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칼럼은 시리즈로 구성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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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부
2부
3부
1994년 1월, BMW가 로버 그룹을 인수했다. 인수합병을 통한 규모 확장이 전 세계 자동차 업계의 생존책으로 회자되던 가운데, BMW의 CEO 베른트 피셰츠리더(Bernd Pischetsrieder)가 대중차 시장에 진입하고자 로버 그룹을 인수했다. 연 100만 대도 못 만들던 BMW 전반의 차량 생산대수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이를 주도한 베른트 피셰츠리더 스스로부터가 로버 그룹에 대한 애정이 강했는데, 미니를 설계한 알렉 이시고니스와도 혈연이 희미하게 닿아 있었다. 게다가 로버 그룹을 인수하자마자 로버 브랜드에 대해 질문하는 언론사들 앞에서 로버를 "저렴한 재규어"로 생각한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경영진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영국인 회장이 로버 그룹을 이끌기를 바랐다.
때문에 피셰츠리더는 로버 그룹 내에서 유망한 인사를 찾아보았고, 당시 로버 그룹 내에서 실적이 좋았던 고위 간부 존 타워스(John Towers)를 로버 그룹의 신임 회장으로 낙점했다. 경영방침 역시 평상시의 로버 그룹처럼 운영될 수 있도록 고도의 자치경영을 보장했다.
또한 베른트 피셰츠리더와 동료들은 로버 그룹을 시찰하며 신차 프로젝트들을 검토했다. BMW가 로버 그룹을 인수한 1994년 1월을 기점으로 이미 진전이 되어 있던 신형 MG 스포츠카, 로버 200/400 시리즈의 후속 모델인 R3과 HHR 같은 차들은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1980년대의 오스틴 로버 그룹 시절에 출시되어 노후 모델이 된 마에스트로와 몬테고 정도만 생산 중단을 발표했다.
오히려 혼다 기술력의 비중이 높은 신차 HHR을 안정적으로 출시시키기 위해, 로버 그룹과의 기술제휴 상대였던 혼다와도 만나 로열티 협상을 진행했다. 또한 피셰츠리더의 마음을 사로잡은 프로젝트 몇몇은 바로 통과되어 막대한 재정 지원까지 약속받았다.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 휘하에서 개발한 프리랜더와 여러 차기 랜드로버 신차들이 대표적이었다.
로버의 중대형 세단 라인업인 600과 800의 통합 후속 모델 역시 실내외 디자인 단계에서 바로 피셰츠리더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역시 BMW 산하 로버 그룹의 메인 프로젝트로 뽑혔다. 1993년부터 로버 그룹에서 개발하던 차세대 미니 프로젝트도 통과되어 주력 프로젝트로 낙점되었다.
나아가 피셰츠리더는 그동안 로버 그룹이 추진했던 클래식 미니의 업데이트 시안들도 알아보는가 하면 고성능 미니를 만든 존 쿠퍼, 1960년대 미니의 "하이드로래스틱" 유압 서스펜션을 설계한 알렉스 몰튼을 비롯한 클래식 미니를 만들어낸 옛 인재들과도 만나 교류했다. 본래 로버 그룹에서는 처음엔 혼다에게 자사를 인수해달라고 할 정도로 BMW 인수에 예민해했지만, 이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그동안 발목을 잡았던 돈 문제가 오히려 BMW 인수로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당시 BMW의 수장이 로버 그룹에 매우 호의적이면서 적극적인 인사였고, 처음부터 로버 그룹을 존중하겠다고 하니 오히려 사기가 높아졌다.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 시절부터 투자에 우선권을 받은, 프리랜더를 비롯한 신형 랜드로버 차량들도 적극적인 투자를 받았다. BMW도 로버 그룹을 통해 간접적인 이익을 보았다. BMW가 1994년부터 자체 개발을 시작했던 SUV 프로젝트에 랜드로버에서 얻은 SUV 개발 노하우가 반영되었다.
그 결과물이 1999년에 나온 BMW의 첫 자체 SUV인 X5로, 랜드로버의 험로 주파 기술과 노하우를 참고하여 브랜드 첫 SUV로서는 높은 완성도로 호평을 받았다. 한편, BMW의 경쟁사인 메르세데스-벤츠가 자체 개발한 첫 승용형 SUV인 ML 클래스는 1997년에 출시되자마자 조립품질 문제를 비롯한 각종 문제점들로 인해 혹평을 받던 상황이었다.
