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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페리 포르쉐의 진정한 꿈과 시행착오, 그리고 파나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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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0. 10:331,677 읽음

Ferry Porsche
“At the beginning, I looked around me and I couldn’t find my dream car. So I decided to build it myself.”
("주변을 둘러봐도 내가 꿈꾸던 차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만들기로 했다.")
-페리 포르쉐

37:63, 리어 엔진, 수평대향 6기통을 장착한 불리한 구조의 스포츠카가 탄생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는 저 격언은 911을 가리킨다. 페리 포르쉐가 911을 만든 목적은 이랬다. 4명의 핵가족이 다 같이 탈 수 있어야 하며, 아우토반 1차로를 여유로이 달릴 수 있어야 했고, 결정적으로, 아름다워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차가 시중에 없었으니 자신이 만들기로 한 것이라고, 지금 봐도 호연지기 넘치는 공돌이의 멋진 포부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911이라는 차가 어디 4인 가족을 위한 자동차였던가? 커져버린 현대인들의 체격으로 911의 뒷자리는 어림도 없고, 자동차도, 사람도 훨씬 작았던 60년대로 돌아가도 911이 진정 4인 가족을 위한 스포츠카였었는지는 의문이다.

996이 등장하기 전까지 911은 결코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사진 속 964 터보를 Y영역 이상에서도 똑바로 몰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많지 않다.


심지어 지금만큼 간단히 다뤄지는 자동차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필자의 의문은 맞아 떨어졌다. 911은 가장 성공적인 스포츠카의 아이콘으로 발돋음했지만, 슈투트가르트의 연구소에선 언제나 페리의 진정한 이상을 달성해내는 차를 창조하려는 노력이 끊이지 않았다. 무려 60년 넘게 말이다. 페리 포르쉐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평생을 헌신했지만 그의 꿈은 죽고 나서야 이뤄졌다. 또한 그 결과가 파나메라라는 것에 필자는 강하게 동의하는 바이다. 어쩌면 911은 비이상적인 구조와 특징에서 발생하는 재미와 성능에 사로잡혀버린, 골수팬들의 이상에 맞춰진 그들만의 워너비였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생각한다.


III 아름다움과 맞바꾼 이상, T7 콘셉트 (1959)

1959년에 짝퉁 911 같이 생긴 차가 등장한다. 이름은 T7 프로토타입(Typ 754), 앞모습은 영락없는 초대 911이 맞다. 그러나 그 뒤는 어딘가 어정쩡하다. 페리의 이상 조건 제1순위, '4인 핵가족이 넉넉하게 탈 수 있어야 한다'라는 조건으로 인해 캐빈을 확보하고 그 뒤에 다시 엔진을 얹었기에 저런 비례가 탄생한 것이다. 트렁크 같이 생긴 엔진룸에 실린 것은 1.9리터 공랭식 수평대향 4기통, 엔진의 파워는 약간 모자라지만 아우토반도 제대로 달릴 수 있었으며 최고 속도도 200km에 달했다. 무엇보다 핵가족이 제대로 타고 다닐만했다. 그러나 이탈리안 사람 못지않게 아름다움에 집착하던 페리 포르쉐는 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그는 디자이너들에게 A필러 앞쪽까지만 합격 도장을 찍어주었다.

뒷모습은 확실히 911이라 불러주긴 펑퍼짐하고 게을러 보인다.


결국 4년간의 추가 연구가 이뤄졌고 그동안 휠베이스를 100mm나 줄이고 삐져나온 엔진룸을 캐빈 방향으로 밀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실린더도 2개 더 붙이고 나서야 우리의 눈에 익숙한 오리 엉덩이 같은 911의 뒷모습이 만들어지게 된다. 당연히 그로 인해 캐빈 공간은 확실히 희생되었으며 나머지 2개의 조건은 완벽히 충족시켜주었을지 몰라도, 911 개발의 본질과도 같던 핵가족의 스포츠카는 저 멀리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1970년에는 피닌파리나에게 의뢰해 만든 B17과 그 연장선인 915는 대형 GT인 재규어 E 타입의 대항마로서 기획되었지만 모두 양산에는 도달하지 못하게 되며 포르쉐는 RR 구조를 포기하고 백지상태에서 911을 엎어버릴 후속을 기획하게 된다.




