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 출신의 선구적인 화가 피카소는 그의 출신답게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에너지는 자신의 생애와 그림, 동료들과 그가 만났던 7명의 연인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칠 정도 넘쳐났습니다.
그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몸과 마음을 나눈 여성들은 피카소 자신에겐 그림을 위한 자극제이며 원동력이었지만 그를 사랑했던 연인들은 대부분 지독한 마음의 병을 앓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피카소가 처음으로 증인을 세우고 결혼식을 올렸던 연인 올가는 피카소의 어머니로부터 피카소는 자신을 위한 인생만을 살 것이기 때문에 올가에겐 불행한 일만 따를 것이라는 경고를 받을 정도였으니 피카소와의 결혼생활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피카소의 생애 3번째 연인이자 첫 번째 결혼 상대였던 '올가 코를로바'는 러시아 무용단의 발레리나였습니다. 디아길레프가 안무를 맡은 공연에 피카소가 무대미술을 맡으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피카소는 가냘프고 고급스러운 외모를 가졌던 올가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위해 그동안의 자신의 작업 스타일을 과감히 포기하고 오롯이 고전적인 방식으로 그녀를 그림으로 옮겨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고급스러운 취향과 귀족적인 생활은 자유분방했던 피카소와 그의 그림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작품의 새로운 원동력을 찾기 위해 출산을 앞둔 아내를 두고 새로운 연인을 찾는 건 피카소 본인에겐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올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파울로도 그의 제멋대로인 생활을 막진 못했습니다. 그는 45세의 중년으로 17살 미성년자였던 금발머리의 소녀 '마리 테레즈 발터'를 자신의 그림의 모델이자 새로운 연인으로 얻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그들의 나이 차이는 피카소 본인에게는 오히려 더욱 창조적인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테레즈는 피카소가 남긴 그림의 가장 많은 부분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성년자와의 연애는 당시에도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순 없었습니다. 피카소는 테레즈를 6개월이란 긴 시간을 들여 그녀를 집으로 들였고 자신의 아들을 돌보는 유모라는 직책을 씌워 그녀를 곁에 두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테레즈의 임신은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올가'가 간신히 지키고 있던 가정을 무너트리고 말았습니다. 올가는 아들 파울로와 함께 피카소를 떠나 별거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사생아를 낳은 테레즈의 심정도 온전하긴 힘들었을 것입니다. 피카소는 올가와의 이혼과 함께 테레즈와 결혼할 것을 약속했지만 분노에 찬 올가가 그렇게 쉽게 피카소를 놓아줄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분쟁 사이에 새로운 적이자 피해자가 등장합니다. 소용돌이 속 새롭게 등장한 여인의 이름은 '도라 마르' 패션잡지사의 사진 리포터로 일하던 여성이었습니다. 세 여인이 피카소의 사랑 전선에서 분쟁하는 사이 피카소의 영감은 불타올랐습니다 그는 새로 가세한 연인 도라의 영향으로 <게르니카>와 <눈물 흘리는 여인>을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이름으로 많은 여자들을 괴롭히던 피카소에게도 최대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를 그렇게 곤란하게 한 건 '프랑수아즈 질로'라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법대를 졸업하고 미술학도의 길을 밟고 있던 상당히 지적이고 냉철한 여성이었습니다. 겨우 미술학도의 길을 밟고 있던 그녀가 피카소의 궤변에 으름장을 놓고 논리로 피카소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피카소가 사랑했던 연인 중 가장 무서워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똑똑했던 프랑수아즈는 피카소를 사랑했으면서도 언제나 피카소의 달콤한 말들을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판단을 흩트려 놓았던 건 복수심에 불탄 올가였습니다. 올가는 프랑수아즈에게 피카소의 사랑을 온전히 붙잡으려면 그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속삭였고, 프랑수아즈는 이 말에 반발했지만 피카소를 믿고 싶은 마음에 결국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프랑수아즈는 피카소가 만난 여인 중 가장 똑똑하고 냉철한 여인이었습니다. <게르니카>가 완성되고 이를 취재하기 위해 왔던 여기자 주느비에브가 피카소의 사랑 레이더망에 들어와 애정전선이 이루어지고 있을 즘, 프랑수아즈는 눈치채지 못했었지만 결국 그녀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갔고 프랑수아즈는 피카소의 많은 연인 중 처음으로 그를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프랑수아즈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법정투쟁을 통해 피카소의 호적에 자신의 두 아이를 넣는데 성공하고 그녀의 자식들은 이후 피카소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이별 통보를 받았던 피카소는 처음엔 상당히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그는 또다시 새로운 여성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그녀는 이미 결혼도 했었고 아이도 있었던 '자클린 로크'였습니다. 어쩌면 피카소가 그녀에게 눈을 돌리고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리며 자신의 마지막 아내로 맞이한 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뒷일을 책임져줄 따뜻한 사람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피카소가 바라본 자클린은 깊고 짙은 눈을 지닌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동안의 피카소의 업보를 모두 이해하고 그가 앞뒤 가리지 않고 낳아놓은 자식들의 유산 분쟁까지 책임지며 피카소의 뒷일을 도맡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한마디의 불평도, 피카소를 향한 비난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피카소의 생은 1973년 그의 나이 91세에 끝이 났습니다. 그가 불행하게 만들었던 연인들과 후손들은 그가 죽은 이후에도 그 불행의 올가미에서 풀려나진 못했지만 그들은 피카소를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그와 함께 했던 시절의 행복을 논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비하인드스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