기존의 자사 SUV인 G-바겐의 후속 모델을 개발할 때 미쓰비시와의 기술제휴를 시도했다가 독자 개발로 방향을 돌린 점 역시, 아예 SUV 특화 제조사 랜드로버의 노하우를 활용한 BMW X5의 호평을 더 두드러지게 해 주었다. 모두의 열정이 똘똘 뭉치니 초반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로버 그룹의 개발진들이 의도했든 안 했든, 로버 그룹의 주력 승용차 라인이 너무 혼다에 의존적이었던 점은 냉정하게 보면 사실이었고 문제가 될 만했다. 전 모회사였던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가 자체 개발 역량을 평가절하한 데다가 개발 지원에도 인색했던 탓에, 주력 승용차 라인들은 다수가 혼다의 기술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 내에서도 로버 승용차를 혼다 차종의 배지 엔지니어링 수준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에 로버 그룹에서는 이렇게 개발한 로버 브랜드의 신차를 팔 때마다 혼다에 로열티를 계속 줘야 하는 상황이라, 혼다 기술력에 기반한 신차들을 만드는 한 지속적인 지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혼다와 로열티 협상을 해서 부담을 낮추려고 했음에도 로열티 부담이 역으로 늘어나는 결과가 나와 BMW와 로버 그룹에게 곤란해졌다.
게다가 가시적으로 보이는 진짜 결과물은 로버의 신형 고급 세단, 그리고 차세대 미니 정도인데도 투자하는 돈이 엄청났다는 것도 이사진들의 회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실제로도 로버 그룹의 영국 내수 점유율은 약 11%, 연간 생산대수도 약 50만 대 정도에 그쳤다.
피셰츠리더가 임명한 로버 그룹의 새 회장 존 타워스도 "양보다는 질"이라는 브랜드 전략을 유지하여 판매량을 쫓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참이었다. 그래서 로버 브랜드로 신형 콤팩트 카들이 나온 지 시간이 지난 1996년에는 이들의 통합 후속 모델 프로젝트인 R30을 제시하여 로버 그룹 인수가 유의미한 투자임을 설득하고자 했다. 마케팅도 출시된 지 시간이 지난 데다가 혼다 기술력의 비중까지 높은 로버 600과 800보다는 로버에서 막 출시한 두 콤팩트카 라인업인 R3과 HHR에 집중했다.
판매량보다는 수익성과 고객 만족도에 집중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따라 로버 그룹이 개발 중이던 차기 소형차 R3과 준중형차 HHR은 준중형차급, 중형차급 가격대로 책정되었다.
이들 중 R3은 본래 메트로의 후속 차종으로서 젊은 층에게 어필할 "프리미엄 소형차"를 콘셉트로 개발했고, 이름도 메트로의 수출명이었던 로버 100 시리즈로 명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95년 말에 R3은 준중형급 모델명의 이름이었던 200 시리즈의 이름을 이어받았고, 폭스바겐 골프 같은 프리미엄 준중형차의 가격으로서도 다소 비싼 가격표를 달았다.
소형차급으로서 개발되어 준중형차 가격표를 단 신형 200은 영국 내수에서 판매량 8위를 차지하는 등으로 괜찮게 팔렸으나, 이전 세대 200만큼의 성공은 못 거두었다. 오히려 고객들 사이에서는 "작고 비싼 준중형차"로 비추어져 혼란을 빚었다.
결국 메트로는 1996년의 유로 NCAP 충돌 테스트에서 동급 차종 중 최악의 테스트 결과인 5점 만점에 1점을 기록하며 회사의 이미지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1997년 말에 불명예스러운 단종을 맞았다.
HHR의 최종 결과물인 신형 로버 400 시리즈는 고객들과 언론매체 사이에서는 전임자 대비 실망스러운 차, 그것도 플랫폼을 공용하는 유럽형 혼다 시빅과 별 차이 없으면서도 괜히 포드 몬데오나 폭스바겐 파사트만큼 비싼 차로 보였다.
그나마 로버 그룹 디자인 팀의 자체 인풋이 많이 들어간 세단 대신, 해치백으로 먼저 출시된 형제차인 혼다 시빅과 외양상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해치백 모델을 먼저 공개한 점도 시빅과 별 차이 없는 차라는 인상을 굳히기에 제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혼다에게 지불하는 로열티, 너무 비싸진 가격 때문에 쏟아붓기 시작한 막대한 가격 할인이 더해지자 로버 그룹의 수익성은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영국 파운드화의 환율까지 1997년 후반부터 불리하게 돌아갔다. 때문에 영국에서는 수입차들이 훨씬 싸게 팔렸고, 유럽 대륙에서는 로버 그룹의 신차들이 훨씬 비싸졌다.
때문에 내수에서의 판매량과 수익성을 수출로 보충한다는 로버 그룹의 판매전략이 무력화되어 적자폭이 더 켜졌다. 이때 베른트 피셰츠리더 곁에 있던 사장 볼프강 라이츨레(Wolfgang Reitzle)가 응급조치를 하나 제안했다.