III 앞서나간 발상, 뛰어넘지 못한 아이콘의 벽, 928 (1977-1995)

60년대 말, 포르쉐 911은 이미 미국에서 인정받는 스포츠카로서 눈도장을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포르쉐는 일찍이 911의 열등한 근본에 대한 고민과 한계에 봉착했다. 기본적으로 RR 구조는 결코 안정적인 구조가 아니었고 스포츠 드라이빙에 있어서 미드십보다 불리하다고 여겨졌기에 이미 내부적으로도 911의 더 큰 발전 가능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쉐보레 콜베어가 RR 구조로 인한 구조적 결함으로 일으킨 수많은 사고가 거대한 소송전과 제조사인 GM의 대규모 리콜 사태를 빚어냈다.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는 RR 구조의 승용차 판매가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여론이 확산됐고 RR 구조인 911을 주력으로 팔던 포르쉐에게는 존폐의 위기를 촉발시킬 수 있었다.

콜베어가 터트린 리콜 사태는 911의 위기를 촉발시켰다.

또한 내부적으로도 911을 대체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여론의 선두에 있던 사람은 포르쉐 그룹의 상무이사로 있던 에른스트 푸어만이였다. 그는 이미 잠재력이 끝에 다다랐다고 판단되는 911의 후계자를 개발하길 압박했고, 포르쉐의 미래는 911의 후계차에 달려있다고 믿던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오일 쇼크와 상술한 RR 차량들에 대한 재재 우려, 그리고 낡아버린 초대 911의 판매량은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렇게 포르쉐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결단을 내렸다. FR 레이아웃의 대형 GT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포르쉐는 그간 비틀이 근간이 되는 911에서 벗어난 적 없었기에 백지상태에서 차를 만들어내는 건 엄청난 도전이었고, 그 도전은 1977년에 빛을 발하게 되었다. 바로 그 차가 928이다. 전장 4.5미터의 이 쿠페는 무게 약 1.6톤과 그 차체를 5리터 V8 엔진과 3단 자동변속기, 5단 수동변속기로 끌었다. 출력은 302마력을 뽑아냈고, 몇 번의 부분 변경을 거치고 나서의 GTS 사양은 5.4L까지 늘어나고 출력도 350마력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8년간의 생산 기간, 1995년에 단종에 이르기까지 총 61,056대가 생산되었고 후속 모델 없이 단종된 928은 911을 대체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이미 911에 빠져버린 보수 고객들은 911과는 완전히 다른 928이라는 GT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고 또 하나는 드라이브 샤프트라는 부품을 처음 써본 포르쉐에게 FR 레이아웃은 미성숙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928에게는 드라이브 샤프트가 휘어버리는 치명적인 결함이 종종 일어났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오일 쇼크에 맞춰 탄생한 것은 결코 시기적절 하지가 않았던 차인 것이다.

포르쉐 H50 콘셉트, 이차를 페리의 생신날에 선물하면서 엔지니어들은 대형 세단의 개발 승낙을 얻어내려 했고 그것이 후술할 989가 되었다.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맬때 5리터급 8기통 쿠페를 소비하기에 적절한 고객들이 나타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런 포르쉐의 시도는 초대 파나메라에 거의 근접한 989 프로젝트까지 이어지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그들은 928을 기반으로 만든 호화 투어러 H50 콘셉트를 페리 포르쉐에게 선물하며 대형 세단의 생산 승낙을 받아내려 하기도 했다.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출시 다음 해인 1978년에는 독일 올해의 차에 수상하기도 하였다.  한편 928은 911을 대체할 만한 마성의 아이콘 기질은 떨어졌기에 시장에서 외면받았지만 우수한 만듦새와, 포르쉐 표 GT의 매력을 느꼈던 새로운 팬들은 911이 세대교체를 할 때마다 928의 부활을 고대하고 있다.




