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원 헌드레드(ONE HUNDRED)

빌라 사보아(La Villa Savoye),
현대 건축의 발원지

여행조쵸님의 프로필 사진

여행조쵸

공식

2020.11.16. 08:576,928 읽음

파리에서 약 30㎞ 떨어진 작은 도시, 포아시(Poissy)는 여행객이 그리 많이 찾는 곳은 아니다. 북쪽으론 센 강이 흐르고 남쪽으론 생제르맹 앙 레(Saint-Germain-en-Laye) 숲과 궁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특별할 것 없는 프랑스의 소도시다. 유명한 게 있다면 PSA 그룹의 생산 기지가 있다는 정도?

빌라 사보아
82 Rue de Villiers, 78300 Poissy, 프랑스
저장
관심 장소를 MY플레이스에 저장할 수 있어요. 팝업 닫기
'내 장소' 폴더에 저장했습니다.
MY플레이스 가기 팝업 닫기
전화
상세보기

이곳에 특이하게 생긴 집 한 채가 있는데, 바로 빌라 사보아(La Villa Savoye)다. 프랑스를 대표(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 건축가로서는 프랑스에서 정착했으니) 한다고 할 수 있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와 그의 사촌 피에르 장느레가 설계한 주택으로 이름처럼 사보아 가족을 위해 지었다.

무려 1931년에 완공된 주택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100년 고택' 같은 느낌인데 그 모습이 영 예스럽지 않다.

큰 전쟁은 건축 패러다임의 변화를 불러온다. 세계대전 후 유럽의 건축가들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건물을 빠르게 복구하기 위해선 과거의 화려했던 장식과 디자인을 버리고 실용주의 노선을 택해야 했다. 그렇게 유럽의 건축 양식은 전쟁 때문에 단순한 모더니즘 시대로 접어들었다. 혼돈의 시대에선 항상 유행을 이끄는 선구자가 있게 마련이다. 바로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다.

스위스 태생인 그의 원래 이름은 샤를 에두아르 잔레그리(Charles-Edouard Jeanneret-Gris). 하지만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르코르뷔지에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는 원래 시계 장식가가 되기 위해 야간 미술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에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이 건축가가 되길 권했다. 학교 대신 현장과 여행을 통해 새로운 건축 세계에 눈을 뜬 그는 점차 자신만의 건축 철학을 구축하며 현대 도시 설계까지 손을 뻗쳤다.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건축 양식이 바로 '돔이노(Dom-Inno)'다. 라틴어 '도무스(Domus)'와 혁신을 뜻하는 '이노베이션(Innovation)'의 합성어로 벽 대신 철근 콘크리트 기둥이 모서리에서 층을 받치는 단순한 구조를 말한다. 이 개념은 그가 이탈리아 여행 중 만난 파르테논 신전에서 깊은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이와 비슷한 건축 양식으로 '필로티(Pilotis)'라고도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 빌라 구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1층을 테라스나 주차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 인구밀도가 높은 도심에서 매우 유용하다. 이러한 건축 방식이 프랑스에서 무려 거의 100년 전부터 시작됐고, 이 빌라 사보아(La Villa Savoye)가 그 시조새 격인 건축물인 셈이다. 다시 말해, 현대 건축 양식의 큰 전환점이 됐던 성지라고도 할 수 있다.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1층 외부는 건물의 안이기도 하면서 밖이기도 하다. 필요에 따라 차고로 쓸 수도 있고 햇볕과 비를 피하며 차나 식사를 즐길 수도 있다. <르코르뷔지에: 빌라 사보아의 찬란한 시간들>에 소개된 당시 외제니 사보아의 오더를 보면 가정부와 운전기사의 방, 화장실, 와인 저장소, 지하 창고, 수도꼭지까지 매우 디테일하게 적혀있다. 마치 집 전체가 머릿속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집은 사보아 부부의 기대처럼 그리 완벽하지 않았다. 항상 누수와 난방 불량으로 사보아 가족은 불편을 겪어야 했고, 2차 세계대전을 피해 사보아 가족은 이 집을 떠났다. 전쟁의 상흔으로 창고처럼 쓰이다 철거 위기까지 갔으나, 다행히 국유화와 함께 복원돼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 2016년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현재 입장료는 8유로, 코로나19 때문에 상황에 따라 개관 일정을 조정하며 운영 중이다.

