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으로
자신이 드러나기보다 막이 오르기 직전까지 공연을 위해 온 힘과 마음을 다하는 이, 배우들이 모두 엄지척을 하는 리더, ‘조용하지만 강력한’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사람, 권은아 연출가에 대하여.
editor 이민정
공연을 보기 전 프로그램북을 읽을 때마다 궁금했다. 얼굴 사진 한 장 없는데도 권은아 연출의 인사말은 뭐랄까, 제작진들의 인사말은 이래야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사소하지만 진심이 느껴졌고, 그렇다고 몇 개월 동안 작품 속에 빠져 살았을 텐데 쉽게 흥분하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짧은 글이었지만 24시간 생각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곱씹고 또 곱씹어 내뱉는 문장들이 힘이 되어 읽혀졌다. 그래서 이분은 어깨를 짓누르는 공연에 대한 어마어마한 책임감과 더불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연출가로서의 평소 생각과 철학, 작업 방식 등이 궁금해 인터뷰를 요청했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사진 찍히는 건 부끄럽다’는 진심 어린 코멘트와 함께, 역시나 깊고 깊게 생각한 것들을 정성스레 보내주었다.
현재 <엑스칼리버> 연출, <마리 앙투아네트> 공동 연출로 두 작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연출을 맡았을 때와 공동연출을 맡았을 때, 각각의 역할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연출가의 가장 중요한 의무와 덕목은 ‘책임감’이라고 생각해요. 흔히 연출가를 작품의 선장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이제부터 우리가 걷는 길의 방향과 여정을 모두 ‘선택’하는 최종 결정권을 연출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기에 작품이 잘 나오든 못 나오든 모든 책임은 연출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협력연출 또는 공동연출로 일을 많이 해 오면서 연출가가 제 생각과 다른 결정을 내릴 때, 제 의견을 피력하긴 하지만 연출가가 제 생각과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 결정을 받쳐줄 수 있는 해석을, 제 자신이 납득이 가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때까지 찾는 편입니다. 결국 결정에 대한 책임은 총 연출가가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로버트 요한슨 연출가가 이미 잘 그려둔 그림을 다시 재현하는 과정에서 그의 의도를 유지하며,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미세한 선을 찾아 붓 터치로 약간의 디테일을 더 추가하는 것이 저의 큰 역할이었고요, 반면 <엑스칼리버>는 수천 개의 퍼즐 조각 하나하나를 선택하고 다듬고 배열하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에서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재연의 경우, 이전과 달라지는 장면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같은 작품을 다시 만났을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변화를 주는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다른 연출가가 만든 작품을 수정해 올리는 작업들을 꽤 했습니다. 첫 번째 기준은 당연히 제 자신이 느끼는 아쉬운 점이나 부족한 점입니다. 제가 책임지고 끌고 가야 하는데 제가 납득이 안 되면 진심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점들을 보완해 가고자 하는 방향성이 그려지면 원작자들과의 대화가 두 번째입니다. 이렇게 어느 정도 새로운 뼈대가 나오면, 그 다음에 제작사, 스태프, 배우들, 지난 리뷰 등을 종합적으로 참고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소중히 듣는 편입니다. ‘아이디어’를 내는데 그 분야의 전문가여야 하거나 경력이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에 누구인가를 막론하고, 저와 정반대의 의견이 들어와도 일단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야 제가 가지고 있는 틀을 벗어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느 정도의 기본 뼈대만큼은 모두의 의견을 듣기 전에 수립하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 이 수많은 의견을 제시하기 때문이죠. 누군가는 이것이 좋은 반면 누군가는 이것이 싫고… 많은 의견을 듣다 보면, 사람은 흔들리기 마련이기에, 기준점이 되는 굵직한 뼈대를 먼저 세워 둬야 더 좋은 다른 아이디어를 접목하든, 혹은 치명적 오류를 발견하여 뼈대 자체를 수정하든, 줏대 없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번 <엑스칼리버> 재연도 새로운 넘버가 추가되고 아더왕의 인간적인 고뇌가 깊어지는 등 많은 부분이 달라졌습니다.
