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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잘못 태어난 천재 여성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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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9. 12:1042,868 읽음

어린 시절의 카미유 클로델

카미유 클로델은 예술적 재능으론 천재에 가까운 실력을 지녔던 인물이지만 그녀가 태어났던 시대와 여성이란 성별은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그 괴롭힘의 시작은 그녀의 출생부터 시작됩니다. 그녀는 프랑스 북부의 한 지방에서 1864년 장녀로 태어났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가 남자아이이길 바랐습니다. 그녀의 부모 사이엔 그녀보다 먼저 남자아이가 태어났었지만 생후 2주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남자'아이를 향한 부모의 애착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두 번째 아이였던 클로델의 이름이 중성적 성향을 가진 '카미유'인 이유도 그녀의 부모가 세상을 떠난 첫 번째 아이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여자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나 친척 중엔 예술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와 동생 폴은 예술적 재능을 보여 왔습니다. 어릴 적의 카미유는 정식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스스로 진흙을 가지고 당시의 위인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흉상을 만들어 보이곤 했습니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그녀를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에게 보내 정식적으로 조각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카미유 클로델의 <청년 폴 클로델의 흉상>

몇 번의 수업을 통해 알프레드 부셰 또한 그녀의 재능에 감탄하고 그녀가 성별과 상관없이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카미유를 다른 예술가들과 다르지 않게 뛰어난 재능이있는 예술가들이 모였던 프랑스 국립 미술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자신의 인맥을 활용했지만, 당시 국립미술 학교엔 여성이 입학했던 사례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뿌리 깊게 박혀있던 사회적 통념을 깨지 못한 그녀는 결국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입학을 거부당하자 부셰는 국립학교를 대신해 당시 유일하게 여성들에게 입학을 허용했던 사립학교에서 그녀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입학을 도와주었습니다.

카미유 클로델과 오귀스트 로댕

이후 부셰가 1883년  그랑프리 드 살롱에서 우승해 이탈리아행이 결정되면서 더이상 카미유의 작품을 봐줄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오랜 친구 예술가였던 오귀스트 로댕에게 카미유를 포함한 자신의 제자들의 대리 교육을 부탁했습니다. 로댕은 부셰의 부탁들 들어주었고, 그를 대신해 제자들을 봐주면서 제자들 사이에서도 카미유가 만들어낸 생명력 넘치는 조각들을 보고 그녀의 특출난 재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각에 열중하고 있는 카미유 클로델

카미유의 재능을 본 로댕은 그녀에게 권유해 자신의 작업실에서 조수 겸 모델로 활동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카미유에게 있어 로댕과의 관계는 당시 여성 예술가로서는 갖기 힘든 여러 활동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 조각가로서 활동하는 그녀를 향한 시선은 그렇게 좋진 못했습니다. 심지어 로댕의 작업실에서 모델로 일하던 누드모델들은 같은 여성이었던 카미유 앞에서 옷을 벗는 일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로댕과 카미유의 사이는 깊어져만 갔기 때문에 모델들의 불만이 수용될리는 없었습니다. 

카미유가 함께 작업한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

카미유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꾸준히 일하며 로댕의 대표작인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 등 그의 걸작 제작에 참여해 힘을 보탰습니다. 둘이 관계는 사랑의 교감을 넘어 서로의 작품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시기의 둘의 작품엔 두 개의 손 자국 서명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오귀스트 로댕의 <입맞춤>(좌)와 카미유 클로델의 <왈츠>(우)

카미유에게 있어 당시 로댕이란 존재는 축복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와의 관계가 가져다줄 비극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로댕은 여러 예술계 모임에서 카미유와 함께 다니며 그녀가 만든 조각들의 위상에 대해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로댕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작품을 본 비평가들은 실제로 독창적이고 다양하게 발전한 그녀의 작품 자체를 평가하기보다 언제나 그녀의 조각에서 로댕의 흔적을 찾아 평가할 뿐이었습니다.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의 평가 바로 바라봐 주지 않는 비평가들의 평가에 동요해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카미유 클로델의 <행운>(좌)와 <단념>(우)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 그림자같이 붙어있던 로댕이란 이름표를 때기 위해 그와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녀는 로댕으로부터의 해방이 비로소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팍팍했던 여성 예술가에 대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로댕이란 존재가 사라지자 그녀의 삶은 점점 더 무너져 갈 뿐이었습니다.

카미유 클로델의 <성숙의 시대>

그들은 결별 후에도 작품에 관해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해왔었지만 자신의 불행해진 삶이 로댕의 탓이라 생각한 그녀는 그를 비난하고 그에게서 자신의 작품을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며 숨겼습니다. 그녀의 정신적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스스로 작품을 파괴하는데 이르렀고 우울증과 피해 망상까지 앓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유일한 조력자로 남아있던 동생 폴은 카미유를 요양소에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요양소에 30년간 갇혀 바깥출입을 일채 금지당한 그녀는 요양소 생활 중에도 동생 폴에게 조각을 하고 싶다는 호소와 함께 퇴원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동생 폴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70세에 요양소에서 찍은 카미유 클로델의 사진

1943년 1월 19일, 카미유 클로델은 79세의 나이에 자신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이들 없이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는 가족과의 연고가 증명되지 않아 공동 매장 처네 묻혔고 이후 그녀의 시신을 가족들과 안치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이미 공동 매장처에 묻혀버린 그녀의 유해를 찾지 못해 그것 또한 노력에만 그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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