1층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나선형 계단이 우뚝 솟아있다. 1층은 주로 운전기사와 관리인 등이 머물며 사보아 가족의 시중을 들었다. 1층과 2층을 신속히 오가기 위한 수직 통로이자 집의 하이어라키를 은근히 드러내는 상징이다.

나선형 계단 옆에는 위층으로 향하는 경사로가 있다. 계단이 있는데 굳이 또 경사로를? 이 경사로를 'Piano nobile'이라고 하는데, 르코르뷔지에가 추구하는 '건축적 산책로(Architectural promenade)'에 해당한다. 이 길은 사보아 가족이 1층에 주차하고 주변 풍경을 수평적으로 천천히 음미하며 실제 거주 공간으로 올라가는 여유를 나타낸다. 실제로 르코르뷔지에가 그리스 산토리니를 여행할 당시 산비탈을 걸으며 집들을 감상했던 경험에서 비롯됐다.

테라스와 맞닿아 있는 '사보아 살롱'은 이 집의 거실이다. 비가 올 때는 차창에 부딪혀 흩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날이 좋을 때는 햇빛이 안으로 강하게 들이치며 집 안을 헤집어 놓는다. 프라이빗하게 외부와 철저히 단절하면서 밖의 풍경을 언제든 통째로 집안으로 가져온다.

빛은 집안 곳곳으로 스며든다.

흙을 연상케하는 바닥의 타일은 벽난로와 함께 따스한 느낌을 전한다.

백색의 단조로움 속에서 벽면과 의자 등을 활용해 폴리크롬(Polychrome) 방식으로 다채로운 느낌을 더했다.

주방에도 창을 큼직하게 내어 빛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안방과 붙어 있는 욕실. 목욕을 하고 잠시 누워 쉴 수 있는 돌침대가 아주 인상적이다. 타일의 컬러 조화도 굉장히 고급스럽다. 아주르(Azure) 컬러의 하늘색은 지중해에서 따왔다고 한다.

화장실의 모습도 당시 연도를 생각하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테라스 중정. 항상 백야드가 있는 집을 꿈꾸었는데, 이 모습을 보니 생각이 많이 달라진다. 리본(Ribbon) 창문 덕에 밖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다. 거실에서 창문만 열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햇볕이 쏟아지든 그날의 날씨를 맨발로 보듬을 수 있는 곳이다. 차를 마시든, 가족과 수다를 떨든, 독서를 하든, 바비큐 파티를 하든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마법의 공간이다.

액자와 같은 창 그리고 그 밑에 놓인 테이블이 와인을 부른다.

호화 크루즈의 갑판을 연상케 하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루프 가든이 나온다. 선베드와 작은 테이블이 놓인 것으로 보아 이곳은 음료를 마시며 일광욕을 하는 곳일 게다.

집을 바라보는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새로운 풍경과 감성이 펼쳐진다. 어느 곳 하나라도 평범한 곳이 없다.

이 집을 나오면서 흔적을 남겼다. 발자취를 보니 건축학도들이 많이 다녀갔다.

약 100년 전 빌라 사보아에서 시작한 현대 건축의 패러다임은 현재 세계 각지로 뻗어나갔다. 전쟁을 기점으로 너무 확 달라진 느낌도 있지만, 사보아 빌라의 방식은 간편한 주차와 승하차(예를 들어 프리미엄 호텔의 로비 입구), 도심에서의 효율적인 주거 건축 등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사보아 가족은 현대판 귀족이었다. 부유했고 배경도 남달랐다. 하지만 1920년대의 다른 부유층과 다르게('위대한 개츠비'만 보더라도 당시 부자들이 어떠한 집에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집을 매우 파격적으로 지었다. 단순하고 조촐해 보이지만 살기에 편리하다. 그래서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말했던 르코르뷔지에에게 집 설계를 맡겼는지도 모르겠다. 100년 전, 어떤 집은 그 시대에서 멈추었고, 어떤 집은 그 시대에서 시작됐다.

글 조두현
사진 조두현·구기성


이 콘텐츠는 2018년 3월에 취재했습니다



로딩중