정말 많은 부분이 달라졌습니다. 100%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 건 아니지만, 얼마 전 다른 인터뷰에서 퍼센트를 물어보셔서 처음으로 세세하게 장면별로 들여다봤더니 초연과 같은 장면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각 파트별로 모든 스태프와 초연을 했던 배우분들이 모두 이건 ‘재연이 아니’라고 입을 모으던 얘기가 비로소 피부에 와 닿았다고 할까요? 넘버구성부터 장면의 순서, 각 캐릭터와 줄거리를 비롯하여 안무와 무술, 세트, 조명, 영상, 의상, 소품, 특수 효과까지 정말 많이 달라졌습니다. 자잘한 부분으로 꼽으면 기네비어가 수녀가 되지 않는 엔딩도 있습니다. 초연 때 가장 물음표가 떠올랐던 부분이라 작품을 수정할 때 가장 먼저 1순위로 올려 놓았고 끝까지 고집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프로그램북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만 알기 아까운 매력을 각 넘버에 녹여내서 각 배우가 아더인지, 아더가 각 배우인지 헷갈려지는 것이 목표”라고요. 이 목표에는 어느 정도 도달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충분히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반응도 뜨겁고요. 솔직히 그 매력이 평소 아더 역할을 맡은 배우 네 분에게서 충분히 보여지고, 저는 그런 모습들이 너무나 큰 매력으로 다가왔어요. 처음 무대에 드러누웠다가 옆으로 돌며 관객과 눈을 맞추는 등의 세세한 디렉션을 제시했을 때 나왔던 약간의 저항, 약간의 부끄러움과 머뭇거림이 점점 의외의 적극성과 자신들도 느끼는 재미와 뒤섞이며 무르익더니, 관객분들 반응이 좋아지고 익숙해지며 점점 더 폭발하는 것 같아요. 저는 한결같이 “더 가요! 더 나와도 됩니다!”를 외치고 있죠. 보는 사람이 주인공의 매력에 빠져야 그가 가는 여정을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번 시즌에 작품을 수정하며 꼭 필요했던 부분이기도 했는데 캐스팅이 참 잘 되었죠. 저만 해도 연습실과 공연장에서 수십 번 본 장면들인데도 아직도 가끔 객석에 앉아서 보면 자꾸 다시 보고 싶어지거든요.
연출님께서 생각하시는 각 아더 배우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와, 이 질문은 나이 순으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정말 네 명의 아더가 만약 한 가족의 형제들이었다면 딱 이랬을 것 같거든요. 우선 카이 배우는 정말 의지가 되는 듬직한 맏형 같아요. 함께 많은 작품을 했고, 개인적으로 많이 친하기도 한데 극도의 진지함과 극도의 허당끼를 동시에 지닌 것이 정말 매력이라고 생 각해요. 작품과 캐릭터를 파고들며 진지해 질 때는 논문을 집필 하는 학자 내지는 도시에서 일찍 성공한 냉철한 완벽주의자 같다가 장난칠 때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눈웃음을 짓는 순박한 시골소년이 되거든요. 평소에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추천해주는 지적인 감성과 실없는 농담 사이를 오가는 온도차가 둘 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고, 타인과 상황, 분위기에 대한 안테나가 매우 섬세해서 먼저 무언가를 눈치채는 순간이 많아 주변에 따뜻한 배려의 위로나 조언도 참 잘해주는 사람이죠.
