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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설 논란으로 덧칠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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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6. 19:4115,425 읽음

시스티나 성당 내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손에서 탄생한 명작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당 내부의 천장에 그려진 그림은 <천지창조>, 그리고 벽에 그려진 그림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1508년,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의 의뢰를 통해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작업했습니다. 4년이 지나서야 그림은 완성됐고 당연히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의 완벽한 작품이었습니다. <천지창조가> 완성되고 20년이 지나 유럽은 종교개혁이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가톨릭 교단과 이교도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천지창조>를 그렸던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에 비어있는 벽 부분에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한 그림을 의뢰하게 됩니다.

교황 바오로 3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클레멘스 7세의 의뢰를 수락하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교황이 사망하게 되면서 작업에 차질이 생겼지만 바로 차기 교황으로 바오로 3세가 자리에 올라 클레멘스 7세의 유지를 이어 받아 미켈란젤로의 작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533년 작업이 진행되고 그림이 점차 완성되면서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림에 등장하는 신과 사람들이 모두 '나체'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황의 의전담당관이었던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은 이 그림이 완성되기 전부터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나체로 그려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비판했었습니다. 추기경은 '이 나체 그림은 거룩한 장소에 부적절한 홍등가에나 어울리는 그림'이라며 크게 비판하였지만 교황이었던 바오로 3세의 의지 때문에 그림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 중 자신의 그림을 비판한 추기경에게 복수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 위치한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를 추기경의 얼굴로 표현했습니다. 추기경은 자신의 얼굴을 빼줄 것을 요청했지만, 미켈란젤로는 그의 성직자 신분으로 행했던 문란한 사생활을 비판하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작업이 시작되고 7년이 지나 <최후의 심판>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림이 공개되고 사람들은 이 '나체'로 가득한 그림을 껄끄러워 했지만 바오로 3세의 강한 의지에 의해 자신들의 의견을 크게 내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3세가 세상을 떠나고 <최후의 심판>은 다시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됩니다.

교황 바오로 4세 (장 피에트로 카라파)

바오로 3세 이후 차기 교황 자리에 오른 '장 피에트로 카라파' 추기경(바오로 4세)은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최후의 심판>을 제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예술가들과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들은 여러 예술적, 정치적 의미를 지녔던 <최후의 심판>의 제거를 막기 위해 절충안을 내놓게 됩니다. 그들이 내놓은 방법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옷을 입히는 것' 이었습니다.

수정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당연히 미켈란젤로가 이 일을 수락할리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미켈란젤로를 대신해 그림에 덧칠을 할 인물로 찾은 것은 그의 제자였던 '다니엘 다 볼테라'였습니다. 르네상스 거장이었던 스승의 그림에 덧칠을 하는 것은 제자였던 다니엘에게도 큰 수치였을 것입니다. 그는 <최후의 심판>에 옷을 그리는 덧칠을 하며 '기저귀 그리는 화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고 자신과 스승의 명예가 실추되면서 큰 비애감에 젖었습니다. 그의 작업 속도는 더뎠고 교황청은 결국 무명 화가들을 모집해서야 이 덧칠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술 속 비하인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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