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3대 조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걸작 <피에타>. 미켈란젤로는 평소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남기지 않기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작품을 보고 다른 조각가의 작품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나서 성모의 상체에 둘러져 있는 띠에 "피렌체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라는 서명을 새기기로 결심하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시각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면서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작품 중 유일하게 서명이 들어간 작품이 되었습니다.
<피에타>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조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맞춰진 조각 전체의 '비율'과 마치 조각이 살아있는 것 같이 묘사된 '섬세함'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겨 힘없이 떨어뜨린 예수의 손을 보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던 손등의 상처와 핏줄 묘사에 조각이 얼마나 섬세하게 묘사되어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각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바로 눈앞에서 감상할 기회는 이제 사라졌습니다. 이유는 1972년 5월 21일 벌어진 <피에타> 훼손 사건 때문입니다.
사건 당일 <피에타>는 다른 날들과 다름없이 바티칸 성당 내부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헝가리 출신의 지질학자 '라즐로 토스'라는 인물에 의해 암석 망치로 12차례 공격받으며 조각은 크게 훼손되고 맙니다.
그는 <피에타>를 내리치며 "나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다.", "신에게 어머니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가 사건을 벌였던 당일 그의 나이는 예수가 사망했던 나이 33살이었고 그런 사건을 벌임으로써 자신이 예수로서 인정을 계획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이미 1971년 호주에서 로마로 이주한 상태였고 교황에게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수차례 보냈었지만 당연히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라즐로 토스는 당시 관람객들에게 저지되었지만 이미 <피에타>는 크게 손상된 상태였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코와 왼쪽 눈, 머리 부분이 깨져 나갔고, 왼쪽 팔과 손가락은 아예 떨어져 바닥에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바티칸 관계자들은 훼손된 석상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건이 일어난 직후 산산조각 난 조각들의 파편을 관람객들이 상당 부분 주워 가는 탓에 본래의 모습을 찾기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일부 조각들은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했고 성모 마리아의 코 부분은 조각의 뒷부분을 잘라낸 대리석 조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복원이 끝나고 <피에타>는 관람객들과의 거리는 멀어졌지만 방탄유리로 보호되어 이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에타> 조각을 훼손한 장본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제대로 죗값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헝가리 출신이었지만 호주 시민이었고 이탈리아에서 2년간의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호주로 돌려보내지는데 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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