김준수 배우는 온몸의 모세혈관 하나하나에서 터져나오는 듯한 에너지, 숨 넘어 갈 듯 세포 하나하나를 통해 폭발시키는 에너지를 빼놓을 수가 없어요.그런데 준수 배우는 확실하게 느낌표가 새겨지기 전엔 그 에너지에 시동도 안 거는 것 같아요. 안 걸리는 거죠. 대신에 무심한 듯 툭, 물음표를 던져요. 전 준수 배우의 무심한 듯 툭 던지는 이 물음표들이 참 좋아요. 그 안에 열정과 겸손이 함께 담겨있거든요. 그 물음표에 대한 답이 주어져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순간,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는 속도가, 또 느낌표에서 표현되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경이로울 지경이에요. 음식을 먹을 때 씹고 삼켜서 위장이 음식을 분해하면 흡수가 되어야 하잖아요? 뭐랄까. 마음이 동하기만 하면, 씹는 순간 흡수되는 느낌이랄까. 바로 흡수시키는 엄청난 센스를 타고났는데 계속 씹어보는 노력까지 겸비한 희귀한 케이스죠.
이번에 처음 합류한 서은광 배우의 경우, 본인이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성격 같아요. 또 뭘 던져도 바로 해내고 첫 연습 때 이야기한 작은 부분들도 여전히 다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똑똑하고 빨라요. 연습하는 동안 속으로는 떨려도 100% 프로답게 자신감을 끌어내는 성숙함과 뛰어난 친화력, 적응력 또한 매력이에요. 그래서 혼자만 이 역할을 처음 맡는데도 가끔 초연을 함께 했던 느낌이 있어요. 저도 모르게 은광 배우가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있어서 종종 사과했을 지경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어요. 극 속에서도 굉장한 플러스로 작용하지만 평소에도 표정만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매력이 있죠. 여러모로 정말 딱 셋째 같은 모습입니다.
막내 도겸 배우는 초연이 뮤지컬 첫 데뷔였어요. 보통 뮤지컬이 첫 데뷔인 배우들과 제가 거치는 커리큘럼 같은 과정이 있는데, 역대급으로 발전 속도가 빨라서 정말 놀랐어요. 연습 막바지쯤에 얼핏 보인 눈빛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무대에 가면 장난 아니겠구나, 했거든요. 정말 확 터져 나오더라고요. 첫 무대에 그러기 정말 쉽지 않은데 말이에요. 초연 끝나고 재연 일정이 잡히기도 전부터 꼭 재연 때 아더 역할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단 말을 도겸 배우한테 자주 했어요. 로딩된 작품을 두 번째로 했을 때는 얼마나 더 발전할까 궁금하고 기대가 컸거든요. 예상대로 이번이 두 번째 뮤지컬이란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역시 도겸 배우의 가장 큰 매력은 주변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가식없는 귀여움이죠.
<마리 앙투아네트>를 함께한 로버트 요한슨 연출과는 여러 번 작업해오셨습니다. 긴 시간 함께한 두 분의 호흡은 어떤가요?
제 유일한 사수입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주신 분이고요. 많은 연출가 분들을 뵈었지만 로버트 요한슨은 공연의 전 과정이 머릿 속에 있는 유일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가장 책임감이 강한 연출가이기도 해요. 제 신념처럼, 공연이 잘 되든 못 되든 본인이 어떻게 든 해결해서 책임을 지시려고 하죠.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부분입니다. 평소에는 굉장히 현명하고 인자하고 따뜻한 할아버지같은 분인데, 일을 할 때는 성격도 급하시고 본인 표현에 따르면 매우 ‘열정적’이어서 많이 욱하기도 하셔요. 반대로 저는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참는 성격이고, 감성이나 취향이 로버트 연출님과 많이 다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 둘이 잘 맞는 것 같아요. 서로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또 감사하게도 절 많이 믿어주시고 제 의견을 거의 수용해주시는 편이라, 저도 그렇게 배운 점을 저와 함께 일해주는 조연출들에게 그대로 넘겨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번 시즌은 팬데믹으로 인해 로버트 요한슨 연출과 스카이프를 통해 작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작업이실텐데, 현장이 아닌 온라인으로 소통하며 겪은 고충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나요.
