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세계 예술계의 무대는 파리로 집중되었습니다. 프랑스 국내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세계에 퍼져있던 많은 예술가들이 파리로 몰려들기 시작했던 때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 독보적인 존재감을 지녔던 것은 피카소와 마티스였습니다.
처음 둘은 서로를 잘 몰랐지만, 서로를 알게 된 계기는 1903년 파리로 이주한 미국 출신의 여성 시인 거트루드 스타인 덕분이었습니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거트루드 스타인을 두고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함이 아닌 그녀의 후원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부유한 유대인 집안 출신이었고 작가와 시인 활동을 하며 파리로 유학 와 화실을 열고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사들였고, 어려운 예술가에겐 싼 가격에 집을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사들인 그림들에는 세잔, 르누아르, 툴르즈-로트렉 등의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트루드는 그림을 수집함과 동시에 당대 예술가들을 집으로 초대해 자주 토론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마티스와 피카소가 처음 만나게 된 계기도 바로 거트루드가 만든 토론 자리에서였습니다.
피카소보다 13살이나 많았던 마티스는 그다지 피카소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피카소는 달랐습니다. 피카소는 거트루트의 집에 방문했을 때 벽난로 위에 걸려있던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강하게 경쟁의식을 느꼈고 벽난로 위 마티스의 그림 자리를 탈환할 계획으로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까지 했습니다. 작가로서 살아남기 위해선 좋은 후원가와의 지속적인 거래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고 거트루트 같은 컬렉터를 두고 경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둘의 경쟁에는 너무나도 달랐던 둘의 출신과 그림을 대하는 태도에서 대립했지만 그런 다른 점이 서로의 그림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며 서로를 디딤돌 삼아 성장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에서 태어나 법률행정가로 일하다가 우연히 병상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냉철한 지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일궈 나갔습니다.
반면 피카소는 스페인의 항구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나 스페인 사람들의 정열적인 기질을 타고났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천재적인 소질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왔으며 일평생을 그림에만 투신해 왔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둘은 언제나 이분법적인 대립을 이뤄 왔습니다. 마티스는 해가 있던 낮에 그림을 그렸지만 피카소는 해가 진 밤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티스가 밝은 색채와 곡선을 주로 이용했다면 피카소는 단색적이며 거친 선을 이용했습니다.
이런 서로가 가지고 있지 못한 극명히 다른 점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릅니다. 피카소는 종종 마티스의 화실에 놀러 가 그의 그림을 감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티스의 그림을 차용해 여러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피카소가 마티스의 화실에 들렀다 갈 때면 언제나 마티스는 "저 인간이 또 내 아이디어를 훔치러 왔다."거나, "피카소는 매복하고 기다리는 노상강도다."라는 등의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티스는 피카소의 전시회를 통해 그의 작품들을 칭찬했으며, 1942년에는 서로의 작품을 교환하고 1945년에는 런던에서 대규모 합동 전시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라이벌 관계였지만 그들은 서로를 존중했으며 1954년 11월 마티스가 사망했을 때 그의 가족들은 피카소에게 가장 먼저 그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마티스가가 세상을 떠나고 몇 주 뒤 피카소에게 한 방문객이 마티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죽음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던 것인지 창밖을 멀리 내다보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마티스가 죽었어, 마티스가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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