III 가까워지는 꿈, 그러나 이루기엔 이른 현실 989 (1988)

상기 928에서도 서술했듯 초대 파나메라에 근접한 989는 928의 연장선이었고 그 개발의 시작은 88년부터 91년까지 이루어졌다. 80년대 중반, 포르쉐 소속 엔지니어 율리히 베즈는 928의 후속작이자 벤츠의 7시리즈, S클레스만큼 편안하고 화려하면서도 그들에게 있어서 스포츠성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차를 만들려 했다. 즉, 페리 포르쉐의 꿈을 이루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2.82미터의 휠베이스, 3.6~4.2L의 배기량을 가질 것으로 추정된 300마력대의 가솔린 8기통이 탑재된 이 4도어 세단은 지금 봐도 우수한 그 만듦새로 당시 양산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자동차이다.

그러나 이 차량이 개발되던 시점은, 포르쉐에게 아주 고달팠던 시절이었다. 떨어지는 영업 이익률과 989의 전신인 928의 낮은 판매량은 임원진들에게 이차의 양산화를 2번 고민하게 만들었고 결국 989 프로젝트는 92년에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하지만 989가 남긴 유산은 후술할 카이엔의 성공의 초석이 되었고 989에 탑재된 서스펜션의 전설적인 959의 그것에 영향을 끼쳤다. 헤드램프의 디자인은 993의 그것으로 이어졌고 리어램프는 996으로 이어졌다.

엄청난 완성도다. 양산을 이루지 못한 당시의 곳간 사정이 아쉬울 따름이다.

악화된 경영 사정이 이 차량의 양산을 실현시키진 못했지만, 이차가 남긴 유산은 포르쉐의 다른 여러 차종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고, 그 연구를 통해 성공한 카이엔은 2009년에 파나메라가 등장할 수 있는 자본을 만들어 주었다. 한편 콘셉트카로 끝나버린 자동차이기에 이차가 가진 정보는 많지가 않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배기량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은 이차가 가진 완성도 대비 아쉽게 다가온다.
만약 92년에 프로젝트 폐기 대신 이차가 시장에 나왔더라면 어떤 반응이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모두의 회의 속에 등장한 카이엔을 성공시킨 포르쉐였기에, 어쩌면 989 또한 성공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III 천재는 남의 시선 따위 안중에 두지 않는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군림할 뿐, 카이엔 (2002~현재)

포르쉐는 SUV 약자의 첫 글자가 SPORT라는 사실을 확실히 일깨워 주었다.

90년대 초반, 포르쉐는 공랭식 911만 팔던 초심과 고집이 부른 냉랭한 현실 속에 경영 사정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공랭식 엔진의 매니악한 특성은 만인에게 어울리지 않아 고객 창출이 어려웠고, 환경규제와 성능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에는 공랭식 엔진이 가지는 한계가 명확했다. 그래서 포르쉐는 토요타에서 사람을 데려와 그들의 효율적인 대량생산 방식과 '카이젠 정신'( 改善精神 개선 정신)을 배웠다. 그 덕분에 슈투트가르트의 생산 볼륨은 늘어났고, 속도가 빨라졌다.

이를 바탕으로 개발한 996계 911은 혹독한 원가 절감과 변화를 이뤄냈다. 수랭식 엔진으로 바뀐 것은 환경규제와 더 강력한 성능을 위함이요, 993까지 이어지던 대칭형 4스포크 스티어링도 스포츠형 3스포크로 바뀌고 아래급은 박스터의 대시보드와 헤드램프를 사용한 건 모두 원가절감 때문이었지만 팬들과 외신의 질타는 피할 수 없었다.