이미 여러 번 올라간 작품들 같은 경우에는 제가 연습을 진행해 놓고, 후반부에 로버트 연출님이 합류하셔서 봐주시는 방식으로 팬데믹 이전에도 많은 작업을 해왔어요. 새로운 시즌이 올라가며 다듬고 싶은 부분이나 바꾸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 화상채팅으로 의논을 하고, 연습한 장면을 찍어서 보여드리기도 하고요. 이번에도 그런 부분들은 그렇게 진행이 되었고 합류 자체를 못 하시니 런스루 영상을 보내드리기도 했죠. 이미 척하면 척이라 현장에서의 세세한 사항들을 짧은 화상채팅으로 하나하나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생기긴 했지만, 서로 믿음이 있다보니 큰 고충은 없었던 것 같아요. 배우들을 직접 만나지 못해서 로버트 연출님이 많이 아쉬워하시죠.
배우와 연출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일 것 같습니다. 연출님에게 영감을 주는 배우가 있나요?
저는 감사하게도 좋은 배우들을 참 많이 만났어요. 어떤 한 배우를 거론하기 버거울 정도로요. 한 작품을 하는 동안, 그 작품을 하는 모든 배우는 “사랑하는 ‘내’ 배우”라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작품이 끝나고도 그 사랑이 거의 대부분 유지됩니다. 정말 앙상블 배우 한 분 한 분부터 모든 배우가 제게 영감을 줍니다.
연출의 방향을 정할 때 배우의 특성을 많이 고려하는 편인지, 혹은 반대로 큰 그림 속에서 배우가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만드는 편인지 궁금합니다.
큰 그림이 더 먼저인 것 같긴 해요. 대본 작업부터 이미 작가와 함께 그려둔 그림 안에 있는 캐릭터니까요. 그리고 어느 정도 큰 그림과 캐릭터에 어울리는 배우를 캐스팅하죠. 다만 요즘은 한 배역에 2명에서 4명까지 캐스팅되니, 각 배우의 스타일로 해석 될 수 있는 캐릭터의 범위를 넓혀서 생각합니다. 아무리 똑같이 만들어도 각자가 가진 개성이 있다 보니, 같은 배역을 소화하는 배우들마다 다른 매력과 다른 컬러가 나올 수 밖에 없거든요. 그래야 하고, 또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얻어갈 부분이 생기는 장점도 있어요. 작품 안에서 각 캐릭터에 제가 방향성을 그어 놓는 명확한 큰 선은 있지만 그 선 안에서 각 배우의 특성을 최대치로 살리는 것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배우들과 섬세하게 의견을 나누며 작업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작업 과정에서 특히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 입력되는 명령으로 연기하는 것이에요. 배우들이 마음이 가지 않거나 이해가 안 되거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움직이는 걸 제가 더 불편해하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더블 캐스팅 이상일 경우에는 어느 정도 약속을 정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공감하는 동기 부여를 찾아주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제가 배우를 설득시키든, 제가 설득되어서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계속 얘기를 많이 나눌 수 밖에 없죠. 그러다가 새로운 것이 나오기도 하고요. 물론 연습은 정해진 시간 안에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한없이 대화만 나눌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 배우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몸으로 움직여 시도해보죠. 해봐야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고, 막상 해보면 생각과 다른 결과가 나 오기도 하거든요. 가끔 물리적인 시간에 쫓겨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러면 꼭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고, 눈에 배우의 불편함이 보여요. 그럼 집에 가서 문자라도 보내고 어떻게든 시간을 빼서 다시 풀고 가죠. 어쨌든 수십 번 무대에 올라야 하는 건 배우잖아요. 제겐 각 배우가 무대에서 공연의 매 순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작품이 잘 풀리지 않거나 지칠 때, 어떤 방식 혹은 마음으로 대처하시나요?
