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이야기
첼리스트 홍진호의 음악은 가을밤처럼 깊어간다. editor 이민정 photographer 김진호
얼마 전 메일을 통해 홍진호의 새 음반 자료를 받았다. 우리가 늘상 봐왔던 클래식 음악가에 대한 이미지-가령, 첼로를 들고 먼 곳을 응시하거나 혹은 연주에 몰입하고 있다거나-에서 한참 벗어나, 그는 가죽재킷을 입은 채 라이트를 켠 차들이 지나치는 도로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조금 차가워진 밤공 기, 어둠 속에서 현란하게 빛나는 불빛들, 천천히 걷고 싶은 마음, 아니 달리고 싶은 기분일까, 그리고 써 있는 음반 제목, ‘모던 첼로’.
클래식이라는 기본 틀에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싶다던 그의 목마름을 알고 있어서인지, 여러 사람이 모여서 고심하고 또 고심해서 탄생한 사진 한 장은 유독 강렬하게 다가왔다. 16세기에도 존재했다는 이 오래된 악기를 ‘모던’ 이라 표현할 수 있는 용기, 피아니스트나 보컬리스트와 만났을 때 놀라움과 신선한 자극을 이끌어내는 컬래버레이션 감각, 세상에 없던 음과 가사를 만들어내는 작업까지… 복잡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가 건네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때는 우리가’와 ‘꽃핀다’는
소통의 어려움이 존재했던 시대를 그려보았어요.
현대 사회는 보고 싶을 때 쉽게 보고,
원하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잖아요.
서로의 만남이 더 귀하게 여겨졌던
당시의 애틋함을 담아보고 싶었어요.
지난 번 인터뷰 때 저희가 한국 근대사에 대한 얘기를 잠깐 나눴었어요. 1920년대에서 1930년대의 낭만에 대해서요.
아, 맞아요. 역사적으로 깊이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그 시대를 너무 좋아해요. 예전 ‘진호의 책방’에서 만난 이희문 선생님께도 말씀드렸더니 보여줄 게 있다며 그 시절의 사진첩을 꺼내 오시더라고요. 정말 신기한 이미지가 있었어요. 어떤 한 여인이 한복을 입은 채 챙이 넓은 서양식 모자를 쓰고 우아하게 서 있어요. 그런데 옆은 그냥 논두렁이에요. 어색함에서 오는 멋스러운 이미지라고 할까요? 영화 ‘사의 찬미’를 보면서도 언젠가 모던한 이미지를 음악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어요. 물론 시대적 아픔이 있었지만요.
경성시대가 ‘모던 첼로’의 시작점이 되었군요.
이번 앨범을 딱 놓고 봤을 때는 ‘완전히! 모던’이지만, 사실 제가 표현하고 싶은 모던은 요즘의 세련되고 정갈한 느낌이 아니라, 당시 존재했던 두 가지 다른 양상의 문화가 접점을 이룰 때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어요. 첼로는 굉장히 오래된 악기잖아요. 고전 악기에 어울릴 법한 음악을 평소 존경하는 아티스트들의 음악과 합치면 어떨까 고민했죠. 실제 제가 자작한 두 곡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유행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를 상상하면서 만들었어요.
이 오래된 악기에 동시대성을 불어넣는다는 건 홍진호만이 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어요.
운이 좋아서요. 권태은 음악감독님, 에코브릿지, 이진아, 노영심… 정말 엄청난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이번 음반을 위해 의기투합을 한 게 아니라 원래 알고 있던 분들과 소통하고 있었던 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협업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어요. 이분들을 어떻게 다 모으신 건가요.
