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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수도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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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9. 18:106,268 읽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초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최후의 만찬>은 그 벽화 그림의 역사를 훑어보면 얼마나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처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루도비코 스포르차 백작의 의뢰로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거장 다빈치의 작업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밀라노로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작업은 상당히 느리게 진전되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4년이 지나서도 완성되지 못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의 밀라노 침공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피난을 가는 바람에 안그래도 느리게 진행되던 작업이 중단기까지 해버렸습니다.

<최후의 만찬>

이후 세간이 잠잠해졌을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다시 밀라노로 돌아왔지만 그가 작업하고 있던 <최후의 만찬>은 벌써 손상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안그래도 작업이 까다롭다는 프레스코화가 손상까지 진행된 대다가, 작업을 의뢰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백작까지 전쟁 중 세상을 떠나 그림에 대한 지불도 되지 않으니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더 이상 작업할 의지를 갖지 못했습니다. 

완전히 손상된 상태였던 <최후의 만찬> 예수의 발 부분에 문틀이 남아있다.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않던 <최후의 만찬>은 상당히 손상된 상태로 유지되다가 1625년, 벽화가 있던 식당에 주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만들기 위해 그림의 일부가 완전히 파손되는 것을 감수하고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이 일로 예수의 발 부분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문의 틀이 들어섰습니다.

폭격에도 살아남았던 <최후의 만찬>과 폭격 당시 현장

최후의 만찬의 수모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1769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벽화가 있던 공간을 마구간으로 사용했고 안그래도 소홀히 관리되던 그림이 군인들의 장난에 의해 더욱 파손되어 갔습니다. 1800년엔 밀라노에 대홍수가 일어나 벽화엔 치명적인 침수가 발생했고, 그나마 운이 좋았던 건 2차 세계 대전 중 떨어진 폭탄에 주변이 모두 폐허가 되었지만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벽만큼은 살아남은 것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최후의 만찬의 기록

이후 여러 복원가들의 손을 거쳐 그림이 수정되었는데 그때마다 본 그림과 상관없이 복원가들의 해석이 그림에 반영되어 원본과 조금씩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70년대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이래 최대 복원 작업이 진행됐고 그동안 쌓은 물감 층들을 조심스럽게 한층 한층 벗겨냈습니다. 그 후의 문제는 덧칠된 물감들을 걷어내고 보니 원본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옮겨 그린 '지암피에트리노'의 유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옮겨 그린 '안드레아 솔라리'의 유화

하지만 원본이 거의 다 사라졌더라도 그림을 복원할 방법은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거장이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업 모습을 보러 와 그가 작업 중인 <최후의 만찬>을 스케치해가거나, 그대로 베껴 그렸던 그림들을 참고해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유명세를 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모작을 집에 걸어두길 원했고, 거장의 유명세가 부러웠던 화가들이 이 그림을 모작해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었습니다. 때문에 현대에 와선 이 모작들이 복원을 위한 참고 자료로 사용되었고 대부분의 그림에서 일치하는 부분들을 참고해 그림을 복원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손상된 그림을 그대로 보고 있거나, 복원가들의 마음대로 자신의 해석을 반영해놓은 그림을 보고 있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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