아직은 제가 지칠 정도의 레벨까진 못 간 것 같아요. 이 쪽 일을 시작한 이래 줄곧 갖고 있는 신념은 ‘시간에 대한 책임’이에요. 이번 엑스칼리버 프로그램북 인사말에도 적었지만, 관객 한 분이 3시간의 공연을 보기 위해 준비하고 이동하는데 적어도 2시간은 걸린다고 하면 한 분당 5시간, 일천 석의 객석이 차면 우린 회당 총 5천 시간을 책임지는 거에요. 티켓 가격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엄청난 숫자가 되죠. 더불어 함께 하는 수백 명의 배우와 스태프의 시간까지 고려하면 그 숫자가 거의 배가 되겠죠. 제 압박일지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의 1분 1초는 소중한데, 이 정도의 책임을 생각하면 작품이 잘 풀리지 않아 고민하고 풀어가는 과정에 지칠 겨를이 없어요. 무엇보다, 뮤지컬은 저 혼자 하는 예술이 아니라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여럿이 머리를 맞대면 풀리지 않는 일은 잘 없더라고요.
그동안 작업하신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과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혼자 연출한 첫 작품인 이번 <엑스칼리버>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요. 사실 이건 이 질문에 답을 쓰다 보니 나온 말이고, 아마도 매번 하고 있는 작품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 같아요.
연출님이 생각하는 ‘좋은 뮤지컬’이란 무엇일까요? ‘좋은 뮤지컬’ 을 만들기 위한 스스로의 기준도 궁금합니다.
역시나 ‘좋은 뮤지컬’이란 관객분들께 의미있는 시간이 된 뮤지컬인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시간이 아깝지 않은 뮤지컬이 될 수도 있겠네요. 재미든, 위로든, 교훈이든, 물음표든, 느낌표든 무언가를 남겨 마음을 움직이는 뮤지컬이 ‘좋은 뮤지컬’인 것 같아요. 그리고 대극장 뮤지컬은 그와 동시에 오감을 자극하는 새로운 그림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계속 찾고, 또 새로운 시도를 할 땐 변수를 생각해서 만약 안 될 경우를 대비할 두 번째 플랜, 세 번째 플랜까지 세워놓고 시도를 해요. 보통 새로운 시도에는 어마어마한 돈과 시간이 들어가거든요. 해보고 안 된다고 그냥 포기할 수가 없죠. 감사하게도 제작사에서 이러한 시도에 투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스태프분도 그만큼 어떻게든 만들어내려 노력해주신 덕에 아직까지는 다행히 어떤 시도도 세 번째 플랜까지 간 적은 없어요.
연출가로서, 그리고 한 명의 관객으로서 어떤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에 끌리는 편인가요?
우리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경험하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 ‘죽음’이잖아요. 죽음만큼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존재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늘 ‘후회 없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돼요. ‘후회 없는’ 죽음이란 곧 ‘후회 없는’ 삶이 되기도 하기에, 3시간의 공연이 누군가에게 ‘후회 없는 삶’에 대해 생각 하게 해 줄 수 있다면, 혹은 어떤 작은 의지를 준다면, 그만큼 값진 공연이 있을까 싶기도 해요. 저의 경우 ‘후회 없는’ 삶은 이미 글렀지만 ‘후회 없는’ 죽음으로 가는, 수없이 다양한 삶의 여정을 담은 이야기에 대리 만족도 하고, 위로도 받고, 여러모로 좀 끌리는 편인 것 같아요.
연출가로서 최종적으로 바라보는 목표가 궁금합니다.
저는 이 길을 가능한 오래 가고 싶다거나 많은 작품을 하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허락되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저와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어주시는 모든 스태프, 배우, 그리고 그 여정의 끝을 지켜봐 주시는 관객 여러분께 즐거운,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제가 떠나야 할 때가 오면, 저와 함께 일하고 있는 훌륭한 조연출들에게 제가 걷던 자리를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개인적인 목표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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