라는 불쾌감이지요. 인간의 진실은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합니다. 결정되는 것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불쾌감을 느낍니다. 이 삶이 나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기에 불쾌합니다. 더더군다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가족, 성별, 외모 등등)으로 던져졌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또 인간은 언젠가는 죽고야 맙니다. 의식의 차원에서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아등바등 살다가 결국 어떻게 되는 거지...?’의 깊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문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으면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문제 삼아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라는 진실을 직면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해서 살지 못하면 무언가 텅빈 느낌, 즉 공허감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느낄 때 충만감을 가집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고민하지 않으면 이러한 충만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느끼게 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잘 삽니다. 돈, 권력, 명예 등등을 누리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누리면서 얻는 만족감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돈, 권력, 명예를 누리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을 실존철학에서는 ‘현존에 그친다’고 표현합니다. 현존은 주어진 조건에 안주하며 살면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지 않는 존재의 방식을 칭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근본적으로 실존이고자 합니다. 실존은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기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그 존재방식을 스스로 선택해가는 인간 고유의 특징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공허감을 느끼는 것은 실존으로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집에 돈이 얼마 있고 외모가 어떻고 사회적 지위가 어떻고 하는 것은 현존적 조건입니다. 누군가는 좋은 현존적 조건에 처해있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현존적 조건을 부러워합니다. 요즘에는 부동산이 하도 우리의 삶을 결정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건물주 부모님을 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현존적 조건이 좋다고 해서 그 현존적 조건만으로 인간이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현존적 조건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현존적 조건만 좋아지면 행복할 것 같이 느끼지만 막상 현존적 조건이 좋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시달리며 힘들어합니다. 쾌락의 역설에서 말씀드렸듯이 돈, 권력, 명예 등이 주는 만족감은 안정적으로 지속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에게는 현존에만 그치는 자신에 만족할 수 없는 층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인간을 두고 가능실존이라 합니다. 실존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현존이면서 가능실존입니다. 어떤 사람은 현존에 그치는 자기 자신에 만족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별로 문제 삼지 않고도 잘 삽니다. 현존적 조건이 좋은 경우에 현존적 조건을 누리느라 바빠서 현존에 그치는 경우도 있고, 현존적 조건이 안좋아서 그 조건을 좋게 만들기 위해 그 조건만 쳐다보느라 현존에 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 권력, 명예가 충분한 것 같은데도 공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인간이 가능실존이기 때문입니다.

가능실존의 측면이 강한 사람은 현존에 그치는 자기 자신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으며 ‘이게 전부인가?’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그래서 가능실존의 측면을 잠재울 수 없는 사람은 공허감을 강하게 느낍니다. 이런 분들은 현실의 삶을 기술적으로 잘 꾸려가는 것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혹시 공허감을 느낀다면 오히려 현존에 그치지 못해서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의 저 깊은 핵심으로부터 ‘이게 아니다’라는 신호를 예민하게 느낀다면 가능실존의 측면이 강해서 그런 것입니다. 실존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실존철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보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고 바람직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오히려 현존적 조건에 매몰되어서 그런 공허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공허감을 느끼는 것은 ‘이제부터 나로 살아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나는 찾아나가는 동시에 만들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신호를 잘 받아서 나다움을 찾아나가면서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가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건국대학교 강의교수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저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철학적 성찰력의 힘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 삶에 닿아있는 철학을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일반인과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철학커뮤니케이터로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을 올리고자 한다. 저서로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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