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랑스 출신의 후기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은 사실 30대가 돼서야 작품 활동을 시작한 늦깎이 화가였습니다. 그는 평소 일본에서 넘어온 그림이나 도자기를 수집하며 예술에 관심을 키웠지만 그에겐 연간 3만 프랑(약 1억 5천만 원)이란 거액을 받는 증권회사 직원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화가가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어엿한 청년이 되고 적당한 직업까지 얻었을 때 그의 아내 메트 소피 가트를 만났습니다. 둘의 사랑은 빠르게 싹텄고, 결혼 후 10년 동안 둘 사이에선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풍요롭고 평화롭게 이어져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고갱의 가족에 불화는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해 고갱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버리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실업자가 된 고갱은 다시금 프랑스제 방수포 판매 사업을 해서 생계의 어려움을 회복하려 했지만 그의 사업은 잘 되지 못했고, 그의 아내인 메트가 덴마크 외교관을 위한 프랑스어 수업을 하면서 고갱을 대신해 가정을 돌보았습니다.
하지만 두 번의 실패를 맛본 고갱의 마음을 맴돌던 것은 그의 가슴속에 묻혀있던 화가로서의 꿈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로 가져온 가정의 어려움을 다시 극복하려 했겠지만 그의 화가가 되고 싶다는 부푼 마음은 사거라 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1883년 10월 전업 화가로서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실업자로 만들었던 프랑스 주식시장의 붕괴는 미술시장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당연히 고갱 같은 신진작가의 그림을 사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고갱은 메트에게 화가로서도 돈을 벌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습니다.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 그의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인 메트를 대리고 비교적 값이 싼 루엥으로 지역을 옮겨 지내면서 가난에 벗어나려 했지만 모든 일은 그의 희망처럼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메트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의 고향 코펜하겐으로 돌아갔고, 고갱에게 이혼 선언을 했습니다. 가족을 사랑했던 고갱은 메트를 쫓아가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받아들여주지 않았습니다. 메트는 고갱에게 떠나달라 요구했고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던 고갱은 결국 파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파리에서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렸던 고갱은 피에르 로티가 쓴 책을 읽고 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1891년 긴 여행 끝에 타이티에 도착한 고갱은 이미 43세의 중년이 되어있었습니다. 그곳은 그가 생각한 낭만적인 곳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새로운 작품의 영감을 만들어주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곳의 원주민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생활과 문화를 배웠고, 그동안의 외로움을 잊게 해줄 테후라라는 원주민 처녀와 만나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타히티에서 받은 영감을 통해 40여 점의 그림을 그렸고 1983년 파리로 돌아와 전시를 통해 그중 11점의 그림을 판매하는데 성공하면서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활이 온전히 나아지진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가난했고 하루하루 망가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897년 그가 아끼던 딸 알린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파리로 다시 돌아와 생활하면서 필요했던 돈을 은행에서 빌렸다가 갚지 못해 은행 거래 중지까지 통보받았습니다. 그는 점점 어두워져갔고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에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부어 그의 생에 대작을 완성하게 됩니다.
딸의 죽음과 가족을 지키지 못했던 죄책감, 나아지지 않는 자신의 생활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는 매일 같이 술과 마약에 빠져 살며 점점 난폭해져갔고 범죄까지 저질러 법정에 서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신을 난폭하게 다뤘던 탓에 병마와 약물 중독에 시달리다 1903년 고독하게 사망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비하인드스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