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리 루소. 그에겐 별명이자 애칭이 하나 있었습니다. 르 두아니에 루소. 세관원 루소라는 뜻입니다. 그가 이런 별명으로 불렸던 것은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하며 아마추어 화가로서 활동했던 그였지만 실제로 생계를 위해 가졌던 직업은 세관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루소가 전업 작가가 되지 못하고 아마추어 화가 활동을 하며 세관원으로 일했던 것은 그의 작품이 당대에 인정을 못 받은 이유도 있지만 그의 가난하고 불운했던 삶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1844년 가난한 배관공의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과정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학교 기록엔 1850년부터 53년까지 매년 데생과 성악 등의 과목에서 상을 받았지만 그가 16살이 된 이후 학교를 중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법률사무소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던 그는 스무 살 때에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그가 군 복무를 하게 된 것은 자신이 일하던 법률사무소에서 우표와 현금을 훔치다 걸려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해있었는데, 그가 처벌을 피하기 위해 7년간의 군 복무를 신청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죄가 확정되며 1개월간의 감옥살이 후 군 복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군악대에 근무하며 클라리넷 연주자로 일했고 복무 5년째가 되던 해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다시 한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루소는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했고 서기로 일하며 스물다섯 나이에 열 살 아래인 가구 제작자의 딸 클레망스 보와타르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처가의 도움으로 그는 파리시 세관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안정적으로 가정을 이끌어 가는듯했지만 그들의 안정은 병마가 그들의 가족을 덮치면서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루소와 그의 아내 사이엔 7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다섯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1888년 그의 부인마저 서른네 살의 젊은 나이로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에 두 자녀만 남았지만 두 자녀 중 아들이었던 아나톨도 18세에 사망하고 딸 줄리아만 남게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딸과 홀로 지내던 루소는 1899년 55세 나이로 조세핀과 재혼했지만 조세핀 역시 4년 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삶에 불행은 가득했지만 그의 중년부터 시작된 그림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더 그림에 매진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들은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습니다. 당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화가들에게 있어 그의 그림은 아마추어의 그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를 확장할 수 있도록 그에게 큰 영감을 준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188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였습니다. 박람회장에서 그는 다양하고 활발한 분위기와 현장에 전시되어있던 동물과 식물들 모든 것들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그가 군 복무 당시 프랑스는 멕시코 파병을 했었습니다.루소는 직접 멕시코 파병을 다녀오진 않았지만 그의 동료 군인들로부터 들은 멕시코 밀림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의 상상 속 밀림 세계에 담아 박람회에서 받은 자극과 함께 그림 세계에 풀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전시회에 출품했고 그 기회를 통해 피카소와 쇠라, 고갱 등 당대 유명 화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1905년부터 그의 작품들은 새로운 평가를 받기 시작했지만 5년 후인 1910년. 그는 6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 가난과 불행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의 말년과 사후에는 그의 작품이 재평가가 이뤄지며 1911년엔 루소에 관한 연구서가 출판됐었고 1928년에는 파리에서 '성스러운 마음의 화가들'이라는 이름으로 그룹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은 칸딘스키와 피카소에게 큰 영향을 주며 위대한 현대 미술가 중 한 명으로 불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술가의 비하인드 스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