방송을 통해서 알게 된 권태은 음악감독님은 지금까지 제 음악에 길잡이가 되어 주시고, 에코브릿지는 ‘불후의 명곡’에서 처음 만났어요.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니 너무 친해지게 됐고, 이진아 씨는 ‘진호의 책방’ 게스트로 오신 적이 있어요. 진아 씨의 경우는 너무 배울 게 많은 분이라 앨범 작업 시작부터 제가 ‘찍은’ 분이세요.(웃음) 선우정아 씨는 평소 제가 팬이라 욕심을 내봤어요. 선뜻 응해주셨다고 해서 기분 좋았죠. 노영심 선생님은 정말 우연히 작은 카페에서 처음 만나 그 자리에서 바로 친해졌어요. 제가 지니고 있는 음악적 고민들을 다 털어놓을 정도로요. 사실 이번 작업에서는 계획에 없었는데 녹음하다가 그냥 안부 전화를 드렸어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음악 작업을 위해 제주도에 계시더라고요. “우리는 언제 작업하나?” 하시기에, 지금 녹음 중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설마 녹음 마감 이틀 전인데 가능하겠어? 반신반의 했는데, 바로 다음날 녹음실로 와 주셨어요. 말도 안되는 일정에도 어느 정도 스케치를 하시고서 말이죠. 그 자리에서 이것저것 작업하면서 어느 것이 좋은지 여쭤봐주시더라고요. 저희 연습도 없이 그 자리에서 연주하고 녹음했어요. 결과적으로 가장 늦게 시작해서 가장 빨리 끝난 작업이었어요.
자작곡이 2개나 있어요. ‘그때는 우리가‘와 ‘꽃핀다’.
‘그때는 우리가’는 작년 10월쯤 만들었어요. 제가 작곡을 잘 못하니까 진짜 오래 걸렸거든요. 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노래인데, 화자는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 깨기가 싫은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바람과 냄새, 촉감… 그런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간절함을 담아보고 싶었어요. ‘꽃핀다’는 꽃이 질 때 영감을 받았어요. 이제 곧 다시 피겠구나, 곧 봄이 오겠네, 그런 느낌을 받아서 밝고 경쾌하게 작곡했어요.
하지만 저는 좀 슬프더라고요.
네, 맞아요. 다들 슬퍼하세요.(웃음) 하지만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첼로라는 악기가 방방 뜨는 느낌이 아니기도 하고요.
여러 음악가들에게 곡을 부탁드릴 때 “홍진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 혹은 첼로와 어울릴만한 음악을 만들어 주세요.”하고 말씀드렸어요. 어느 날 진아 씨가 그러더라고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음악적 자극이 슬픔, 애틋함이었대요. 그래서 특별히 권태은 음악감독님에게는 ‘아주 밝은 곡’으로 요청 드렸어요. 너무 밝은 걸 해주셔서 오히려 걱정했는데 다행히 첼로도 경쾌한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구나 느끼면서 연주했습니다.
모든 곡이 다 창작곡이잖아요. 도전에 대한 부담도 있었을 것 같아요.
현존하는 음악을 해석하는 작업만 오랫동안 해왔던 터라 예전부터 ‘내 음악을 만들고 싶다’ ‘모든 곡이 내 이야기라면 얼마나 좋을까’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제가 만든 두 곡은 목마름을 달래주는 시작이 되었고요, 편곡을 맡아주신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 선생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더라면 쉽게 용기 내지 못했을 거예요. 첼리스트 홍진호가 이런 음악을 한다는 구체적인 작업에 대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해요. 이제껏 하고 싶은 음악에 대해 ‘수집’을 해왔다면 이번에는 ‘창작’ 에 대한 접근이라고 할까요. 이전의 음악보다 저만의 색이 드러나고, 하고자 하는 음악적 계획의 표현이 ‘모던 첼로’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스마일,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올라퍼 아르날즈의 곡도 인상 깊었어요. 이분들의 곡은 예전부터 좋아했던 곡들인가요.
예전부터 아일랜드, 북유럽 뮤지션들의 곡을 찾아서 듣곤 했어요. 특히 올라퍼 아르날즈(Ólafur Arnalds)의 ‘Undan Hulu’를 엄청 좋아했죠. 들으면서도 이런 곡을 첼로로 연주하면 누가 좋아해주려나, 믿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요즘 시대의 사람들이 찾는 감성이 깃들여 있더라고요. 복잡하지 않고 편안한, 미니멀한 느낌. ‘Passaggio’(Ludovico Einaudi 작곡)의 경우는 그래도 좀 알려져 있는 곡이라 시도해보았고요,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스마일’은 원체 유명한 곡이지만 시도해 볼 생각은 결코 없었어요. 그러다가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음반에 수록된 이 곡을 듣고 완전 반해버렸죠. 첼로로 연주해도 좋을 것 같아서 도전해보았습니다.