996은 포르쉐의 뼈를 깎는 개혁을 상징한다. 전통과 초심을 깨부쉈다는 평이 많지만, 그들은 그것을 깨부수지 않았다. 단지 시대에 맞는 업데이트를 해냈을 뿐이다.
그러한 혹평과는 상반되게 993대비 평균 2.5배 넘게 불어난 주문량과 함께 호전되어가는 재정 상황은 그들이 더 큰 도전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카이엔이었다. 모두의 회의 속에 등장했지만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 포르쉐는 이미 아주 많은 준비와 시행착오를 거듭한 상태라 그들은 비장했다. 카이엔은 절대, 쪼들린 지갑 사정을 복구시키기 위해 대충 만든 차가 아니었다.

포르쉐는 이 차만을 위해 라이프치히에 새로 공장을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당시 같은 플랫폼으로 생산 중에 있던 아우디 Q7이나 폭스바겐 투아렉과는 다른 방식으로 차를 완성시켰다. 그 방식이라 하면,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에 위치한 폭스바겐 현지 공장에서는 섀시만 만든 후, 다시 라이프치히로 가져와 모든 공정을 진행하여 차를 조립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시장에 나온 카이엔은 하드코어 911밖에 없던 부자들에게 만인을 위한 포르쉐는 매력적으로 보였고 이는 엄청난 판매량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얻은 자본으로 그들은 폭스바겐을 인수하려는 객기도 부려봤지만, 2008년 금융위기에 막혀 그 객기를 실현시키진 못했다. 성능 또한 놀라웠다. SUV의 약어 중 하나인 Sport를 정확히 충족해내는듯한 운동성능은 낯섦과 깨부숴버린 전통에 실망한 고객들에게 신선함과 인정을 받았다. 카이엔 터보를 예시로 들면 4.2L 8기통 엔진에 터보를 붙여서 4바퀴를 굴리고 제로백은 4초대, 최고 속도 300km라는 경이로운 성능을 자랑했다.

이렇듯 카이엔은 초기의 미디어와 매니아들의 평가와는 상반되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게다가 수익구조가 조정되어 더 이상 카이엔이 아닌 다시 911이 포르쉐의 영업 이익률을 책임지고 있는 지금, 카이엔은 포르쉐에서 나름의 캐릭터를 구축하여 당당히 라인업에 서있다. 어느덧 3세대를 달리고 있는 카이엔은 자동차사에 한 획을 그어버린 자동차로 평가받고 있다.

어느덧 3세대를 맞은 카이엔은 선대 모델의 시행착오를 말끔히 딛고 완벽한 차로서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실로 재수 없는 천재가 따로 없다. 모두의 비난과 우려 속에 탄생한 차를 그 누구보다 멋지게 성공시키며 라이벌들을 짓누르는 것은 물론, 하나의 아이콘으로서 자리매김도 해냈으니 말이다. 정말 그들은 보란 듯이 성공하여 군림했다. 그리고 그 천재의 주인공이던 페리 포르쉐는 98년에 생을 마감하며 끝끝내 자신이 꿈꾸던 궁극의 스포츠카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III 오랜 기다림 끝에 피워낸 완벽한 결실, 파나메라 (2009~현재)

