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 6시 반, 인기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이 한창 송출될만한 이 인기 시간대에, 한 할아버지가 붓을 들고 시청자들 앞에 서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뻔뻔스럽게도 사람들에게 유명 화가들이 그림 그렸던 기술적 방법들을 시청자들에게 알려줍니다. 이 할아버지의 그림 교육 방송을 보다 보면, 단번에 유명 화가의 그림들을 한두 번 모방해본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할아버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죄로 인해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죄명은 위작 생산. 하지만 노년의 나이와 망가져버린 폐 등을 첨삭 받아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위작을 만들어냈던 죄인치고는 일반 사람들에게 상당한 위로와 지지를 받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걸 알기 위해선 먼저 이 불쌍한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이 할아버지의 이름은 톰 키팅입니다. 그는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도장 업자로 일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림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화가가 되기 위한 정식 교육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가난한 가정환경에 처해있었습니다. 그나마 간신히 다니고 있던 학교도 14세의 나이에 퇴학당하고 맙니다. 그의 삶에 있어 학업보단 입에 간신히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가 수많은 일들을 전전하던 중 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가난했던 그가 밥과 월급이 나오는 군 입대를 마다할 리 없었습니다. 군에 입대한 그는 정기적으로 나오는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자신의 미래를 계획했습니다. 그가 꿈꾼 미래는 당연히 화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전역 이후 그가 한 일은 그만 모아논 돈으로 영국의 유명 예술대학, 골드스미스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입학 후 수업에서 그의 그림 실력은 주변 동급생들과 교수들의 인정을 받을 만큼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기술적인 부분이 뛰어났지만, 창의적인 부분은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은 즉, 급변하는 미술계에서 명성 있는 화가가 되긴 힘들다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게다가 대학 생활 2년이 돼가던 중, 그의 수중에 그간 모아뒀던 돈들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족한 학비와 자신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미술 복원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미술 복원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으론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해결하기엔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습니다. 만약 그의 작품이 유명해지고 좋은 후원가를 만났다면 걱정이 없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더욱 미술 복원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이유에서인지 복원 공방의 주인이었던 프레드 로버트가 그에게 '프랭크 모스 베넷'의 그림 중 하나를 재현해 볼 것을 제안했고 그는 그것을 수락해 프랭크 모스의 그림과 똑같은 그림 한 점을 그려냈습니다. 자신의 위작에 만족해 그림 위에 자신의 이름까지 서명했던 키팅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습니다. 이후 프레드 로버트는 키팅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그림의 서명을 프랭크 모스 베넷으로 바꾸고 웨스트엔드 갤러리에 그림을 위탁했습니다. 키팅의 이 가짜 그림은 한 컬렉터에게 팔렸고 뒤늦게 키팅에게 이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에 키팅은 화날 만도 했지만, 오히려 어떤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그림은 수많은 노력에도 팔리지 않았지만, 유명한 화가의 위작은 단숨에 팔려 나갔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영국의 미술계와 갤러리에 자신만의 방법으로 복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유명 화가의 위작을 만들어내고 그림 안에 복원가나, 그림 감정사라면 모두 이 그림이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어떤 '장치'를 숨겨둔 채 그림을 유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치는 납성분의 흰색으로 캔버스에 작은 글자를 적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그림의 성분 분석을 위해 X-ray 촬영을 한다면 그림이 '가짜'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장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2,000여 점의 위작을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이러한 장치가 발각된 건 영국 타임스의 기자였던 제럴딘 노먼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톰 키팅이 그린 '사무엘 팔머'의 수채화 몇 점을 구매했고, 이를 한 전문가에게 감정을 맡겼습니다. 당연히 그림은 가짜로 판명 났고, 그림의 출처를 추적해 톰 키팅에게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였던 그는 톰 키팅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고 이를 수락한 톰 키팅은 그간의 모든 일을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가난했던 삶과, 가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그것을 유통하기까지. 그의 이런 범죄로 세간의 비난을 받을 법도 했지만, 오히려 그동안 터무니없는 미술계의 작품값에 불만이 쌓여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응원에 힘입어 그는 영국에서 시청자가 가장 많은 시간대에 유명 화가의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까지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단번에 영국의 스타가 된 그는 그가 홀로 꾸준히 그려왔던 작품까지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덩달아 그가 미술계에 복수하기 위해 그렸던 위작들 마저 가격이 치솟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기까지 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그가 꿈에 그리던 전업 화가가 되었지만. 그가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건강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복원가로 일하며 인체에 해로운 화학약품을 많이 다룬 탓에 그의 폐는 이미 반절 이상이 상해 있었습니다. 그는 TV 프로그램을 진행한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 당시 톰 키팅의 그림 방송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영상을 감상해 보세요 ▼▼
우리가 몰랐던 비하인드스토리
일하고 뭐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