‘이 곡을 연주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나름의 기준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 작업하면서 ‘녹음까지 해봐야 아는 거구나’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기대가 없던 곡이 좋은 반응을 얻을 때가 있고, 기대했으나 생각보다 아닌 곡도 있었거든요. 처음 이 앨범의 수록곡을 위한 어마어마한 리스트가 있었어요. 아슬아슬하게 밀려난 곡도 많아요. 첼로는 시간이 필요한 악기인 것 같아요. 바이올린의 경우 굉장히 민첩해서 날렵한 리듬과 빠르게 진행되는 수많은 곡들을 소화해내는 맛이 있어요. 하지만 첼로는 두꺼운 음을 내고 듣기까지 시간이 필요해요. 바이올린 곡을 듣고 받은 감동이 첼로로 결코 이어지지 않아요. 빠르고 느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첼로에게는 음악이 나타내고자 하는 여유, 느림의 미학이 깃든 음악들이 잘 어울리는것 같아요. ‘제 귀로 감동 받은 곡을 해야지’에서 ‘더 많이 연주해보고 결정해 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가장 아쉬운 점과 마음에 드는 점이 있다면요?
정통 클래식의 경우는 주로 어쿠스틱 홀에서 녹음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세팅을 하지 않아도 좋은 울림이 있어요. 이번 녹음에는 다른 음향적인 효과가 들어가다 보니 녹음실에서 작업을 했어요. 첼로 본연의 소리를 100% 발휘하지 못한 부분이 가장 아쉬워요. 그럼에도 초반에 우려했던 점 가운데 하나가 ‘흐름’이었거든요. 많은 아티스트, 홍진호가 만든 음악의 흐름이 과연 매끄러울까. 어느 날 마치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이 되는 점을 발견하고는 다행이다 생각했죠. 영화 한편 보는 것 같아, 책 읽는 것 같아, 나름의 기승전결이 있어, 칭찬의 말씀을 들으니 더 기뻤어요.
짬이 생기신 거 아닐까요.
처음에는 이것저것 다 시도해봤죠. 시간의 흐름대로 했다가 테마를 정해서 했다가, 전혀 되지 않으니까 다 내려놓고 곡부터 받은 거예요. 트랙리스트 짜면서 생각보다 흐름이 괜찮다는 걸 알았어요. 이번 작업들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새삼 발견하게 된 점이 있나요. 제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저는 누군가와 협업을 하면 잘 따르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믿으면 그냥 따라가요. 하지만 이번 작업 하면서 그렇지 많은 저를 발견했어요. 제 목소리를 많이 냈고 솔직히 도를 넘은 적도 있어요. 음악가로서의 욕심이라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네? 생각보다 더 예민한 사람이었네? 깜짝 놀랐어요.
앗, 저는 반대라고 생각했거든요.
대개 그렇게 바라보세요. ‘차가운 사람이구나’ 생각했다가 막상 만나보니 ‘아니네?’ 했다가, 더 깊게 들어가면 ‘진짜 예민한 사람이구나’가 됩니다.(웃음)
크고 작은 연주가 많으세요. 최근 가장 좋았던 연주가 있었다면요?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 선생님과 ‘뮤직토크’ 를 진행했어요. 10여 곡의 레퍼토리를 연주했는데 과연 이분들에게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그냥 듣는 게 아니라 몸을 앞으로 기울이시며 경청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떻게 그렇게 집중하실 수 있지,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공간 자체의 울림이 좋고, 천장이 높아서 첼로와 잘 어울렸고요. 제가 얻은 게 더 많아서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침형 인간으로서의 일상의 변화는 없나요.
요즘은 연습을 더 많이 하고 있어요. 공연을 위한 연습이 아닌 제대로 된 개인 연습이요. 연습 시간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팬들이 책 선물을 자꾸 해주셔서 쌓여가는 책들로 도서관에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얼마 전 아끼는 책들을 팬들에게 다 드렸는데, 그 시간도 굉장히 뿌듯했어요. 요즘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읽고 있습니다. 아, 좋아요.
여전히 이탈리아 Ferdinando Garimberti 악기로 연주하시나요.
제 악기는 디자인이 최고로 예뻐요. 악기를 볼 줄 아시는 분들도 비율이 완벽하다고 말씀하세요. 소리도 조금 까랑까랑하다고 해야 하나요, 전형적인 이탈리아 악기입니다. 제가 너무 사랑해서, 연주할 때도 진짜 좋은 순간이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동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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