미국의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과의 기술제휴가 그것이었다. 이 시기 크라이슬러는 유럽 현지에서도 미니밴과 지프 SUV를 생산하고 네온, 스트라투스, 비전 같은 차들을 수출하는 등, 1970년대 말 루츠 그룹을 매각하면서 철수한 유럽 시장으로의 재진출에 관심이 많았다.
BMW의 임원들이 크라이슬러의 부회장 밥 루츠와 회동하여 협상한 결과, 파워트레인 공용이라는 첫 성과가 나왔다. 차후 유럽에서 판매할 차세대 크라이슬러 네온과 차세대 미니가 1.6L 엔진을 공용한다는 발표였다. 하지만 크라이슬러와의 기술제휴는 1년여 만에 성과가 끊겼다.
크라이슬러의 회장 밥 이튼이 메르세데스-벤츠의 모회사인 다임러 그룹과 합병할 것을 발표하면서 막을 내린 것이 그 이유였다. 1998년에 탄생한 다임러크라이슬러가 팡파르를 울리며 자축하는 사이 로버 그룹의 적자는 계속 불어났고, 로버 R30과 미니가 출시될 2000~2003년까지 로버 그룹과 BMW가 버텨야 하는 길은 더더욱 고달파졌다.
결정타는 베른트 피셰츠리더 본인이 가하고 말았다. 1998년 영국 버밍엄 국제 모터쇼에서 진행된 로버 75의 공개 현장에서 피셰츠리더가 직접 발표한 프레젠테이션이 결정타였다.
피셰츠리더는 로버 75를 어필해야 할 자리에서 로버 그룹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으며, 로버 그룹의 경영진들과 영국 정부를 혹독하게 비판하며 영국 정부의 지원이 없다면 로버 그룹을 폐쇄할 수 있다는 공개연설을 했다. 본 의도는 로버 그룹의 노동조합에게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납득시키고 현 공장의 생산시설을 갱신할 비용을 정부로부터 얻어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는 후문이 있었으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는 되려 비용 지원을 거부했다.
오히려 언론들이 로버 그룹의 위기만을 조명함에 따라, 로버 그룹의 대외 이미지와 회사 내부의 사기까지 만신창이가 되었다. 당시 분위기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로, 1999년 이후의 로버 그룹이 얻었던 별명은 "영국인 환자(The English Patient)"였다.
이 결정타로 인해, 로버 75는 BMW와 로버 그룹 양쪽의 열정을 모두 쏟아부은 중요한 신차임에도 스포트라이트를 다 뺏겨 버렸다. 로버 75 자체는 1999년 중순에 무사히 출시되어 핸들링과 승차감을 모두 잡은 균형 잡힌 운전 역학과 세팅을 자랑하여 언론매체로부터 잘 만든 차로 평가받았지만 중형급 로버 600과 준대형급 로버 800을 동시 대체하느라 체급이 애매해진 점, 레트로가 유행하는 1990년대 후반에도 말이 많았던 고유한 복고 스타일링, 그리고 어떤 것을 어필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혼란스러운 마케팅 때문에 대실패작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BMW의 주요 이사진들도 로버 그룹에 집착하는 피셰츠리더에게 인내심을 완전히 잃었다.
그럼에도 피셰츠리더는 로버 그룹을 포기하지 않았다. 향후 차기 운영계획을 물어보며 압박하는 이사진들 앞에서도 솔직했다. 로버 그룹을 적극 지원하여 수많은 신차들을 준비하겠다는 본인의 소신을 그대로 밝혔다. 차세대 로버 콤팩트 카인 R30 기반의 라인업 확장, 로버 75 후속과 그 쿠페 버전, 미니와 랜드로버 라인업의 후속 모델까지, 로버 그룹을 위한 차기 계획은 매우 광범위했다.
6년간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하겠다고 이사진들 앞에 당당히 밝혔다. 당연히 BMW의 이사진들은 대부분 이에 공감하지 못했다. 지난 5년간처럼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초장기 대규모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폭스바겐이 로버 그룹 때문에 재정상황이 나빠져가는 BMW를 인수하려고 벼르고 있다는 소식도 피셰츠리더의 차기 비전에 반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베른트 피셰츠리더는 1999년 2월, 자진사퇴라는 명분하에 BMW 그룹에서 쫓겨나고 만다.
BMW 내에 실질적으로 존재했던 로버 그룹의 유일한 서포터였던 피셰츠리더가 추방된 뒤, BMW 휘하 로버 그룹의 미래는 더더욱 불투명해졌다. 그리고 1년 뒤에는 새로운 폭풍을 맞이하게 된다.
-에필로그에서 계속- 사진 출처, Wheel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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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투고, DENNIS K's Design Storehouse K. 강동우님
편집, CAR GO STUDIOS 문상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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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6 III CAR GO STUDI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