프로포션은 어색했을지언정 970 파나메라의 디자인은 대단히 완벽하다. 사실 프로포션, 즉 비율에 집착하는 서양의 디자인은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한계가 명확하기도 하다. 바꿔 말해, 프로포션만이 디자인의 모든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드디어, 2009년 그의 꿈이 이루어질 시간이었다. 4명이 안락하게 타고 다닐 수 있으며 아름답고 아우토반 1차로에 머무를 수 있는 궁극의 스포츠카가 탄생한 시점이었다. 그 탄생 시점 또한 완벽했다. 카이엔, 996.986 박스터와 같은 도전의 성공으로 얻은 자본과, 도전으로 바꿔낸 대중들의 낯선 인식과 시선은 페리 포르쉐가 꿈꾸던 궁극의 스포츠카를 탄생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던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2008년의 금융위기의 여파도 차츰 수그러들 시기니 상업적인 성공도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고, 그것은 실현되었다. 2톤의 무게, 4.9m의 전장은 5가지의 파워 트레인과 궁극의 PDK 미션과 맞물려 최상의 퍼포먼스를 자랑했던 970 파나메라의 판매량은 가공할만한 성능만큼 불티나게 팔렸다. 최상위 사양인 터보 S의 경우 최고 속도는 306km에 달했다.


상기 서술했던 그 라이프치히 공장에서 전 물량이 생산되며 만들어지는 족족 팔려나가는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판매량과는 별개로 이번에는 디자인에서 발목이 잡혔다. 그들은 파나메라가 고래 같고 어색해 보이는 비례를 이유로 비판했지만 역설적으로 파나메라의 디자인은 상당히 완벽하다. 미디어와 대중들의 평가는 프로포션에만 치중한 나머지 포르쉐만의 스포츠 세단을 만들고자 한 디테일과 집념을 놓친 근시안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잘 보면 여기저기서 911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970 파나메라의 또다른 진가다

포르쉐는 얼마든지 끝내주게 멋진 디자인의 스포츠 세단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1세대 파나메라,카이엔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멋진 파나메라,카이엔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911을 표방한 사이드 프로포션이라던가 윈도우라인,부풀린 펜더, C필러에서 트렁크로 떨어지는 패스트백과 같이 911을 닮아 보이려 했던 노력들은 근본적으로 커다란 차체로 인해 비대한 느낌을 가지게 만들었다.

2열 탑승자의 개방감과 헤드룸을 위해 크기를 키운 윈도우라인과 뒤틀린 루프라인을 포함한 사이드 프로포션은 어색한 비례를 만들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911이 가지는 낮은 보닛을 프론트 엔진인 파나메라로 구현하기 위해 시도한 노력은 넙데데한 앞모습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못생긴 비례를 만들었다 뿐이지. 결론적으로 포르쉐는 포르쉐다운 스포츠 세단을 만들기 위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금의 완벽한 파나메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현행 파나메라는 더 이상 완벽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스포츠 투리스모는 약간 모자란 실용성도 챙겼다. 현재로서는 대체가 불가능한 위치까지 오게 된 것.


한편 2016년에 출시한 신형 파나메라는 세간의 극찬을 받으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차로서 대체불가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1세대 파나메라가 저지른 시행착오를 모두 극복하고 보완함으로써 911에 더욱 가까워진 971 파나메라는 선대 모델인 970도 추켜세우는 효과를 만들고 있다. 그 평가는 970은 그 당시의 기술로 가장 911다움을 표현하려 했던 스포츠 세단이라는 것이다.

포르쉐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궁극의 스포츠 세단, 페리 포르쉐의 꿈을 이루기 위해 1세대 동안의 시행착오를 겪는 것도 불사하는 포르쉐의 정신은 극찬 받을 만하다. 아니, 1세대가 아니라 장장 60년 이상의 시행착오였다. 4명의 가족이 편안하게 타면서도 아우토반 1차선을 점거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어쩌면 비현실적으로도 들렸던 그의 꿈은 벌써 이뤄진 지 4년이 지났다. 그는 분명히 하늘에서 기쁜 마음으로 지금의 파나메라를 지켜보고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가 꿈꾸던 진정한 포르쉐가 현역인 지금 이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필자도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내 손에 넣지 못한들 어떠한가.
항상 꿈꾸고 부러워하고 진심 어리게 동경할 수 있는 것이 드림카이며 스포츠카이고, 포르쉐인 것 아니겠는가.

III CAR GO STUDIOS 문상원 편집장
cargostudi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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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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